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노동과 자본』
엥겔스의 서문(1891)
이 소책자는 1849년 4월 4일부터 『신라인 신문』에 일련의 사설로 처음 실렸다. 본문은 마르크스가 1847년 브뤼셀 독일노동자협회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재는 끝을 보지 못했다. 신문 제269호 사설 끝의 「계속」이라는 약속은 그때의 급박한 사건들, 곧 러시아군의 헝가리 침입과 드레스덴, 이저론, 엘버펠트, 팔츠, 바덴의 봉기[3]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고, 그 사건들은 1849년 5월 19일 신문의 폐간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가 남긴 원고 가운데서도 이 논설의 속편은 발견되지 않았다.
『임금노동과 자본』은 독립된 출판물로 여러 판이 나왔고, 그 마지막은 1884년 호팅겐-취리히의 스위스 협동조합 인쇄소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판은 원래 논설의 자구를 그대로 실었다. 그러나 이번 판은 적어도 1만 부가 선전 소책자로 뿌려질 것이므로, 이런 사정에서라면 마르크스 자신이 원문을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찍는 데 찬성했을까 하는 물음이 내게 자연히 떠올랐다.
1840년대의 마르크스는 아직 정치경제학 비판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은 185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 제1분책이 완성되기 전에 발표된 그의 저작들은 1859년 이후의 저작들과 몇 가지 점에서 어긋나며, 뒷날의 저작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확하고 심지어 틀린 것으로 보이는 표현과 문장들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를 위한 보통의 판본에서는 이 이른 시기의 관점도 저자의 지적 발전의 한 부분으로서 제자리를 가지며,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이 옛 저작을 고치지 않고 다시 찍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경우라면 나는 한 마디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오로지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판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런 경우 마르크스 자신이 1849년의 이 옛 저작을 자기의 새 관점과 조화시켰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목적을 모든 본질적인 점에서 이루는 데 필요한 몇 군데의 수정과 보충을 이 판에 넣는 것이 그의 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독자에게 미리 말해 둔다.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가 1849년에 쓴 그대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1891년에 썼더라면 썼을 대로에 가깝다. 게다가 원문 그대로의 판이 이미 많이 나돌고 있으므로, 언젠가 마르크스 전집에서 다시 고치지 않고 펴낼 수 있을 때까지는 그것들로 충분할 것이다.
내 수정은 한 점을 중심으로 한다. 원래의 본문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판다. 지금의 본문에 따르면 그는 자기의 노동력을 판다. 이 수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야겠다. 노동자들에게는, 우리가 말꼬리를 잡거나 낱말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 하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부르주아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경제 분석도 쉽게 알아듣게 할 수 있는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이 이런 까다로운 문제가 평생 풀리지 않는 채로 남는 우리의 거만한 「교양」 있는 이들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스스로 확인하도록.
고전파 정치경제학[4]은 제조업자가 자기 노동자들의 노동을 사서 값을 치른다는 통용되는 관념을 산업의 실무에서 빌려 왔다. 이 관념은 제조업자의 사업 목적, 곧 그의 장부 기재와 가격 계산에는 꽤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순진하게 정치경제학으로 옮겨지자 그것은 거기서 참으로 놀라운 오류와 혼란을 낳았다.
정치경제학은 모든 상품의 가격이, 그 가운데 자신이 「노동」이라 부르는 상품의 가격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그것이 상품 자체의 생산과는 흔히 아무 관계도 없는 갖가지 사정으로 오르내려서 가격이 대체로 순전한 우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발견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이 과학으로 나서자마자 그 첫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이 우연 뒤에 숨어 있는 법칙, 겉으로는 상품 가격을 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연 자체를 실제로 지배하는 법칙을 찾는 것이었다. 때로는 위로 때로는 아래로 흔들리고 진동하는 상품 가격들 가운데서, 이 변동과 진동이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고정된 중심점이 탐색되었다. 요컨대 정치경제학은 상품의 가격에서 출발해, 모든 가격 변동을 설명할 수 있고 결국 모든 변동을 거기로 환원할 수 있는 규제 법칙으로서 상품의 가치를 찾았다.
그리하여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상품의 가치가 그 안에 체현된,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설명으로 그것은 만족했다. 그리고 우리도 당장은 이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독자에게 상기시켜 두거니와, 오늘날 이 설명은 전혀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가치 형성 성질을 처음으로 철저히 탐구하여, 겉보기에, 또는 실제로도,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모든 노동이 어떤 사정에서나 그 상품에 소모된 노동량에 상응하는 가치 크기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리카도 같은 경제학자들과 함께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정해진다고 짧게 말할 때, 우리는 언제나 마르크스가 붙인 유보와 제한을 함께 뜻한다. 지금의 목적에는 이만큼으로 충분하다. 더 자세한 것은 1859년에 나온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자본론』 제1권에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노동에 의한 이 가치 규정을 「노동」이라는 상품에 적용하자마자 그들은 하나의 모순에서 다른 모순으로 빠져들었다.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 안에 체현된 필요 노동에 의해. 그러나 한 노동자의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의 노동에는 얼마만큼의 노동이 체현되어 있는가? 노동이 모든 가치의 척도라면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오직 노동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시간 노동의 가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그것이 한 시간의 노동과 같다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그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목표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다가가지 못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원을 돌고 있다.
그래서 고전파 경제학은 다른 길을 시도했다.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비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생산비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논리를 조금 비틀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확인할 수 없는 노동 자체의 생산비를 탐구하는 대신, 그들은 이제 노동자의 생산비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와 사정에 따라 변하지만, 주어진 사회 상태, 주어진 지역, 주어진 생산 부문에서는 그것 역시 적어도 꽤 좁은 한계 안에서는 주어져 있다.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의 체제 아래 살고 있으며, 거기서는 인구의 크고 꾸준히 늘어나는 한 계급이 생산수단, 곧 도구, 기계, 원료, 생활수단의 소유자를 위해 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조건에서만 살 수 있다. 이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서 노동자의 생산비는 그가 일할 수 있게 하고, 그에게서 이 노동 능력을 유지하며, 나이나 병이나 죽음으로 그가 떠날 때 그를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데, 곧 노동자계급을 필요한 수만큼 번식시키는 데 평균적으로 필요한 생활수단(또는 그 화폐가격)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생활수단의 화폐가격이 평균 하루 3실링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리의 노동자는 고용주에게서 하루 3실링의 임금을 받는다. 그 대가로 자본가는 그를 이를테면 하루 열두 시간 일하게 한다. 게다가 우리의 자본가는 대략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우리의 노동자(기계공)가 기계의 한 부품을 만들어 하루에 완성한다고 하자. 원료(필요한 형태로 준비된 쇠와 놋쇠)는 20실링이다. 증기기관의 석탄 소비, 이 기관 자체와 선반과 우리의 노동자가 쓰는 그 밖의 도구의 마모는 하루와 노동자 한 사람에 대해 1실링의 가치를 나타낸다. 하루 임금은 우리의 가정대로 3실링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기계 부품에는 모두 24실링이 든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기가 고객에게서 평균 27실링의 값을, 곧 자기 지출보다 3실링 많은 값을 받으리라고 계산한다.
자본가가 호주머니에 넣는 이 3실링은 어디서 오는가?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주장에 따르면 상품은 길게 보아 그 가치대로, 곧 그 안에 담긴 필요 노동량에 상응하는 가격으로 팔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계 부품의 평균가격 27실링은 그 가치, 곧 그 안에 체현된 노동량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 27실링 가운데 21실링은 기계공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던 가치였다. 20실링은 원료에, 1실링은 일하는 동안 소비된 연료와, 공정에서 쓰여 그만큼의 가치를 잃은 기계와 도구에 들어 있었다. 원료의 가치에 더해진 6실링이 남는다. 그런데 우리 경제학자들 자신의 전제에 따르면 이 6실링은 노동자가 원료에 더한 노동에서만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열두 시간 노동이 6실링의 새 가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열두 시간 노동의 가치는 6실링과 같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침내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했다.
「잠깐!」 우리의 기계공이 외친다. 「6실링이라고? 하지만 나는 3실링밖에 못 받았소! 내 자본가는 내 열두 시간 노동의 가치가 3실링을 넘지 않는다고 밤낮으로 맹세하고, 내가 6실링을 요구하면 비웃을 것이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앞서 우리가 노동의 가치를 가지고 악순환에 빠졌다면, 이제 우리는 풀 수 없는 모순으로 곧장 뛰어든 셈이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찾았고,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찾았다. 노동자에게 열두 시간 노동의 가치는 3실링이고, 자본가에게 그것은 6실링인데, 그 가운데 3실링은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3실링은 자기가 호주머니에 넣는다. 이에 따르면 노동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가치를, 게다가 아주 다른 두 개의 가치를 갖는다!
