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평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서한을 평함
인물마오쩌둥, 니키타 흐루쇼프, 이오시프 스탈린, 덩샤오핑 용어9평, 수정주의, 평화공존, 개인숭배, 티토주의, 탈스탈린화 사건중소분열, 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
3평 —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인가? (1963년 9월 26일)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인가?
이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성격을 판단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10월 혁명의 길을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유고슬라비아의 길을 따라 자본주의 복벽을 실행할 것인지에 관련된 문제다. 이 문제는 또한 티토 집단을 도대체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즉 형제당이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힘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반역자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볼 것인지와도 관련된다.
이 문제에 대해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우리와, 그리고 전 세계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근본적인 이견을 갖고 있다.
전 세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지도 집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신했고 유고슬라비아 인민을 배신했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반역자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다.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이와 달리,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고, 형제당의 일원이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7월 14일 공개서한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주장했으며, 티토 집단이 “국가 지도권을 장악한 형제당”이라는 것이다.
흐루쇼프 동지는 최근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해 많은 연설을 했는데, 과거 그들이 이 문제에 씌웠던 가림막을 모조리 벗어던짐으로써 그들의 실제 견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흐루쇼프가 보기에, 유고슬라비아는 원래 사회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주의 국가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혁명을 공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발전”은 “전체 국제 혁명 노동자 운동에 대한 구체적 기여”로서 흐루쇼프가 부러워하고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보기에, 소련공산당 지도부와 티토 집단은 원래 “계급적 형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하나의 공동 목적에 의해 연결된 형제”라고 한다.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티토 집단의 “믿음직하고 충실한 동맹자”라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보기에, 그는 원래 티토 집단에게서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찾아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서한에서 “소련공산당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사이에 몇 가지 원칙적인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한낱 위장술에 불과했다. 이제 흐루쇼프는 티토 집단에게 “우리는 같은 사상에 속하며 같은 이론을 지침으로 삼는다”고 말하며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다고 한 것이다.
흐루쇼프는 이미 1960년 성명을 아득히 저 멀리 내던져버렸다.
성명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각국 공산당은 국제 기회주의의 유고슬라비아 변종, 즉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이론’의 집중적 표현을 일치하여 규탄한다.”
성명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지도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선언했으며, 자신들의 반레닌주의적 수정주의 강령으로 1957년 선언에 맞서고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을 전체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대립시켰다.”
성명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지도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자들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의 이른바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영웅적 투쟁이 이룩한 혁명적 성과를 상실할 위험에 빠뜨렸다.”
성명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파괴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모든 평화 애호 세력과 국가들의 단결을 해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성명이 이렇게나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감히 “1960년 성명에 근거하여 우리는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간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내뱉다니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다!
묻는다.
성명에서 말한 대로, 국제 기회주의의 변종인 현대수정주의 “이론”의 지도 아래 있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가 어디 있는가?
성명에서 말한 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전체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대립하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가 어디 있는가?
성명에서 말한 대로,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파괴 작업을 벌이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가 어디 있는가?
성명에서 말한 대로, 모든 평화 애호 세력과 국가들의 단결을 해치는 활동을 벌이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가 어디 있는가?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나라들이 수십억 달러나 쏟아부어 키운 그런 “사회주의 국가”가 어디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일이다!
보아하니 톨리아티 동지가 흐루쇼프 동지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한 것 같다. 톨리아티는 1960년 성명이 티토 집단에 대해 취한 입장은 “부정확하다”고 대놓고 말한다. 흐루쇼프가 오직 한마음으로 티토 집단을 위해 원래 판결을 뒤집으려 든다면 마땅히 좀 솔직해져야지, 굳이 거짓으로 성명을 옹호하는 체할 필요가 없다.
성명이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대해 내린 결론은 과연 틀렸는가, 마땅히 뒤집혀야 하는가? 톨리아티는 말한다. 틀리게 내려졌으니 뒤집어야 한다고. 흐루쇼프도 실제로는 그렇게 말하는 셈이다. 틀리게 내려졌으니 뒤집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틀리지 않았으며 절대로 뒤집을 수 없다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하고 1960년 성명을 수호하는 모든 형제당 역시 말한다. 틀리지 않았으며 절대로 뒤집을 수 없다고.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경직된 공식”과 “자본주의 세계의 짐승 같은 법률”을 고집하는 것이며,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에서 ‘제명’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누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사실을 무시하고” “주관주의”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들은 눈을 감고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객관적 법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에서 출발하여” “실제 상황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결론이라고 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상황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객관적 법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에서 출발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상황을 심층 분석한다면,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다.
유고슬라비아 도시에서의 사적 자본주의 발전
흐루쇼프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단정하는 근거 중 하나는, 유고슬라비아에 사적 자본도, 사적 기업도, 자본가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 정말 그러한가? 아니다.
