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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재정·계획 인물 124명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경제·재정·계획 소련 국가기관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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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야블린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Явлинский
경제·재정·계획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952–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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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
  • 1990.7–11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91.8–12소련 국민경제 운영관리위원회 부의장 (부총리급)
  • 1991.10–12소련 대통령 직속 정치자문위원회 위원
  • 1990–1993EPICenter 경제·정치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93–2008야블로코당 창당자 겸 당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우소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сов
경제·재정·계획 소속 미확정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인 1954–1991 ✕ 유탄에 사망

코마리를 도우려다 유탄에 쓰러진 37세 경제학자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코마리를 도우러 달려갔다. 사수가 경고 사격을 했지만 우소프는 멈추지 않았고, 곧 유탄이 그를 스쳤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에서 경제학자로 일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달려가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흘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한 세 희생자에게 소련 최후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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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스탈린 농업기술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78–1980해군 해안통신부대 복무 (하사)
  • ~1990–1991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 경제학자
  • 1991.08.21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백악관 방어 중 사망

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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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7전연방체계연구소(VNIISI)·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7–1990《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
  • 1990《프라우다》 경제부장, 경제정책연구소 설립·소장
  • 1991.11–1992.3러시아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 재무장관
  • 1992.3–12제1부총리; 6~12월 총리 대행
  • 1993.9–1994.1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대행: 10월 위기 TV 호소
  • 1993–1995국가두마 의원, '러시아의 선택' 원내대표
  • 1994–2001'러시아 민주선택' 당대표, SPF 공동대표(2000)
  • 1999–2003국가두마 의원, 조세·예산법안 주도
  • 1992–2009경제정책연구소(현 가이다르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