지금 화폐로 표현된 가치들을 노동시간으로 환원하면 모순은 더욱 터무니없어진다. 열두 시간의 노동으로 6실링의 새 가치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여섯 시간에 만들어지는 새 가치는 3실링, 곧 노동자가 열두 시간 노동에 대해 받는 액수와 같다. 노동자는 열두 시간의 노동에 대해 여섯 시간 노동의 생산물을 등가물로 받는다. 그러니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의 결론으로 내몰린다. 노동에 두 개의 가치가 있고 그 하나는 다른 하나의 두 배이거나, 아니면 12는 6과 같거나! 어느 쪽이든 순전한 불합리다. 「노동」의 매매와 「노동의 가치」를 말하는 한, 아무리 뒤틀고 비틀어도 우리는 이 모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이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일어났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마지막 갈래인 리카도 학파는 대체로 이 모순을 풀 수 없다는 데서 난파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한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다.
경제학자들이 「노동」의 생산비로 여겼던 것은 사실 「노동」의 생산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자 자신의 생산비였다. 그리고 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 것은 그의 노동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의 노동이 실제로 시작되자마자 그것은 이미 그의 것이기를 그치며, 따라서 더 이상 그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는 자기의 미래의 노동을 팔 수 있을 것이다. 곧 일정한 시간 안에 일정한 일을 해내겠다는 의무를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그는 (먼저 수행되어야 할)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약정된 지불을 받고 일정한 시간 동안(시간급의 경우) 또는 일정한 일의 수행을 위해(성과급의 경우)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노동력을 빌려주거나 판다. 그런데 이 노동력은 그의 몸과 함께 자라났고 그것과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생산비는 그 자신의 생산비와 일치한다. 경제학자가 노동의 생산비라 부른 것은 사실 노동자의, 따라서 그의 노동력의 생산비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노동력의 생산비에서 노동력의 가치로 되돌아가,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매매」 장에서 한 것처럼 일정한 질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의 양을 규정할 수도 있다.[5]
그러면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을 판 뒤에, 곧 약정된 임금(시간급이든 성과급이든)을 받고 자기 노동력을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본가는 노동자를 자기 작업장이나 공장으로 데려간다. 거기에는 일에 필요한 물품, 곧 원료, 보조 재료(석탄, 염료 등), 도구, 기계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여기서 노동자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하루 임금은 위에서처럼 3실링이고, 그것을 일급으로 벌든 성과급으로 벌든 아무 차이가 없다. 우리는 다시 노동자가 열두 시간에 자기 노동으로 소비된 원료의 가치에 6실링의 새 가치를 더한다고 가정하며, 자본가는 완성된 제품을 팔아 이 새 가치를 실현한다. 이 새 가치에서 그는 노동자에게 3실링을 지불하고 나머지 3실링은 자기가 갖는다. 그런데 노동자가 열두 시간에 6실링의 가치를 만든다면 여섯 시간에는 3실링의 가치를 만든다. 따라서 자본가를 위해 여섯 시간 일하고 나면 노동자는 임금으로 받은 3실링의 등가물을 그에게 돌려준 것이다. 여섯 시간의 일 뒤에 둘은 서로 빚이 없고, 어느 쪽도 상대에게 한 푼도 빚지지 않는다.
「잠깐!」 이번에는 자본가가 외친다. 「나는 노동자를 하루 종일, 열두 시간 동안 고용했소. 그런데 여섯 시간은 반나절일 뿐이오. 그러니 나머지 여섯 시간이 끝날 때까지 부지런히 일하시오. 그래야 우리는 비기는 거요.」 그리고 실제로 노동자는 자기가 「자유의사로」 맺은 계약의 조건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 계약에 따라 그는 여섯 시간의 노동밖에 들지 않은 노동 생산물을 위해 꼬박 열두 시간을 일하기로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성과급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동자가 열두 시간에 상품 열두 개를 만든다고 하자. 각각에는 원료와 마모로 1실링이 들고, 각각은 2.5실링에 팔린다. 앞의 가정대로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한 개마다 0.25실링을 주고, 열두 개에 모두 3실링이 된다. 이것을 벌려면 노동자는 열두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가는 열두 개로 30실링을 받는다. 원료와 마모로 24실링을 빼면 6실링이 남고, 그 가운데 3실링을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3실링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앞서와 꼭 같다! 여기서도 노동자는 여섯 시간은 자기를 위해, 곧 자기 임금을 메우기 위해(열두 시간 각각에서 반 시간씩), 여섯 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
노동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들이 좌초했던 암초는, 우리가 노동력의 가치를 출발점으로 삼자마자 사라진다. 노동력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모든 상품과 같은 하나의 상품이지만, 매우 특수한 상품이다. 곧 그것은 가치를 만드는 힘, 가치의 원천이며, 게다가 알맞게 다루면 그 자신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특수성을 갖는다. 오늘날의 생산 상태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하루에 그 자신이 지니고 또 그 자신에게 드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할 뿐 아니라,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새로운 기술적 발명이 있을 때마다 그 하루 생산이 그 하루 비용을 넘는 잉여도 늘어난다. 따라서 노동일 가운데 노동자가 자기 하루 임금의 등가물을 생산하는 부분은 줄고, 다른 한편 그가 자본가에게 노동을 거저 바쳐야 하는 부분은 늘어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전체의 경제적 구조다. 노동자계급만이 모든 가치를 생산한다. 가치란 노동의 다른 표현, 곧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상품에 체현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을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생산한 이 가치는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원료, 기계, 도구, 화폐의 소유자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은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 전체 가운데 한 부분만을 돌려받는다. 그리고 방금 보았듯이 자본가계급이 지니는, 기껏해야 지주계급과만 나누는 다른 부분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있을 때마다 늘어나는 반면, 노동자계급에게 돌아가는 (한 사람당) 몫은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늘거나 전혀 늘지 않고, 어떤 사정에서는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서로를 밀어내는 이 발견과 발명들, 날마다 전례 없는 규모로 늘어나는 이 인간 노동의 생산성은 마침내 하나의 충돌을 낳고, 그 충돌 속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한쪽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부와 구매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생산물의 과잉. 다른 쪽에는 프롤레타리아화되어 임금노동자로 바뀌고, 그래서 그 생산물의 과잉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게 된 사회의 대다수. 사회가 터무니없이 부유한 작은 계급과 아무 재산도 없는 큰 임금노동자 계급으로 갈라진 결과, 이 사회는 자기의 과잉 속에서 질식하는데 그 구성원의 대다수는 극도의 궁핍에서 거의, 또는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
이 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 불합리해지고 더 불필요해진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하며, 제거될 수 있다. 오늘의 계급 차이가 사라진 새 사회 질서가 가능하다. 거기서는, 아마도 짧은 이행기를 거친 뒤에(그 이행기는 다른 점에서는 얼마쯤 모자라더라도 어쨌든 도덕적으로는 매우 유익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도 이미 존재하는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을 계획적으로 이용하고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모두에게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지우는 가운데 생활의 수단, 생활의 향유, 모든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발전과 활동의 수단이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 새 사회 질서를 이루기로 갈수록 굳게 결심하고 있다는 것은, 밝아 오는 이 5월 1일과 5월 3일 일요일에 대서양 양쪽에서 증명될 것이다.[6]
런던, 1891년 4월 30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머리말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계급과 민족 사이의 현재의 투쟁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경제 관계를 서술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이 관계들이 정치적 충돌의 표면으로 스스로 밀고 올라올 때에만 그것을 건드렸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계급투쟁의 전개를 뒤쫓고,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실제의 역사 자료로 다음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1848년 2월과 3월의 나날에 이루어진 노동자계급의 굴복과 함께 그 계급의 적들, 곧 프랑스의 부르주아 공화파와 유럽 대륙 전체에서 봉건적 절대주의와 싸우던 부르주아 계급과 농민 계급도 동시에 정복되었다는 것. 프랑스에서 「온건 공화국」의 승리는 동시에 2월 혁명에 영웅적인 독립전쟁으로 응답했던 민족들의 몰락을 울렸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적 노동자에 대한 승리로 유럽은 옛날의 이중의 노예 상태, 곧 영국-러시아의 노예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것. 파리의 6월 전투, 빈의 함락, 1848년 11월 베를린의 희비극, 폴란드와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필사적인 노력, 굶주림으로 굴복당한 아일랜드, 이것들이 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 사이의 유럽 계급투쟁이 요약되는 주요 사건들이었고, 우리는 거기서 다음을 증명했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 그 목적이 계급투쟁에서 아무리 멀어 보이더라도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승리할 때까지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세계 전쟁에서 서로 맞붙기까지는 모든 사회 개혁이 유토피아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의 서술에서, 현실에서 그러하듯이, 벨기에와 스위스는 거대한 역사 화폭 속의 희비극적이고 풍자화 같은 풍속화였다. 하나는 부르주아 군주제의 모범 국가,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공화국의 모범 국가. 둘 다 유럽 혁명에서 그러하듯 계급투쟁에서도 자유롭다고 스스로 우쭐대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이제 독자들이 1848년의 계급투쟁이 거대한 정치적 규모로 전개되는 것을 보았으니, 자본가계급의 존재와 그 계급 지배, 그리고 노동자의 노예 상태가 그 위에 서 있는 경제 관계 자체를 더 자세히 살펴볼 때다.