사실은 유고슬라비아의 사적 자본과 사적 기업이 대량으로 존재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각국의 일반적 상황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장악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국민경제 내에 다양한 경제 성분이 존재하고, 사적 자본주의 경제 성분이 존재하는 현상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국가 정권이 사적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 즉 이용·제한·개조·소멸의 정책을 취하느냐, 아니면 방임·부양·장려의 정책을 취하느냐에 있다. 이것이 그 나라가 사회주의 방향으로 발전하는지, 자본주의 방향으로 발전하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티토 집단은 이 문제에서 사회주의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전후 초기 유고슬라비아에서 한때 실행되었던 사회 개혁은 원래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티토 집단이 공개적으로 배반한 이후, 그들이 취한 정책은 사적 자본과 사적 기업을 개조·소멸하는 정책이 아니라, 사적 자본과 사적 기업을 배양·발전시키는 정책이었다.
1953년, 티토 집단은 조례를 공포하여 “합동 시민”이 “기업을 창설하고” “노동력을 고용할” 권리를 규정하였다. 같은 해, 티토 집단은 법령을 공포하여 개인이 국가 경제 조직의 고정 자산을 구매할 권리를 규정하였다.
1956년, 티토 집단은 세금 정책 등을 통해 지방 정권이 사적 자본을 부양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1961년, 티토 집단은 개인이 외환을 구매할 권리를 규정하였다.
1963년, 티토 집단의 사적 자본주의 발전 정책은 다시 헌법의 형태로 확인되었다. 이 헌법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인이 기업을 창설할 수 있고,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티토 집단의 부양 아래 유고슬라비아의 도시 사적 기업과 사적 자본이 우후죽순처럼 발전해 나갔다.
베오그라드에서 공식 출판된 《1963년 유고슬라비아 통계 편람》 자료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의 사적 ‘수공업’은 이미 11만 5천여 개에 달한다. 실제로 많은 사적 기업주는 이른바 ‘수공업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사적 자본가이다.
티토 집단은 법령에 따르면 사유자가 최대 5명의 노동자를 고용할 권리가 있지만, 일부 사유자는 고용한 노동자가 열 배에서 스무 배 이상 많으며, 어떤 경우는 “500명에서 6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다고 인정한다.(注一)어떤 사적 기업의 연간 유통액은 1억 디나르 이상에 달하기도 한다.(注二)
유고슬라비아 《정치보》는 1961년 12월 7일, 이러한 사적 기업주들은 흔히 “대기업주”라고 폭로하였다. “이들 사적 기업주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는지는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법에 따르면 그들은 그들의 작업을 도울 노동자 5명을 고용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 5명은 사실상 5명의 하청업자이며, 이 하청업자들은 다시 ‘하위 하청업자’를 두고 있다.” “이들 하청업자는 흔히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단지 명령을 내리고 계획을 세우며, 차를 타고 한 기업에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하며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이다.”
사적 기업주들이 얻는 이윤에서도 그들이 진정한 자본가임을 알 수 있다. 1961년 12월 8일 유고슬라비아 《세계보》는 “일부 사적 수공업자의 월 순수입이 100만 디나르에 달한다”고 밝혔다. 1961년 12월 20일 베오그라드 《뉴스 석간》은 베오그라드에 “116명의 사적 기업주가 지난해 모두 1천만 디나르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하였다. 어떤 기업주는 일 년 동안 “약 7천만 디나르의 수입을 얻었”으며, 공식 환율로 환산하면 약 10만 달러에 가깝다.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에는 사적 공업 기업, 사적 서비스 기업, 사적 상업, 사적 주택업, 사적 운송업뿐만 아니라 ‘사적 은행가’라고 불리는 고리대금업자도 있다. 이들 고리대금업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며, 심지어 신문에 “30만 디나르를 대출, 3개월 기한, 40만 디나르로 상환, 담보 필요”와 같은 광고를 싣는다.(注三)
이 모든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티토 집단을 변호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고의로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사적 자본도, 사적 기업도, 자본가도 없다고 억지 주장할 수 있겠는가?
유고슬라비아 농촌에서의 자본주의 범람
유고슬라비아 농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흐루쇼프가 말한 대로 그곳에도 이미 자본가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유고슬라비아 자본주의의 범람은 농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개체 경제, 소생산자 경제는 매일매시 자본주의를 생산하며, 오직 농업 집단화를 실행해야만 농업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 수 있다.
스탈린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레닌이 말하기를,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낳는 개별 농민 경제가 국내에서 여전히 우세를 차지하는 한,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이 존재할 것이다. 분명히, 이런 위험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를 진정으로 말할 수는 없다.”(《스탈린 전집》 제11권, 제7쪽)
티토 집단은 이 문제에서 사회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노선을 취했다.
원래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직후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농민 노동 협동조합도 일부 조직했으나, 기본적으로 부농 경제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1951년부터 티토 집단은 농업 집단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농민 노동 협동조합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티토 집단이 사회주의 사업을 배반하는 중대한 조치였다. 1953년 말까지 이런 협동조합은 1950년의 6,900여 개에서 1,200여 개로 줄었다. 1960년에는 다시 147개로 줄었다. 유고슬라비아 농촌은 개인 경제의 광대한 바다였다.