우리는 이 주제를 세 개의 큰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할 것이다.[7]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 노동자의 노예 상태, 자본가의 지배.
현재의 체제 아래서 중간계급[소부르주아]과 이른바 농민 신분의 불가피한 몰락.
세계시장의 전제군주 영국에 의한 여러 유럽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의 상업적 예속과 착취.
우리는 이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고 통속적으로 서술하려 하며, 정치경제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조차 전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해되기를 바란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가장 단순한 경제 관계에 대해서조차, 현존 상태의 특허받은 옹호자들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적 행위자들과 인정받지 못한 정치적 천재들에 이르기까지 놀랄 만한 무지와 개념의 혼란이 지배하고 있으며, 분열된 독일은 그런 천재라면 소공국의 영주들보다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문제의 고찰로 나아간다.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노동자 몇 사람에게 「임금을 얼마나 받습니까?」 하고 물으면, 한 사람은 「하루 2실링을 받습니다」라고 답하고,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답할 것이다. 그들이 일하는 산업 부문에 따라 그들은 일정한 일, 이를테면 아마포 1야드를 짜거나 활자 한 쪽을 조판하는 일을 마치는 대가로 각자의 고용주에게서 받는 서로 다른 액수의 돈을 댈 것이다. 답은 여러 가지여도 그들은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 일치할 것이다. 임금이란 자본가가 일정한 노동시간 또는 일정한 노동량에 대해 지불하는 돈의 액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돈으로 그들의 노동을 사고, 그들은 돈을 받고 자본가에게 자기 노동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돈을 받고 자본가에게 실제로 파는 것은 그들의 노동력이다. 이 노동력을 자본가는 하루, 한 주, 한 달 등의 기간으로 산다. 그리고 그것을 산 뒤에 그는 약정된 시간 동안 노동자를 일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소비한다. 자본가가 그들의 노동력을 산 같은 액수의 돈(이를테면 2실링)으로 그는 일정한 양의 설탕이나 다른 어떤 상품을 살 수도 있었다. 그가 설탕 20파운드를 산 2실링은 설탕 20파운드의 가격이다. 그가 열두 시간 동안의 노동력 사용을 산 2실링은 열두 시간 노동의 가격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은 설탕과 꼭 같은 정도로 상품이다. 하나는 시계로 재고 다른 하나는 저울로 잴 뿐이다.
노동자들은 자기의 상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며, 게다가 이 교환은 일정한 비율로 이루어진다. 얼마만큼의 돈에 얼마만큼의 노동력 사용. 열두 시간의 베짜기에 2실링. 그런데 이 2실링은 내가 2실링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상품을 대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실 노동자는 자기 상품인 노동력을 온갖 종류의 상품과, 그것도 일정한 비율로 교환한 것이다. 자본가는 그에게 2실링을 줌으로써 그의 하루 노동과 맞바꾸어 얼마만큼의 고기, 얼마만큼의 옷, 얼마만큼의 땔감과 불빛 따위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2실링은 노동력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 곧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표현한다.
화폐로 어림한 상품의 교환가치를 그 가격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임금은 노동력의 가격에 붙은 특별한 이름일 뿐이며, 보통 노동의 가격이라 불린다. 인간의 피와 살 말고는 담길 곳이 없는 이 특수한 상품의 가격에 붙은 특별한 이름이다.
아무 노동자나, 이를테면 직공을 보자. 자본가는 그에게 베틀과 실을 준다. 직공이 일에 들어가고 실은 천이 된다. 자본가는 천을 차지해 이를테면 20실링에 판다. 그런데 직공의 임금은 천의, 20실링의, 노동 생산물의 몫인가? 결코 아니다. 천이 팔리기 훨씬 전에, 어쩌면 다 짜이기도 훨씬 전에 직공은 자기 임금을 받았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천에서 얻을 돈이 아니라 이미 손에 있는 돈으로 임금을 지불한다. 고용주가 직공에게 대 주는 베틀과 실이 직공의 생산물이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가 자기 상품인 노동력과 맞바꾸어 받는 상품들도 그의 생산물이 아니다. 고용주가 천의 구매자를 전혀 못 찾을 수도 있다. 팔아서 임금만큼도 못 건질 수도 있다. 직공의 임금에 견주어 아주 큰 이익을 남기고 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직공과 상관없다. 자본가는 자기의 기존 재산, 자기 자본의 한 부분으로 직공의 노동력을 사는데, 이것은 그가 재산의 다른 부분으로 원료인 실과 노동수단인 베틀을 산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이다. 이 구매들을, 그 가운데 천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도 들어 있는데, 마친 뒤에 그는 오직 자기에게 속한 원료와 노동수단만으로 생산한다. 우리의 착한 직공도 노동수단의 하나이며, 이 점에서 베틀과 같은 자리에 있으므로, 그는 베틀이 그런 것 이상으로는 생산물(천)에도 생산물의 가격에도 아무 몫이 없다.
그러므로 임금은 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상품에서 갖는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일정한 양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쓰는, 이미 존재하는 상품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임금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상품이다. 그는 왜 그것을 파는가?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노동력을 발휘하는 것, 곧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생명 활동이며 그 자신의 삶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생명 활동을 그는 필요한 생활수단을 얻기 위해 남에게 판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 활동은 그에게 자기 생존을 확보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는 살기 위해 일한다. 그는 노동 자체를 자기 삶의 일부로 세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삶의 희생이다. 그것은 그가 남에게 넘겨 버린 상품이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의 생산물도 그의 활동의 목적이 아니다. 그가 자기를 위해 생산하는 것은 그가 짜는 비단도, 그가 갱도에서 캐어 올리는 금도, 그가 짓는 궁전도 아니다. 그가 자기를 위해 생산하는 것은 임금이며, 비단과 금과 궁전은 그에게는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으로, 아마도 무명 저고리와 구리 동전과 지하실 방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열두 시간 동안 베를 짜고, 실을 잣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집을 짓고, 삽질을 하고, 돌을 깨고, 흙손을 나르는 따위의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이 열두 시간의 베짜기, 실잣기, 구멍 뚫기, 선반 돌리기, 집짓기, 삽질, 돌 깨기가 삶의 표현으로, 삶으로 여겨지는가? 정반대다. 그에게 삶은 이 활동이 끝나는 곳, 식탁에서, 선술집에서, 침대에서 시작된다. 반면 열두 시간의 노동은 그에게 베짜기나 실잣기나 구멍 뚫기로서는 아무 뜻이 없고, 오직 식탁에 앉고 선술집에 자리 잡고 침대에 눕게 해 주는 벌이로서만 뜻이 있다. 누에가 실을 잣는 목적이 애벌레로서 자기 생존을 이어 가는 것이라면, 누에는 임금노동자의 완벽한 본보기일 것이다.
노동력이 언제나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이 언제나 임금노동, 곧 자유로운 노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는 소가 농부에게 자기 노동을 팔지 않듯이 노예 소유주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지 않았다. 노예는 자기 노동력과 함께 통째로 단번에 자기 소유주에게 팔렸다. 그는 한 소유자의 손에서 다른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품이다. 그 자신이 상품이지만, 그의 노동력은 그의 상품이 아니다. 농노는 자기 노동력의 한 부분만을 판다. 토지 소유자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은 그가 아니다. 오히려 토지 소유자가 그에게서 공납을 받는다. 농노는 땅에 딸려 있고, 땅의 주인에게 땅의 열매를 바친다. 반면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팔되 조각으로 나누어 판다. 그는 자기 삶의 여덟 시간, 열 시간, 열두 시간, 열다섯 시간을 날마다 똑같이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자에게, 원료와 도구와 생활수단의 소유자에게, 곧 자본가에게 경매로 넘긴다. 노동자는 소유주에게도 땅에도 딸려 있지 않지만, 그의 하루 삶의 여덟 시간, 열 시간, 열두 시간, 열다섯 시간은 그것을 사는 누구에게나 속한다. 노동자는 자기를 판 자본가를 원할 때마다 떠나고, 자본가는 그에게서 더 이상 쓸모를, 또는 필요한 만큼의 쓸모를 얻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그를 내보낸다. 그러나 노동력의 판매가 유일한 소득원인 노동자는 자기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한 구매자 계급 전체, 곧 자본가계급을 떠날 수 없다. 그는 이 자본가나 저 자본가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에 속한다. 그리고 그 자본가계급 안에서 자기 사람을, 곧 구매자를 찾는 것은 그의 일이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에 더 자세히 들어가기 전에, 임금의 결정에서 고려되는 가장 일반적인 사정들을 짧게 서술하겠다.
보았듯이 임금은 노동력이라는 일정한 상품의 가격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정하는 것과 같은 법칙으로 정해진다. 그러면 물음은 이것이다.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상품의 가격은 무엇이 정하는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경쟁에 의해, 공급에 대한 수요의 관계, 부름에 대한 내놓음의 관계에 의해서다. 상품의 가격을 정하는 경쟁은 세 겹이다.
같은 상품을 여러 판매자가 내놓는다. 같은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파는 자가 다른 판매자들을 몰아내고 가장 큰 시장을 차지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판매자들은 판매를, 시장을 놓고 자기들끼리 싸운다. 그들 하나하나는 팔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팔기를,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판매자를 밀어내고 혼자 팔기를 바란다. 하나하나가 다른 이보다 더 싸게 판다. 이렇게 판매자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고, 그것은 그들이 내놓은 상품의 가격을 끌어내린다.
그러나 구매자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다. 이것은 그 쪽에서 내놓인 상품의 가격을 끌어올린다.
마지막으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경쟁이 있다. 이쪽은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사려 하고, 저쪽은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려 한다.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이 경쟁의 결과는 위에서 말한 두 경쟁 진영 사이의 관계에, 곧 구매자 군대 안의 경쟁이 더 센가 판매자 군대 안의 경쟁이 더 센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산업은 두 개의 큰 군대를 싸움터로 이끌어 서로 맞세우는데, 그 각각은 다시 자기 대열 안에서 자기 부대끼리 싸움을 벌인다. 자기 부대 사이의 싸움이 덜한 군대가 맞선 군대에 승리를 거둔다.
시장에 면화 100포가 있고 동시에 면화 1000포를 사려는 구매자들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수요는 공급의 열 배다. 그러면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매우 셀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는 한 포를, 할 수만 있다면 100포 전부를 손에 넣으려 한다. 이 예는 자의적인 가정이 아니다. 상업의 역사에서 우리는 면화가 모자라던 시기를 겪었는데, 그때 몇몇 자본가는 서로 손을 잡고 100포가 아니라 세계의 면화 공급 전체를 사들이려 했다. 그러니 이 경우 한 구매자는 면화 포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값을 불러 다른 구매자들을 몰아내려 한다. 적의 부대가 자기들끼리 가장 격렬하게 다투는 것을 보고 자기들의 100포 전부가 팔릴 것을 확신하는 면화 판매자들은, 상대들이 값을 높이 올리려고 서로 앞다투는 바로 그 순간에 면화 값을 끌어내리려고 자기들끼리 머리채를 잡는 일은 삼갈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판매자 군대에는 평화가 깃든다. 그들은 한 사람처럼 구매자들과 마주 서서 철학자처럼 만족하여 팔짱을 끼며, 가장 성화를 부리는 구매자의 제안에조차 아주 분명한 한계가 없다면 그들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품의 공급이 그 수요보다 적으면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은 매우 약하거나 아예 없다. 이 경쟁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비율로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늘어난다. 결과는 상품 가격의 크든 작든 상당한 상승이다.
반대의 경우가 반대의 결과와 함께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수요를 크게 넘어서는 공급, 판매자들 사이의 필사적인 경쟁과 구매자의 부족, 터무니없이 낮은 값의 투매.
그러나 가격의 상승이란 무엇이고 하락이란 무엇인가? 높은 가격이란 무엇이고 낮은 가격이란 무엇인가? 모래알도 현미경으로 보면 높고, 탑도 산에 견주면 낮다. 그리고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 정해진다면, 수요와 공급의 관계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처음 만나는 점잖은 시민에게 물어보자. 그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이 형이상학적 매듭을 구구단으로 끊어 버릴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파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100파운드가 들었고 그 물건을 팔아서, 물론 한 해 안에 말이오, 110파운드를 번다면 그것은 정직하고 건전하고 온당한 이윤이오. 그런데 교환에서 120파운드나 130파운드를 받는다면 그것은 더 높은 이윤이고, 200파운드나 받는다면 그것은 비상하고 엄청난 이윤이오.」 그러면 이 시민에게 이윤의 척도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상품의 생산비다. 이 물건과 맞바꾸어 그가 생산비가 더 적게 든 양의 다른 물건을 받는다면 그는 손해를 본 것이다. 자기 물건과 맞바꾸어 생산비가 더 많이 든 양의 다른 물건을 받는다면 그는 이득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물건의 교환가치가 자기의 영점, 곧 생산비의 위에 있는가 아래에 있는가의 정도에 따라 이윤의 하락과 상승을 셈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변하는 관계가 어떻게 때로는 가격의 상승을, 때로는 하락을, 때로는 높은 가격을, 때로는 낮은 가격을 낳는지 보았다. 어떤 상품의 가격이 공급의 부족이나 수요의 불균형한 증가로 크게 오르면, 다른 어떤 상품의 가격은 그에 비례해 떨어졌을 수밖에 없다. 물론 상품의 가격은 그것과 맞바꾸어 다른 상품이 주어지는 비율을 화폐로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비단 1야드의 가격이 2실링에서 3실링으로 오르면 은의 가격은 비단에 대해 떨어진 것이고, 마찬가지로 가격이 그대로인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도 비단의 가격에 대해 떨어진 것이다. 같은 양의 비단을 얻으려면 그것들을 더 많이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특정 상품의 가격 상승은 무슨 결과를 낳는가? 자본의 덩어리가 번창하는 산업 부문으로 던져질 것이고, 총애받는 산업의 영역으로 향하는 이 자본의 이주는 그 부문이 통상의 이윤 이상을 낳지 않게 될 때까지, 아니 그보다는 과잉생산으로 그 생산물의 가격이 생산비 아래로 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거꾸로, 어떤 상품의 가격이 생산비 아래로 떨어지면 자본은 이 상품의 생산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낡아서 사라질 운명인 산업 부문의 경우를 빼면, 그런 상품의 생산(곧 공급)은 자본의 이 도피 때문에 수요와 맞아떨어질 때까지, 그리고 상품의 가격이 다시 생산비 수준으로 오를 때까지, 아니 그보다는 공급이 수요 아래로 떨어지고 가격이 생산비 위로 오를 때까지 계속 줄어들 것이다. 상품의 그때그때의 가격은 언제나 생산비의 위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끊임없이 한 산업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다른 산업의 영역으로 옮겨 가는지 본다. 높은 가격은 지나친 유입을 낳고, 낮은 가격은 지나친 유출을 낳는다.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공급만이 아니라 수요도 생산비로 정해진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주제에서 너무 멀리 데려갈 것이다.
우리는 방금 수요와 공급의 변동이 언제나 상품의 가격을 그 생산비로 되돌린다는 것을 보았다. 상품의 실제 가격은 물론 언제나 생산비의 위나 아래에 있다. 그러나 상승과 하락은 서로를 상쇄하므로, 일정한 기간 안에서 산업의 밀물과 썰물을 합쳐 셈하면 상품들은 그 생산비에 따라 서로 교환된다. 그러므로 그 가격은 생산비로 정해진다.
생산비에 의한 가격의 규정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평균가격이 생산비와 같다는 것이 법칙이라고 말한다. 상승이 하락으로 상쇄되고 하락이 상승으로 상쇄되는 무정부적 운동을 그들은 우연으로 여긴다. 우리는 실제로 몇몇 다른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변동을 법칙으로 여기고 생산비에 의한 가격의 규정을 우연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가장 무시무시한 황폐를 몰고 오며 지진처럼 부르주아 사회를 그 토대까지 뒤흔드는 것이 바로 이 변동이고, 가격을 생산비에 맞추도록 강제하는 것이 바로 이 변동이다. 이 무질서한 운동의 전체 속에 그 질서가 있다. 이 산업의 무정부 상태의 전체 경로 속에서, 이 순환 운동 속에서, 경쟁은 말하자면 한쪽의 방종을 다른 쪽의 방종으로 상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가격이 실제로 그 생산비로 정해지되, 그 상품의 가격이 생산비 위로 오르는 시기가 생산비 아래로 떨어지는 시기로 상쇄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본다. 물론 이것은 어떤 산업의 개별 생산물 하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산업 부문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개별 제조업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제조업자 계급 전체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생산비에 의한 가격의 규정은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한 가격의 규정과 같은 것이다. 생산비는 첫째로 원료와 도구의 마모 등, 곧 그 생산에 일정한 수의 노동일이 든 산업 생산물, 따라서 일정한 양의 노동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둘째로 역시 그 지속시간으로 재는 직접 노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은 무엇이 정하는가?