티토 집단은 공개적으로 집단화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악독하게 “집단화와 박탈은 같은 것”이라고 비난했으며(주4), 집단화는 “농노제와 농민의 빈곤을 가장 오래 유지시키는” 길이라고 말했다.(주5) 그들은 또 농업 발전을 “다양한 경제 세력의 자유 경쟁에 기초하여” 세워야 한다고 황당하게 주장했다.(주6)
티토 집단은 대규모 농민 노동 협동조합을 해산하는 한편, 1953년부터 일련의 법령을 잇따라 공포하여 농촌에서 토지 자유 매매와 자유 임대, 자유 고용을 실시하고, 농산물 계획 수매 제도를 폐지하고 농산물 자유 무역을 실시하여 농촌 자본주의 발전을 장려했다.
이런 정책 아래 농촌 자본주의 세력이 급속히 만연하고, 농촌의 양극 분화가 날로 심해졌다. 이는 티토 집단이 자본주의 복벽을 실시하는 중요한 측면이다.
농촌의 양극 분화는 우선 토지 소유 상황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유고슬라비아 전(前) 농림 비서 코마르는 1959년에 농촌에서 5헥타르 이하의 토지를 가진 빈곤 농가가 전체 농가의 70%를 차지하며, 그들이 소유한 경작지는 사유 경작지 면적의 43%에 불과하고, 8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가진 부유 농가는 전체 농가의 13%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소유한 경작지는 사유 경작지 면적의 33%를 차지한다고 인정했다. 코마르는 또 매년 토지를 사고파는 농가가 전체 농가의 약 10%에 달한다고 인정했다.(주7) 토지를 파는 농가는 대부분 빈곤 농가였다.
토지 집중의 실제 상황은 위 자료보다 훨씬 심각하다. 티토 집단의 어용지 《전투보》가 1963년 7월 19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한 현에서 “수천 농가가 법정 최고 한도인 10헥타르를 크게 초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비예리나 구에서는 “10헥타르에서 30헥타르까지의 농지를 소유한 500가구의 농가가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농촌의 양극 분화는 또 경작 가축과 농기구 소유의 격차에서도 나타난다. 주요 곡창 지대인 보이보디나 주의 30만 8천 농가 중 55%가 경작 가축이 없다. 2헥타르 이하의 토지를 가진 농가는 이 지역 전체 농가의 40.7%를 차지하지만, 그들의 쟁기는 쟁기 총수의 4.4%에 불과하여 평균 20가구당 겨우 1개의 쟁기를 갖고 있다. 이 지역의 부유 농민들은 다량의 쟁기와 축력 수레뿐 아니라, 1,300여 대의 트랙터와 대량의 기타 농업 기계를 보유하고 있다.(주8)
농촌의 양극 분화는 또 고용 노동제와 기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의 발전에서도 나타난다.
1958년 2월 7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주보는 1956년 세르비아에서 8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가진 농가의 52%가 고용 노동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1962년 코마르는 일부 농가 주인이 최근 몇 년 동안 “강대해지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활동으로 수입을 얻고 있다: 불법 상행위, 자신의 생산물뿐 아니라 타인의 생산물까지 가공, 밀주 제조, 토지 매입 또는 주로 임대, 위장 분가, 공유지 침탈 또는 은닉 등의 방법으로 법정 최고 한도 10헥타르를 초과하는 농지를 소유, 각종 투기적 방법으로 트랙터 구입, 대경(代耕)을 통해 이웃 빈곤 농민 착취.”라고 말했다.(주9)
1962년 8월 30일 《전투보》는 “‘이른바 선량한 생산자’는”“타인의 토지를 임차 경작하고 노동력을 고용하는 사람이며, 경험 많은 상인이다.”“이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기업주이다. 그들 중 일부는 일 년 내내 호미를 손에 쥐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력을 고용하고, 자신은 그저 들판을 순시하며 장사만 한다.”
유고슬라비아 농촌에서는 고리대금업자의 활동도 매우 극성을 부리며, 그 이자는 왕왕 100%가 넘는다. 이 밖에도 이른바 노동력 패킹 구매자라 하여 실업자의 곤경을 이용해 중간 착취를 하는 자들이 있다.