이제 상품 일반의 가격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일반 법칙이 당연히 임금, 곧 노동력의 가격도 규제한다. 임금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 사이에 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때로는 오르고 때로는 내릴 것이다. 임금의 변동은 상품 일반의 가격 변동에 대응한다. 그러나 이 변동의 한계 안에서 노동력의 가격은 생산비로, 곧 노동력이라는 이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정해질 것이다.
그러면 노동력의 생산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유지하고 그를 노동자로 교육하고 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종류의 일에 필요한 훈련 시간이 짧을수록 노동자의 생산비는 작고, 그의 노동력의 가격, 곧 그의 임금은 낮다. 수습 기간이 거의 필요 없고 노동자의 단순한 육체적 존재만으로 충분한 산업 부문에서는 그의 생산비가 거의 오로지 그를 일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상품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격으로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고려가 들어온다. 자기 생산비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생산물의 가격을 계산하는 제조업자는 노동수단의 마모를 셈에 넣는다. 어떤 기계가 이를테면 1000실링이 들었고 10년이면 다 닳는다면, 그는 10년 뒤에 닳은 기계를 새것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마다 100실링을 상품의 가격에 더한다. 같은 방식으로 단순 노동력의 생산비에는 노동자의 종족이 번식하고 닳은 노동자를 새 노동자로 바꿀 수 있게 하는 번식의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마모는 기계의 마모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된다.
그러므로 단순 노동력의 생산비는 노동자의 생존과 번식의 비용이다. 이 생존과 번식의 비용의 가격이 임금을 이룬다. 이렇게 정해진 임금을 최저임금이라 부른다. 이 최저임금은 생산비에 의한 상품 일반의 가격 규정과 마찬가지로 개별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종족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개별 노동자들, 실로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생존하고 번식할 만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전체의 임금은 그 변동의 한계 안에서 이 최저치에 맞추어진다.
이제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지배하는 가장 일반적인 법칙에 대해 이해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주제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자본의 본질과 성장
자본은 새 원료, 새 노동수단, 새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쓰이는 온갖 종류의 원료, 노동수단, 생활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의 이 모든 구성 부분은 노동이 만든 것, 노동의 생산물, 축적된 노동이다. 새 생산의 수단으로 쓰이는 축적된 노동이 자본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흑인 노예란 무엇인가? 검은 인종의 사람이다. 앞의 설명은 뒤의 설명만큼의 값어치가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화를 잣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 관계에서 떼어 내면 그것은 금이 그 자체로 화폐가 아니고 설탕이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이 아니다.
생산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그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함께 일하고 서로의 활동을 교환함으로써만 생산한다. 생산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일정한 연관과 관계에 들어가며, 오직 이 사회적 연관과 관계 안에서만 자연에 대한 그들의 작용이, 곧 생산이 일어난다.
생산자들 사이의 이 사회적 관계, 그들이 자기 활동을 교환하고 생산 행위 전체에 참여하는 조건은 당연히 생산수단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전쟁 도구인 화기가 발견되자 군대의 내부 조직 전체가 필연적으로 바뀌었고, 개인들이 군대를 이루고 군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관계가 변했으며, 여러 군대 서로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들이 그 안에서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 곧 사회적 생산관계가 물질적 생산수단, 생산력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바뀌고 변형된다는 것을 본다. 생산관계 전체가 이른바 사회적 관계, 사회를 이루며, 게다가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 독특하고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사회를 이룬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또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생산관계의 총체이며, 각각 인류 역사의 특정한 발전 단계를 나타낸다.
자본도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관계다. 자본을 이루는 생활수단, 노동수단, 원료는 주어진 사회적 조건 아래서, 일정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생산되고 축적된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 아래서, 일정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새 생산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일정한 사회적 성격이 새 생산에 쓰이는 생산물에 자본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닌가?
자본은 생활수단, 노동수단, 원료로만, 물질적 생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꼭 같은 정도로 교환가치로 이루어진다. 자본을 이루는 모든 생산물은 상품이다. 따라서 자본은 물질적 생산물의 합일 뿐 아니라 상품의 합, 교환가치의 합, 사회적 크기의 합이다. 양모 대신 면화를, 밀 대신 쌀을, 철도 대신 증기선을 놓더라도, 면화와 쌀과 증기선, 곧 자본의 몸체가 이전에 자본이 담겨 있던 양모와 밀과 철도와 같은 교환가치, 같은 가격을 갖기만 하면 자본은 그대로다. 자본의 몸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할 수 있지만 자본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자본이 상품의 합, 곧 교환가치의 합이라 해서 모든 상품의 합, 교환가치의 합이 자본인 것은 아니다.
모든 교환가치의 합은 하나의 교환가치다. 개개의 교환가치는 교환가치들의 합이다. 이를테면 1000파운드 값의 집은 1000파운드의 교환가치이고, 1페니 값의 종이 한 장은 100분의 1페니 100개의 교환가치의 합이다.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이 상품이다. 그것들이 교환될 수 있는 일정한 비율이 그 교환가치, 곧 화폐로 표현하면 그 가격을 이룬다. 이 생산물의 양은 그것이 상품이라는 것, 교환가치를 나타낸다는 것, 일정한 가격을 갖는다는 것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나무는 크든 작든 나무다. 쇠를 다른 생산물과 교환할 때 페니웨이트 단위로 하든 헌드레드웨이트 단위로 하든, 그것이 상품이라는, 교환가치라는 그 성격이 달라지는가? 양에 따라 그것은 더 큰 가치의 상품이거나 더 작은 가치의 상품, 더 높은 가격의 상품이거나 더 낮은 가격의 상품일 뿐이다.
그러면 상품의 합, 교환가치의 합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독립된 사회적 힘으로서, 곧 사회의 한 부분의 힘으로서, 직접적인 살아 있는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 자기를 보존하고 불림으로써다.
일할 능력 말고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계급의 존재가 자본의 필연적 전제다.
과거의, 축적된, 대상화된 노동이 직접적인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한다는 것만이 축적된 노동에 자본의 성격을 찍는다.
자본은 축적된 노동이 살아 있는 노동에 새 생산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노동이 축적된 노동에 그 교환가치를 보존하고 불리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데 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교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과 맞바꾸어 생활수단을 받는다. 자본가는 자기 생활수단과 맞바꾸어 노동을, 노동자의 생산적 활동을, 노동자가 자기가 소비하는 것을 메울 뿐 아니라 축적된 노동에 그것이 이전에 지녔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주는 창조적 힘을 받는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서 기존 생활수단의 한 부분을 받는다. 이 생활수단은 그에게 무엇에 쓰이는가? 직접적 소비에. 그러나 내가 생활수단을 소비하자마자 그것은 내게서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진다. 이 수단이 내 생명을 유지해 주는 시간을 새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소비로 잃은 가치를 대신할 새 가치를 내 노동으로 만들어 내는 데 쓰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런데 노동자가 받은 생활수단과 맞바꾸어 자본가에게 넘기는 것이 바로 이 고귀한 재생산의 힘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그것을 잃은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노동자가 1실링을 받고 하루 종일 농장주의 밭에서 일해, 농장주에게 2실링의 수익을 확보해 준다. 농장주는 자기가 날품팔이에게 준 가치를 되돌려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두 배로 불린다. 그러므로 그는 날품팔이에게 준 1실링을 결실 있게, 생산적으로 소비한 것이다. 1실링으로 그는 날품팔이의 노동력을 샀고, 그것은 두 배 가치의 땅의 산물을 만들어 1실링을 2실링으로 만든다. 반면 날품팔이는 그 결과를 농장주에게 막 넘겨준 자기의 생산력 대신 1실링을 받고, 그것을 생활수단과 바꾸어 얼마 안 가 소비한다. 그러므로 1실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자본가에게는 재생산적으로, 2실링을 낳은 노동력과 교환되었기 때문에. 노동자에게는 비생산적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생활수단과 교환되었고 그 가치는 농장주와 같은 교환을 되풀이해야만 다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본은 임금노동을 전제하고, 임금노동은 자본을 전제한다. 둘은 서로를 조건 짓는다.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면공장의 노동자는 면제품만을 생산하는가? 아니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그는 다시 자기 노동을 지배하고 그것으로 새 가치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가치를 생산한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됨으로써만, 임금노동을 불러냄으로써만 자기를 불릴 수 있다. 임금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불림으로써만, 자기가 그 노예인 바로 그 힘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증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곧 노동자계급의 증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와 그 경제학자들은 자본가의 이해와 노동자의 이해가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자본이 노동자를 계속 일 시키지 않으면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이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으면 자본은 죽고, 착취하려면 자본은 노동력을 사야 한다. 생산을 위해 정해진 자본, 곧 생산자본이 빨리 늘어날수록 산업은 번창하고 부르주아지는 부유해지고 장사는 잘되며, 자본가는 그만큼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노동자는 그만큼 더 비싸게 자기를 판다. 그러므로 생산자본의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성장은 노동자가 견딜 만한 삶을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그러나 생산자본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축적된 노동의 힘의 성장, 노동자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성장이다. 임금노동이 자기를 지배하는 남의 부, 자기에게 적대적인 힘인 자본을 생산할 때, 그 임금노동에게는 자기의 고용 수단, 곧 생활수단이 되돌아오는데, 그것이 다시 자본의 한 부분이 되고 자본을 가속된 팽창 운동으로 밀어 넣는 지렛대가 다시 된다는 조건에서다.