대량의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을 상실한 빈곤 농민들은 오직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1962년 8월 20일자 《정치보》 자료에 따르면, 1961년 유고슬라비아 전국에서 2헥타르 이하의 토지밖에 없는 농가의 화폐 수입은 대략 70%가 노동력 판매에서 나왔다. 그들은 거듭되는 착취를 당하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사실이 말해주듯, 유고슬라비아 농촌에서는 착취 계급이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서한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변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농촌의 “사회주의 성분”이 6%에서 15%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 한심한 퍼센트조차도 사회주의 성분이 아니다.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말하는 15퍼센트의 “사회주의 성분”이란 티토 집단이 추진한 “농장”과 “종합농업노동자합작사” 따위의 농업 조직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농장”이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농장이다. 이른바 “종합농업노동자합작사”란 실질적으로 주로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자본주의 경제 조직이다. 그것은 토지 사유제를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요 작용은 부농 경제의 발전을 부추기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에서 출판된 《유고슬라비아 농업 문제》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합작사에 대해 “오늘날의 상황과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로 보아, 그것은 농업과 농촌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조금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역할이 농촌에 사회주의적 거점을 구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요소를 발전시키고 돕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이러한 합작사가 부농 분자들의 연합인 사례도 있다.”
티토 집단은 “종합농업노동자합작사”에 농민으로부터 농산물을 수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 이러한 이른바 “합작사”는 자신의 상업 활동에서 이런 특권을 빙자하여 농산물 가격이 자유롭게 등락하는 조건을 이용해 마구 투기 장사를 벌여 농민을 착취했다. 1958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농업 생산이 감소하자 “합작사”와 기타 상업 기구들이 이 기회를 틈타 농산물 판매 가격을 부추겨 올렸다. 1959년에는 농업 수확이 다소 증가하자 “합작사”는 농민과 맺은 수매 계약을 파기하고 수매 수량을 줄이면서 농산물이 밭에서 썩도록 내버려두었다.
“종합농업노동자합작사”와 “농장”은 장기 및 임시 노동자를 대량 고용하여 착취한다. 1962년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 통계연감》 자료에 따르면, 1961년 한 해만 해도 각종 “합작사”가 고용한 고정 노동자만 10만 명이 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수의 임시 노동자가 있었다. 1962년 12월 1일 자 유고슬라비아 《노동보》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고용 노동자들은 “가장 조야한 착취를 항상 당하고 있으며(노동일은 15시간에 달한다), 그들의 개인 소득은 대개 아주 낮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이른바 “사회주의 성분”의 농업 조직들은 모두 자본주의 성격의 농업 조직에 불과하다.
빈농을 수탈하고 자본주의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농업 분야에서 티토 집단의 기본 정책이다. 티토는 1955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소농장들을 통합할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1959년 티토 집단은 「농지 사용법」을 제정하여, 개별 농민이 규정된 조건에 따라 토지를 사용할 수 없으면 “종합농업노동자합작사”나 “농장”이 그들의 토지에 대해 “강제 관리”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것은 사실상 빈농을 수탈하고 토지를 강제로 겸병하는 수단으로 자본주의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한 농업 자본주의의 길이다.
스탈린은 소농 경제가 큰 규모의 농업 경제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말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자본주의 길과 사회주의 길,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길과 자본주의로 후퇴하는 길이다.”
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 외에 또 다른 제3의 길이 있는가?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제3의 길이란 사실은 제2의 길, 즉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왜냐하면 개인 경제로 되돌아가고 부농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부농의 고리대를 부활시키고, 부농의 농민에 대한 착취를 부활시키며, 부농이 권세를 잡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부농을 부활시키면서 동시에 소비에트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부농을 부활시킨 결과는 반드시 부농 정권을 수립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폐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반드시 부르주아지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된다. 부르주아지 정부를 수립한 결과는 또 반드시 지주와 자본가를 부활시키고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스탈린 전집》 제13권, 217쪽.)
10여 년 동안 유고슬라비아 농업이 걸어온 길은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 길이다.
이 모든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티토 집단을 변호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만일 의도적으로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자본가가 없다고 억지로 말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 전인민적 소유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변질되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자본주의가 복벽된 것은 도시의 사영 자본주의와 농촌 자본주의의 범람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경제에서 결정적 지위를 차지하는 “공영” 기업이 이미 변질되었다는 사실이다.
티토 집단의 이른바 “노동자 자치” 경제는 특수한 유형의 국가 자본주의이다.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조건에서의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티토 집단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 독재로 변질시킨 조건에서의 국가 자본주의이다. 이 “노동자 자치” 기업의 생산수단은 어느 한 명 혹은 몇 명의 사적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티토 집단으로 대표되는 관료와 매니저를 포함한 유고슬라비아의 신형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의 소유이다. 이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이름을 도용하고, 미 제국주의에 의존하며, “사회주의”의 외투를 걸치고, 본래 노동 인민에게 속했던 재산을 강점하였다. 이른바 “노동자 자치” 제도는 실제로는 관료 매판 자본의 통치 아래 놓인 잔혹한 착취 제도이다.
1950년부터 티토 집단은 일련의 법령을 공포하여 공장, 광산, 교통운수, 무역, 농업, 임업, 공공사업 등 모든 국영 기업에서 이른바 ‘노동자 자치’를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이른바 ‘노동자 자치’의 주요 내용은 기업을 이른바 ‘노동 집단’에 넘겨 스스로 관리하게 하는 것으로서, 각 기업이 스스로 원자재를 구매하고, 제품의 품종·생산량·가격을 결정하며, 스스로 시장에 나가 제품을 판매하고, 스스로 임금을 결정하며, 스스로 이윤의 일부 분배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법령은 또한 기업이 자체적으로 고정 자산을 매매하고 임대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티토 집단은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의 소유제를 “사회주의 소유제의 더 높은 형태”라고 부른다. 그들은 ‘노동자 자치’를 실시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사람을 속이는 귀신 같은 소리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른바 ‘노동자 자치’, ‘공장은 노동자에게로’라는 따위의 구호는 본래 마르크스주의 구호가 아니라 무정부 노동조합주의 구호이며,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구기회주의자·구수정주의자의 구호임을 알고 있다.
이른바 ‘노동자 자치’, ‘공장은 노동자에게로’라는 ‘이론’은 사회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와 완전히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 또한 이미 마르크스주의 고전 작가들에게 여지없이 반박당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의 모든 자본을 한 걸음 한 걸음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손에 집중시킨다”고 지적하였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정권을 장악하여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 재산으로 전환시킬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드시 생산수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 정권의 손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한 가지 기본 원칙이다.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어떤 사람들이 공장을 ‘생산자’에게 넘겨 직접 ‘생산을 조직하게’ 하자고 주장했을 때, 레닌은 일찍이 그러한 주장을 엄하게 비판하면서 그 주장의 실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레닌은 핵심을 찔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개별 공장의 또는 개별 업종의 노동자들이 자기네 각자의 생산에 대해 갖는 소유권을 합법화하거나, 또는 그들이 전국 정권의 명령을 약화시키거나 집행을 방해할 권리를 합법화하려는 모든 직접적·간접적 행위는 곧 소비에트 정권 기본 원칙에 대한 극대한 왜곡이며 사회주의의 전면적 포기이다.” (레닌: 「소비에트 정권의 민주제와 사회주의 성격에 관하여」)
보다시피 이른바 ‘노동자 자치’는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실 티토 집단의 이른바 ‘노동자 자치’ 역시 진정으로 노동자에게 ‘자치’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간판이다.
‘노동자 자치’를 실시하는 기업은 실제로 티토 집단으로 대표되는 신형 관료 매판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티토 집단은 기업의 재정권과 인사권을 통제하고 기업 수입의 절대 부분을 가져간다.
티토 집단은 은행을 통해 전국의 신용을 통제하고, 각 기업의 투자 기금과 유동 자금을 통제하며, 각 기업의 재무를 감독한다.
티토 집단은 세금과 이자 등의 경로를 통해 각 기업의 수입을 거둬들인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집행위원회 1961년 사업 보고》의 자료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업 순수입의 약 4분의 3을 가져갔다.
티토 집단이 인민들의 노동 결실을 약탈하는 것은 주로 그들 관료 집단의 낭비를 위하여, 그들의 반동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 인민에 대한 진압 기구를 강화하기 위하여, 외채 상환이나 외채 이자 지급 형식을 통해 제국주의에 공물을 바치기 위하여 사용된다.
티토 집단은 또한 지배인을 통해 기업을 통제한다. 이들 기업의 지배인은 명목상 기업이 채용하지만 실제로는 티토 집단이 임명한다. 그들은 관료 매판 부르주아 계급이 이들 기업에 둔 대리인이다.
이러한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 내부에서 지배인과 노동자의 관계는 실제로 고용인과 피고용인,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이다.
실제 정황은, 지배인이 기업의 생산 계획과 경영 방향을 결정할 권리, 생산수단을 처분할 권리, 기업 수입의 분배를 결정할 권리, 노동자를 채용하고 해고할 권리, 그리고 ‘노동자 위원회’나 ‘관리 위원회’의 결의를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신문 잡지가 반영한 대량의 자료가 증명하듯, ‘노동자 위원회’는 다만 형식만 갖춘 ‘손드는 기계’일 뿐이며, 기업의 “모든 권력은 지배인의 손에 쥐어져 있다”.
지배인이 생산수단을 쥐고 지배하며, 더욱이 기업 수입의 분배를 쥐고 지배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들은 각종 특권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노동 성과를 침해할 수 있다.
티토 집단 자신도 인정하듯, 이들 기업에서 지배인과 노동자 사이에는 임금 격차가 클 뿐 아니라 분배 격차도 크다. 어떤 기업에서는 지배인과 고급 직원이 나눠 받는 배당금이 노동자보다 40배나 높다. “어떤 기업들에서는 일부 지도인원이 수령한 상여금 총액이 집단 전체의 임금 총액과 맞먹을 정도이다.”(주10)
기업 지배인은 또한 특권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대량의 수입을 얻는다. 뇌물을 받거나 부패와 절도 행위를 하는 것은 더욱더 기업 지배인의 큰 재원이다.