자본의 이해와 노동자의 이해가 같다는 말은 이것만을 뜻한다. 자본과 임금노동은 하나의 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가 서로를 조건 짓듯이 한쪽이 다른 쪽을 조건 짓는다는 것.
임금노동자가 임금노동자로 남아 있는 한 그의 운명은 자본에 달려 있다. 그토록 자랑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의 공통성이란 이런 것이다.
자본이 자라면 임금노동의 덩어리가 자라고, 임금노동자의 수가 늘어난다. 한마디로 자본의 지배가 더 많은 개인들 위로 뻗친다.
가장 유리한 경우를 가정하자. 생산자본이 자라면 노동에 대한 수요가 자란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격, 임금이 오른다.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이웃집들이 마찬가지로 작은 한, 그 집은 주거에 대한 모든 사회적 요구를 채운다. 그러나 작은 집 옆에 궁전이 솟으면 작은 집은 오두막으로 쪼그라든다. 이제 작은 집은 그 거주자가 지킬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거나 아주 하찮은 것뿐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문명이 진행되면서 그 집이 아무리 높이 솟더라도 이웃의 궁전이 같은 정도로, 아니 더 크게 솟는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집의 거주자는 자기 네 벽 안에서 언제나 더 불편하고 더 불만스럽고 더 갑갑하다고 느낄 것이다.
임금의 눈에 띄는 상승은 생산자본의 빠른 성장을 전제한다. 생산자본의 빠른 성장은 부와 사치와 사회적 욕구와 사회적 향유의 똑같이 빠른 성장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향유가 늘어났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에게는 닿지 않는 자본가의 늘어난 향유에 견주어, 사회 일반의 발전 단계에 견주어 떨어졌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사회와의 관계에서 재지, 그것을 채워 주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재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본성을 지니므로 상대적 본성을 지닌다.
그러나 임금은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의 합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요인들이 문제에 들어온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직접 받는 것은 일정한 액수의 화폐다. 임금은 이 화폐가격만으로 정해지는가?
16세기에 유럽의 금은 유통량은 아메리카에서 더 풍부하고 캐기 쉬운 광산이 발견된 결과 늘어났다.[8] 따라서 금과 은의 가치는 다른 상품에 대해 떨어졌다.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전과 같은 양의 은화를 받았다. 그들 노동의 화폐가격은 그대로였지만 임금은 떨어졌다. 같은 양의 은과 맞바꾸어 더 적은 양의 다른 상품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에 자본의 성장과 부르주아지의 흥기를 촉진한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경우를 보자. 1847년 겨울, 흉작의 결과로 가장 필수적인 생활수단인 곡물, 고기, 버터, 치즈 등의 값이 크게 올랐다.[9] 노동자들이 여전히 전과 같은 액수의 돈을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받았다고 하자. 그들의 임금은 떨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떨어졌다. 같은 돈으로 그들은 더 적은 빵과 고기 따위를 받았다. 그들의 임금이 떨어진 것은 은의 가치가 낮아져서가 아니라 생활수단의 가치가 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노동력의 화폐가격은 그대로인데 새 기계의 사용이나 좋은 계절 따위로 모든 농산물과 공산품의 값이 떨어졌다고 하자. 같은 돈으로 노동자들은 이제 온갖 종류의 상품을 더 많이 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임금은 올랐다. 바로 그 화폐 가치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노동력의 화폐가격, 곧 명목임금은 실제의 임금, 실질임금, 곧 임금과 맞바꾸어 실제로 주어지는 상품의 양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임금의 상승이나 하락을 말할 때 우리는 노동력의 화폐가격인 명목임금만이 아니라 실질임금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명목임금, 곧 노동자가 자기를 자본가에게 파는 돈의 액수도, 실질임금, 곧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양도, 임금이라는 말에 담긴 관계를 다 말해 주지는 않는다.
임금은 무엇보다 자본가의 이득, 곧 이윤과의 관계로 정해진다. 다시 말해 임금은 비례적인, 상대적인 크기다.
실질임금은 상품의 가격에 대한 노동력의 가격을 표현한다. 반면 상대적 임금은 직접 노동이 새로 만든 가치 가운데 직접 노동이 차지하는 몫을, 축적된 노동, 곧 자본에 돌아가는 몫에 대한 관계에서 표현한다.
임금과 이윤의 상승과 하락을 정하는 일반 법칙
우리는 말했다. 「임금은 노동자가 자기가 생산한 상품에서 갖는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일정한 양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쓰는, 이미 존재하는 상품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 임금을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을 판 값에서 메워야 한다. 그것도 대체로 자기가 지출한 생산비를 넘는 잉여가 남도록, 곧 이윤을 얻도록 메워야 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의 판매 가격은 자본가의 관점에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그가 선대한 원료의 가격을 메우는 부분과, 역시 그가 선대한 도구와 기계와 그 밖의 노동수단의 마모를 메우는 부분.
둘째, 그가 선대한 임금을 메우는 부분.
셋째, 그 위에 남는 잉여, 곧 자본가의 이윤.
첫째 부분은 이전에 존재하던 가치를 메울 뿐이지만, 임금을 메우는 부분과 잉여(자본의 이윤)는 전체로서 노동자의 노동이 생산해 원료에 더한 새 가치에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우리는 임금과 이윤을 서로 견주기 위해 둘 다를 노동자의 생산물에서의 몫으로 볼 수 있다.
실질임금은 그대로일 수도, 오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상대적 임금은 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생활수단의 값이 3분의 2 떨어졌는데 하루 임금은 3분의 1만, 이를테면 3실링에서 2실링으로 떨어졌다고 하자. 노동자는 이제 이 2실링으로 전에 3실링으로 얻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얻을 수 있지만, 그의 임금은 자본가의 이득에 비례해서는 줄어들었다. 자본가(이를테면 제조업자)의 이윤은 1실링 늘었다. 이것은 그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더 적은 양의 교환가치에 대해 노동자가 전보다 더 많은 양의 교환가치를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의 몫에 대한 자본의 몫이 커졌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부의 분배가 더욱 불평등해졌다. 자본가는 같은 자본으로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지배한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힘이 자랐고,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나빠졌으며, 자본가의 지위 아래로 또 한 단계 밀려 내려갔다.
그러면 임금과 이윤의 상승과 하락을 그 상호 관계에서 정하는 일반 법칙은 무엇인가?
둘은 서로 반비례한다. 자본의 몫(이윤)은 노동의 몫(임금)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비율로 늘어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윤은 임금이 떨어지는 정도만큼 오르고, 임금이 오르는 정도만큼 떨어진다.
어쩌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다른 자본가들과 자기 생산물을 유리하게 교환함으로써, 새 시장의 개척이나 옛 시장에서의 일시적인 수요 증가 따위로 자기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으므로, 자본가의 이윤은 임금의 등락, 곧 노동력의 교환가치와 무관하게 다른 자본가들을 이용함으로써 불어날 수 있다고. 또는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수단의 개선이나 자연력의 새로운 이용 따위로도 오를 수 있다고.
그러나 첫째로, 반대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결과는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임금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윤이 오른 것이 아니라 이윤이 올랐기 때문에 임금이 떨어진 것이다. 자본가는 같은 양의 남의 노동으로 더 많은 양의 교환가치를 샀는데, 그렇다고 그 노동에 더 많이 지불하지는 않았다. 곧 노동은 그것이 자본가에게 주는 순이득에 비례해서는 더 적게 지불된 것이다.
둘째로, 상품 가격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품의 평균가격, 곧 그것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은 그 생산비로 정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본가 대열 안에서 서로를 속이고 이용하는 행위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상쇄된다. 기계의 개선과 생산에 봉사하는 자연력의 새로운 이용은 같은 양의 노동과 자본으로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하지만, 더 많은 양의 교환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하지는 결코 않는다. 내가 방적기를 써서 그 발명 전보다 한 시간에 두 배의 실, 이를테면 50파운드 대신 100파운드를 댈 수 있다면, 길게 보아 나는 이 100파운드와 맞바꾸어 전에 50파운드로 받던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받지 못한다. 생산비가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곧 같은 비용으로 두 배의 생산물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것이든 세계시장 전체의 것이든 자본가계급이 생산의 순수익을 자기들끼리 어떤 비율로 나누든, 이 순수익의 총액은 언제나 오로지 축적된 노동이 직접 노동의 수익으로 늘어난 액수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총액은 노동이 자본을 불리는 것과 같은 비율로, 곧 임금에 견주어 이윤이 오르는 것과 같은 비율로 자란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이해는 정반대다. 생산자본의 성장이 임금에 미치는 영향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 안에 머물더라도 자본의 이해와 임금노동의 이해가 서로 정반대라는 것을 본다.
자본의 빠른 성장은 이윤의 빠른 성장과 같은 말이다. 이윤은 노동의 가격, 곧 상대적 임금이 그만큼 빨리 떨어질 때에만 빨리 자랄 수 있다. 상대적 임금은 실질임금이 명목임금, 곧 노동의 화폐 가치와 함께 오르더라도 떨어질 수 있다. 실질임금이 이윤과 같은 비율로 오르지만 않으면 그렇다. 이를테면 경기가 좋은 해에 임금이 5퍼센트 오르는 동안 이윤이 30퍼센트 오르면, 비례적인 임금, 상대적 임금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줄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빠른 성장과 함께 노동자의 소득이 늘어나더라도, 동시에 노동자를 자본가와 갈라놓는 사회적 심연은 넓어지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은 커지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은 깊어진다.
「노동자는 자본의 빠른 성장에 이해관계가 있다」는 말은 이것만을 뜻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부를 빨리 불릴수록 그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커지고, 불러낼 수 있는 노동자의 수가 많아지며, 자본에 매인 노예의 무리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곧 자본의 가장 빠른 성장조차 노동자의 물질적 삶을 아무리 개선하더라도 그의 이해와 자본가의 이해 사이의 적대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윤과 임금은 여전히 반비례한다.
자본이 빨리 자라면 임금은 오를 수 있지만 자본의 이윤은 그보다 훨씬 빨리 오른다. 노동자의 물질적 처지는 나아졌지만 그의 사회적 지위를 대가로 치른 것이다. 그를 자본가와 갈라놓는 사회적 심연은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생산자본의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성장이다」라는 말은 이런 말과 같다. 노동자계급이 자기에게 적대적인 힘, 곧 자기를 지배하는 남의 부를 빨리 불리고 키울수록, 그 계급은 부르주아의 부를 불리고 자본의 힘을 키우는 일에 다시 매달리도록 허락받는 조건이 더 좋아지며, 그렇게 부르주아지가 자기를 끌고 다니는 황금 사슬을 스스로 벼리는 데 만족하게 된다는 것.
생산자본의 성장과 임금의 상승은 정말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떼어 놓을 수 없게 묶여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자본이 살찔수록 그 노예도 더 응석받이가 된다고 그들이 주장할 때조차 감히 믿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지는 너무 계몽되어 있고 장부를 너무 꼼꼼히 적기 때문에, 수행원들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봉건 영주의 편견을 함께 갖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존재 조건은 그들이 장부에 꼼꼼히 신경 쓰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물음을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생산자본의 성장은 어떤 방식으로 임금에 영향을 주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자본이 전체로서 자라면 노동의 더 다면적인 축적이 일어난다. 개별 자본들의 수와 크기가 늘어난다. 개별 자본들의 증가는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을 늘린다. 늘어나는 자본들의 늘어나는 크기는 산업의 싸움터에 더 거대한 전쟁 도구를 갖춘 더 강력한 노동자 군대를 이끌고 나올 수단을 마련해 준다.
한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를 싸움터에서 몰아내고 그 자본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더 싸게 팖으로써만이다. 자기를 망치지 않고 더 싸게 팔려면 그는 더 싸게 생산해야, 곧 노동의 생산력을 될 수 있는 대로 높여야 한다.
그러나 노동의 생산력은 무엇보다 더 큰 분업과 기계의 더 일반적인 도입과 끊임없는 개선으로 높아진다. 노동이 나뉘는 노동자 군대가 클수록, 기계가 도입되는 규모가 거대할수록, 생산비는 그에 비례해 줄어들고 노동은 더 결실을 맺는다. 그래서 자본가들 사이에는 분업과 기계를 늘리고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큰 규모로 이용하려는 전면적 경쟁이 일어난다.
이제 어떤 자본가가 더 큰 분업으로, 새 기계의 사용과 개선으로, 더 큰 규모의 더 유리한 자연력 이용으로 같은 양의 노동(직접 노동이든 축적된 노동이든)으로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 상품을 생산할 수단을 찾았다면, 이를테면 경쟁자들이 아마포 반 야드를 짜는 노동시간에 그가 1야드를 생산할 수 있다면, 이 자본가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는 아마포 반 야드를 옛 시장가격에 계속 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상대들을 싸움터에서 몰아내고 자기 시장을 넓히는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런데 그의 시장의 필요는 그의 생산력이 확장된 것과 같은 정도로 늘어났다. 그가 불러낸 더 강력하고 더 값비싼 생산수단은 그가 상품을 더 싸게 팔 수 있게 해 주지만, 동시에 그가 더 많은 상품을 팔도록, 자기 상품을 위한 훨씬 더 큰 시장을 장악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이 자본가는 아마포 반 야드를 경쟁자들보다 더 싸게 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1야드 전부를 경쟁자들이 반 야드를 파는 만큼 싸게 팔지는 않을 것이다. 1야드를 생산하는 데 그에게 드는 비용이 다른 이들에게 반 야드가 드는 비용보다 크지 않은데도 그렇다. 그렇게 하면 그는 초과이윤을 얻지 못하고 교환에서 생산비만 되돌려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더 큰 자본을 움직인 데서 더 큰 수입을 얻을지는 몰라도, 자기 자본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상품의 값을 경쟁자들보다 몇 퍼센트만 낮게 매겨도 노리는 목적을 이룬다. 그는 그들보다 싸게 팖으로써 그들을 싸움터에서 몰아내고 적어도 그들 시장의 일부를 빼앗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품의 판매가 산업의 유리한 시기에 이루어지는가 불리한 시기에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그때그때의 가격은 언제나 생산비의 위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마포 1야드의 시장가격이 그 종래의 생산비 위에 있는가 아래에 있는가에 따라, 새롭고 더 생산적인 생산수단을 쓴 자본가가 자기의 실제 생산비 위로 파는 백분율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본가의 특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른 경쟁 자본가들이 같은 기계와 같은 분업을 도입하고, 그것도 같은 규모나 더 큰 규모로 도입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도입이 아주 일반화되어 아마포의 가격은 옛 생산비 아래로뿐 아니라 새 생산비 아래로까지 낮아진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서로의 관계에서 새 생산수단을 도입하기 전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옛 가격에 두 배의 생산물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그들은 옛 가격보다 낮은 값에 두 배의 생산물을 내놓도록 강제된다. 새로운 지점, 새 생산비에 이르면 시장 지배를 위한 싸움을 새로 치러야 한다. 분업과 기계가 더 늘어나면 분업과 기계가 이용되는 규모가 더 커진다. 그리고 경쟁은 이 결과에 대해 다시 같은 반작용을 일으킨다.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 자본가계급, 중간계급, 노동자계급에 미치는 영향
그러므로 우리는 생산의 방법과 생산수단이 어떻게 끊임없이 확대되고 혁신되는지, 분업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더 큰 분업을, 기계의 사용이 더 큰 기계의 사용을, 대규모의 노동이 더욱 대규모의 노동을 끌어오는지 본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끊임없이 낡은 궤도에서 내던지고, 자본이 이미 노동의 생산력을 긴장시켰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것을 더욱 긴장시키도록 강제하는 법칙이다. 자본에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그 귀에 「전진! 전진!」 하고 외치는 법칙이다. 이것은 상업의 주기적 변동 안에서 상품의 가격을 필연적으로 그 생산비에 맞추는 법칙과 다름없다.