광대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빈곤하다. 노동자들의 고용은 보장되지 않는다. 대량의 노동자들이 기업 도산으로 실업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3년 2월 실업자 수는 33만 9천 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재업 총인원의 10퍼센트 정도에 해당한다. 매년 또한 대량의 노동자들이 국외로 유랑한다.
1961년 9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정치보》는 이렇게 인정하였다. “어떤 노동자들과 사무원들 사이에는 상당히 큰 도랑이 존재하는데, 전자는 후자를 자기들 임금을 ‘삼켜 버리는’ ‘관료’로 간주한다.”
이런 사실들은 유고슬라비아의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 속에서, 소수가 다수의 노동 성과를 차지하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새롭게 생겨난 유고슬라비아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티토 집단이 이른바 ‘노동자 자치’를 추진함으로써, 본래 전인민적 소유에 속하던 기업들은 사회주의 경제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하였다.
이는 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첫째, 국가의 통일적인 경제 계획을 철폐하였다.
둘째, 이윤을 기업 경영의 적극성을 자극하는 근본 수단으로 삼았다. 기업은 수입과 이윤을 늘리기 위해 스스로 온갖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즉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의 생산 목적은 결코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 추구를 위한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적 자유 경쟁을 조장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티토는 기업 경영자들에게 “경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의 보통 사람들, 소비자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티토 집단은 또 “경쟁, 이윤 추구, 투기 매점 등의 현상”을 허용하는 까닭이 바로 “생산자와 그 집단 및 공동체 등의 자발적 정신을 발양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주11)
넷째, 신용 대출과 은행을 자본주의적 자유 경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삼았다. 티토 정권의 신용 대출 기관과 은행 기관은 입찰 방식을 통해 대출을 집행한다. 지급 능력이 있고, 더 높은 이자를 내며, 더 빨리 상환하는 자가 대출을 받는다. 그들 말로 하면 이는 바로 “경쟁을 투자 대출 배분의 상용 방법으로 삼는 것”이다.(주12)
다섯째, 각 기업 간의 관계는 국가의 통일적 계획 아래 상호 지원하고 상호 협력하는 사회주의적 관계가 아니라, 자유 시장 속에서 상호 경쟁하고 상호 압박하는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였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계획적 조직이, 수백만 인민으로 하여금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에서 가장 엄격하게 통일된 규준을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다.” (《레닌 전집》 제27권, 제314쪽.)
레닌은 또 이렇게 말했다. “만약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에 대해 전면적인 국가 통계와 감독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정권, 노동자의 자유는 유지될 수 없고, 자본주의 압박 제도의 복벽은 불가피할 것이다.” (《레닌 전집》 제27권, 제232쪽.)
‘노동자 자치’라는 간판 아래, 유고슬라비아의 각 경제 부문과 각 기업 사이에는 자본주의식의 격렬한 경쟁이 가득 차 있다.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 상대를 타격하고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사리사욕을 도모하고 부정을 저지르며, 투기 매점을 하고, 물건을 사재기하고 매점매석하며, 물가를 올리고, 뇌물을 주고받으며, 기술 비밀을 봉쇄하고, 기술 인력을 서로 빼앗으며, 심지어 신문과 방송을 이용해 서로 공격하는 일은 이미 흔히 보는 일이 되었다.
국내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대외 무역 면에서도, 유고슬라비아 기업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신문 매체들은, 흔히 이삼십 개의 유고슬라비아 대외 무역 기업 대표가 동일한 외국 시장에 와서 서로 장사를 빼앗고 거래 상대를 다투는 일이 있다고 전한다. 이런 대외 무역 기업들은 “이기적인 이유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
격렬한 경쟁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시장은 극도로 혼란스럽다. 여러 도시와 지역 간은 물론, 같은 지역의 여러 상점 간에도, 심지어 동일한 생산 단위에서 구매한 같은 종류의 상품조차도 가격 차이가 매우 크다.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업들은 대량의 농산물을 서슴없이 파괴해 버린다.
격렬한 경쟁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에는 대량의 기업이 도산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공보》의 자료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도산하는 기업이 매년 오륙백 곳에 달한다.
이 모든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공영’ 경제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법칙에 지배받는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쟁과 생산 무정부 상태의 법칙에 지배받는 경제임을 설명해 준다. 티토 집단의 이른바 ‘노동자 자치’ 기업은 사회주의적 성질의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성질의 기업이다.
우리는 티토 집단을 위해 일부러 사건을 뒤집으려는 자들에게 묻겠다. 너희가 만약 속일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가 통제하는 국가 자본주의 경제를, 억지로 사회주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미 제국주의의 부용
유고슬라비아에서 자본주의가 복벽되는 과정은, 티토 집단이 미 제국주의에 투항하는 과정, 유고슬라비아가 미 제국주의의 부용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뒤얽혀 있다.