어떤 자본가가 싸움터에 아무리 강력한 생산수단을 끌고 나오더라도 경쟁은 그 채택을 일반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채택된 순간부터, 그의 자본의 더 큰 생산성의 유일한 결과는 그가 같은 값에 전보다 열 배, 스무 배, 백 배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더 낮은 판매 가격을 더 큰 판매량으로 메우기 위해 어쩌면 천 배의 시장을 찾아야 하므로, 이제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산비를 메우기 위해서도 더 넓은 판매가 필요하므로(보았듯이 생산 도구 자체가 점점 값비싸진다), 그리고 이 더 넓은 판매가 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경쟁자들에게도 사활의 문제가 되었으므로, 옛 싸움은 다시 시작되어야 하며, 이미 발명된 생산수단이 강력할수록 그 싸움은 더욱 격렬하다. 그러므로 분업과 기계의 사용은 새로 출발하되 더욱 큰 규모로 출발할 것이다.
어떤 위력의 생산수단이 쓰이든 경쟁은 상품의 가격을 생산비로 끌어내림으로써 이 위력의 황금 열매를 자본에게서 빼앗으려 한다. 생산이 싸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곧 같은 양의 노동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경쟁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으로 생산을 더욱 싸게 하도록, 더 큰 덩어리의 생산물을 더 낮은 값에 팔도록 강제한다. 그리하여 자본가는 자기 노력으로 같은 노동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을 내놓아야 할 의무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셈이 된다. 한마디로 자기 자본을 이윤 있게 쓰기 위한 더 어려운 조건뿐이다. 그러므로 경쟁이 그 생산비의 법칙으로 끊임없이 그를 뒤쫓고 그가 경쟁자들에게 맞서 벼린 모든 무기를 그 자신에게 되돌리는 동안, 자본가는 새 기계가 경쟁으로 낡아 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더 값비싸지만 더 싸게 생산할 수 있게 해 주는 새 분업과 새 기계를 쉼 없이 도입함으로써 경쟁에서 앞서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이제 이 열병 같은 소동이 세계시장 전체에서 작동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본의 성장과 축적과 집중이 어떻게 점점 더 세분된 분업, 옛 기계의 점점 더 큰 개선, 새 기계의 끊임없는 사용을 몰고 오는지, 곧 열병 같은 조급함으로, 점점 더 거대한 규모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생산자본의 성장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 사정들은 임금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더 큰 분업은 한 노동자가 다섯, 열, 스무 노동자의 일을 해내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다섯 배, 열 배, 스무 배로 늘린다. 노동자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싸게 자기를 팖으로써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섯, 열, 스무 사람의 일을 함으로써도 경쟁한다. 그리고 자본이 도입하고 끊임없이 개선하는 분업이 그들에게 이런 방식의 경쟁을 강제한다.
더 나아가 분업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노동은 단순해진다. 노동자의 특별한 숙련은 값어치를 잃는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탄력이 없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생산력으로 바뀐다. 그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러므로 경쟁자들이 사방에서 그를 밀어붙인다. 게다가 일이 단순하고 배우기 쉬울수록 그 생산비, 그것을 익히는 비용은 적어지고, 따라서 임금은 그만큼 낮게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은 생산비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이 더 불만스럽고 더 역겨워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은 늘고 임금은 줄어든다.
노동자는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같은 시간에 더 많이 해냄으로써 주어진 기간의 임금 총액을 지키려 한다. 이렇게 궁핍에 내몰려 그 자신이 분업의 파멸적 결과를 몇 배로 늘린다. 결과는 이렇다. 그가 더 많이 일할수록 그는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더 많이 일할수록 그는 동료 노동자들과 더 많이 경쟁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기와 경쟁하도록, 자기와 같은 비참한 조건으로 자기를 내놓도록 더 많이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노동자계급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기계는 같은 결과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낳는다. 그것은 숙련 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자를 여자로, 어른을 아이로 대체한다. 새로 도입되는 곳에서 그것은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거리에 내던지고, 더 발전하고 더 생산적이 될수록 더 작은 수로나마 추가로 그들을 내버린다.
우리는 자본가들 서로 간의 산업 전쟁을 큰 윤곽으로 급히 그렸다. 이 전쟁에는 그 전투에서 노동자 군대를 모집함으로써보다 해고함으로써 승리한다는 특징이 있다. 장군들(자본가들)은 누가 더 많은 산업 병사를 해고할 수 있는가를 서로 겨룬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기계로 남아돌게 된 노동자들이 새 일자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감히 해고된 바로 그 노동자들이 새 노동 부문에서 자리를 찾는다고 직접 주장하지는 못한다. 사실이 이 거짓말에 너무 크게 외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분, 이를테면 방금 없어진 산업 부문에 들어가려던 젊은 노동자 세대의 일부에게 새 고용 수단이 마련되리라고 주장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큰 위안이다. 자본가 나리들에게는 착취할 싱싱한 피와 근육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가 묻게 하라. 이 위안은 노동자들보다 자본가들 자신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로 절멸된다면, 임금노동 없이는 자본이기를 그치는 자본에게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기계로 직접 일자리에서 밀려난 모든 사람과, 같은 산업 부문에서 고용의 기회를 기다리던 젊은 세대 모두가 실제로 어떤 새 고용을 찾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새 고용이 그들이 잃은 고용만큼 높은 임금을 줄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치경제학의 법칙과 모순될 것이다. 우리는 현대 산업이 언제나 더 높고 복잡한 일을 더 단순하고 종속적인 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기계로 한 산업 부문에서 내던져진 노동자 무리가 더 나쁜 보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부문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 법칙의 예외로 기계 자체의 제조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거론되어 왔다. 산업에서 기계에 대한 수요와 소비가 늘어나자마자 기계의 수가 필연적으로 늘어나야 하고, 따라서 기계의 제조도, 따라서 기계 제조에서의 노동자 고용도 늘어나야 하며, 이 산업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숙련된, 심지어 교육받은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1840년 이후로 그 전에도 절반만 참이었던 이 주장은 모든 진실의 겉모습을 잃었다. 이제는 면사의 제조에서와 꼭 같이 광범한 규모로 온갖 기계가 기계 자체의 제조에 쓰이고, 기계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아주 정교한 기계 옆에서 아주 어리석은 기계의 역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에 밀려난 남자 대신 공장은 어쩌면 아이 셋과 여자 하나를 고용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남자의 임금은 전에 아이 셋과 여자 하나를 먹이기에 충분하지 않았던가? 최저임금은 종족의 유지와 번식에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사랑스러운 부르주아 문구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한 노동자 가족의 생계를 얻기 위해 이제 전보다 네 배 많은 노동자의 생명이 소모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요약하면, 생산자본이 자랄수록 분업과 기계의 사용이 넓어진다. 분업과 기계의 사용이 넓어질수록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넓어지고 그들의 임금은 쪼그라든다.
덧붙여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더 높은 층에서도 충원된다. 소사업가와 자본의 이자로 사는 사람들의 무리가 노동자계급의 대열로 떨어져, 노동자들의 팔 옆에 자기 팔을 내미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게 된다. 이렇게 일을 구걸하며 뻗친 팔들의 숲은 점점 빽빽해지고, 팔 자체는 점점 야위어 간다.
점점 더 큰 규모의 생산이 성공의 첫째 조건인 싸움에서 소제조업자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제조업자가 어떻게 몰락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후보자 수를 늘리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서술한 운동으로 자본가들이 이미 존재하는 거대한 생산수단을 점점 큰 규모로 이용하고 그 목적을 위해 신용의 온갖 태엽을 감도록 강제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들은 산업의 지진을 키운다. 그 지진 한가운데서 상업 세계는 자기 부의 한 부분, 자기 생산물, 심지어 자기 생산력을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다. 한마디로 공황이 늘어난다. 공황은 더 잦아지고 더 격렬해진다.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생산물의 덩어리가, 따라서 넓은 시장의 필요가 커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계시장은 점점 줄어들고, 이용할 시장은 점점 적게 남는다. 앞선 모든 공황이 지금까지 정복되지 않았거나 겉으로만 이용되던 시장을 세계 상업에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을 먹고 살 뿐이 아니다. 고귀하면서 동시에 야만적인 주인처럼 그것은 자기 노예들의 시체, 공황 속에서 죽어 가는 노동자들의 대량 희생을 무덤으로 함께 끌고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이 빨리 자라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빨리 자란다는 것, 곧 노동자계급의 고용 수단과 생활 수단은 그에 비례해 더욱 빨리 줄어든다는 것을 본다. 그런데도 자본의 빠른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