티토 집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반한 뒤에, 국가 주권을 팔아넘기고 미 제국주의의 자선에 의존하여 연명하는 치욕적인 길로 나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1963년 1월까지,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 국가들이 티토 집단에게 제공한 각종 ‘원조’는 총 약 54억 6천만 달러이다. 그중에서 미국의 ‘원조’가 60% 이상을 차지하며, 약 35억 달러이다. 이들 미국 원조의 절대 대부분은 1950년 이후에 제공된 것이다.
미국 원조는 유고슬라비아 재정 경제의 버팀목이다. 공식 자료 통계에 의하면, 1961년 티토 집단이 미국과 미국이 통제하는 국제 금융 조직으로부터 얻은 차관은 모두 3억 4천 6백여만 달러로, 그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예산 수입의 47.4%에 해당한다. 만약 기타 서방 국가들의 원조금을 포함한다면, 1961년 티토 집단이 모든 서방 국가로부터 얻은 원조금은 모두 4억 9천 3백여만 달러로, 그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예산 수입의 67.6%에 해당한다.
1951년 유고슬라비아와 미국이 교환한 ‘공동 방어 원조 협정’ 관련 문건은 미국 정부 관리가 유고슬라비아 경내에서 “자유롭고 아무런 제한 없이”, 미국의 군사 원조 물자 수령과 분배 상황을 시찰·감독할 수 있으며, “교통 및 정보 편의를 충분히 획득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 협정은 또한 유고슬라비아가 반드시 미국에 전략 원자재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51년 유고슬라비아와 미국의 ‘군사 원조 협정’은 유고슬라비아가 “자유 세계의 방어 역량에 최대의 기여를 해야” 하며, 유엔에 군대를 제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미국이 협정에 따라 파견한 군사 사절단은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훈련을 직접 감독했다.
1952년 유고슬라비아와 미국의 ‘경제 협력 협정’은 유고슬라비아가 반드시 미원을 “개인의 기본적 인권, 자유 및 민주 제도를 촉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 제도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1954년, 유고슬라비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그리스 및 터키와 동맹 정치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세 나라는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서로 협력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이 통제하는 군사 집단의 성원이 되도록 만들었다.
1954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미국과 또다시 주권을 팔아넘기는 일련의 협정을 체결했다. 1957년부터 1962년까지만 해도 50개가 넘는 협정이 있었다.
이러한 조약과 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티토 집단이 유고슬라비아를 미 제국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다음과 같은 권리들을 획득했다.
(1) 유고슬라비아의 군사를 통제할 권리
(2) 유고슬라비아의 외교를 통제할 권리
(3) 유고슬라비아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
(4) 유고슬라비아의 재정과 금융을 지배·감독할 권리
(5) 유고슬라비아의 대외 무역을 통제할 권리
(6) 유고슬라비아의 전략 물자를 약탈할 권리
(7) 유고슬라비아에서 군사 및 경제 정보를 수집할 권리
유고슬라비아의 독립 주권은 이렇게 하여 티토 집단에 의해 대대적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미원을 얻기 위해, 티토 집단은 미국과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국가 주권을 팔아넘긴 것 외에도, 대내외 정책 면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서방 독점 자본이 유고슬라비아에 침투하려는 요구에 적응했다.
1950년부터 티토 집단은 대외 무역의 국가 독점제를 폐지했다.
1953년에는 「대외 무역 경영 법령」을 반포하여, 기업이 독자적으로 대외 무역을 경영하는 것과, 기업이 서방 독점 자본 기업과 직접 무역하는 것을 허용했다.
1961년, 티토 정권은 또 한 차례 외환·대외 무역 제도의 ‘개혁’을 실시했다. 이 개혁의 주요 내용은 수출입 제한을 한층 더 완화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재가공 자재와 일부 소비재의 수입에 대해서는 ‘완전 자유화’를 실시했으며, 다른 상품들에 대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수입 제한을 완화했다. 이른바 자유 수입 상품에 필요한 외화는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대외 무역의 국가 독점제가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레닌은 말했다. “공업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업 보호 없이는 결코 우리의 공업을 회복하여 러시아를 공업국으로 만들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공업 보호란 오로지 대외 무역 독점제만을 가리키며, 결코 어떠한 관세 정책도 아니다.”(《레닌 전집》 제33권, 415쪽)
스탈린은 말했다. “대외 무역 독점제는 소비에트 정부 정강(政綱)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 중 하나이다.” 대외 무역 독점제를 폐지하는 것은, “국가 공업화를 포기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들이 소비에트 시장에 넘쳐나게 하는 것”, “우리 나라를 독립 국가에서 반식민지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스탈린 전집》 제10권, 98쪽, 99쪽)
티토 정권이 대외 무역의 국가 독점제를 폐지한 것은, 제국주의의 독점 자본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티토 집단이 대량의 미원을 받아들이고 제국주의에 대문을 활짝 열어줌으로써 나타난 경제적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유고슬라비아는 제국주의의 덤핑 시장으로 전락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량의 공산품과 농산품이 유고슬라비아 시장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외국 독점 자본을 위해 봉사하여 폭리를 취한 유고슬라비아 매판 자본가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좇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고 심지어 재고가 대량으로 있는 상품까지도 끊임없이 수입했다. 1961년 7월 25일 《정치보》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고 시인했는데, 유고슬라비아 공업은 “외국 공업의 끊임없고도 매우 복잡한 경쟁의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고슬라비아는 제국주의의 투자 장소로 전락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업 기업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 국가들의 ‘원조’에 의존하여 세워졌다. 많은 외국 민간 독점 자본이 유고슬라비아에 직접 진출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 투자 은행 총재 파피치의 말에 따르면, 1952년에서 1956년까지의 기간 동안 “국외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 투자 총액의 32.5퍼센트에 달했다.” 미국 국무장관 러스크는 1962년 2월 5일, 유고슬라비아의 자금 “대부분은 서방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유고슬라비아는 제국주의의 원자재 기지로 전락했다.
1951년부터 티토 집단은 미·유고 ‘군사 원조 협정’에 근거하여, 대량의 전략 원자재를 끊임없이 미국에 공급했다. 1961년도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통계 연감》의 자료에 의하면, 1957년 이래 유고슬라비아가 수출한 마그네슘, 납, 아연, 안티몬 등 중요 광산물의 절반가량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넷째, 유고슬라비아의 공업 기업들은 서방 독점 자본 기업의 조립 작업장으로 전락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중요 공업들은 모두 서방 국가들의 라이선스에 따라, 수입된 재가공 자재, 부품, 구성 부분 및 반제품에 의존하여 생산을 진행한다. 이러한 공업 기업들의 생산은 서방 독점 자본 기업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사실,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공업 제품은 외국에서 완제품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한 다음, 자기 상표를 붙여 자기 제품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1962년 4월 25일 유고슬라비아의 《수요일 소식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우리의 몇몇 공업 부문은 특종의 상업 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립만 할 뿐이며, 자기 상표를 남의 제품에 붙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 독점 자본의 세계 시장의 한 구성 부분으로 전락한다. 유고슬라비아는 재정·경제 등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으며, 제국주의의, 특히 미 제국주의의 부용으로 전락했다.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가 자국의 독립 주권을 팔아넘기고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의 복벽을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다.
티토 집단이 떠들어대는 이른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독특한 길’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사회주의 제도를 자본주의 제도로 바꾸는 길이며, 독립국에서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미 제국주의의 부용을 두고, 흐루쇼프는 뜻밖에도 그것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참으로 허황된 이야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이 비판해 온 각양각색의 가짜 사회주의 밖에, 또 하나의 이렇게 ‘미국의 원조’ 상표를 붙인 이른바 사회주의라는 신종을 추가한 셈이다. 이것이 아마도 티토와 흐루쇼프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하나의 “위대한 공헌”일 것이다.
미 제국주의의 반혁명 별동대
티토 집단이 국제 관계에서 하는 반혁명적 역할으로 보나, 티토 집단이 실행하는 반동적인 대외 정책으로 보나, 유고슬라비아는 더더욱 사회주의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국제 무대에서 티토 집단은 미 제국주의가 세계 혁명을 파괴하는 별동대다.
티토 집단은 자본주의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복벽된 실례를 이용하여, 미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평화적 변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돕는다.
티토 집단은 사회주의 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미친 듯이 사회주의 진영을 반대하고 파괴하며, 반중국의 급선봉을 자처한다.
티토 집단은 ‘비동맹’과 ‘적극적 공존’이라는 미명하에,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민족해방운동을 파괴하며,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위해 충실히 앞잡이 노릇을 한다.
티토 집단은 미 제국주의를 극구 미화하여,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과 전쟁 정책에 반대하는 세계 인민의 투쟁을 마비시킨다.
티토 집단은 이른바 ‘스탈린주의 반대’라는 간판을 내걸고, 자기네 수정주의 독소를 곳곳에 퍼뜨리며, 각국 인민의 혁명을 반대한다.
십여 년 이래 세계에서 발생한 일련의 중대한 국제 사건 속에서, 티토 집단은 하나같이 미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다.
첫째, 그리스 혁명. 1949년 7월 10일, 티토는 그리스 인민 유격대에 대해 유고-그리스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리스의 왕당파 파시스트 군대는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통과해 그리스 인민 유격대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하여 티토 집단은 미 제국주의와 영 제국주의가 그리스 인민 혁명을 교살하는 것을 도왔다.
둘째, 조선 전쟁. 1950년 9월 6일, 당시 외무장관이던 카르델은 성명을 발표하여, 침략에 반대하는 조선 인민의 정의로운 전쟁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미 제국주의를 변호했다. 12월 1일, 티토 집단 대표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발언하며, 중국이 “조선 전쟁에 적극 간섭했다”고 공격했다. 또한 티토 집단은 유엔에서 중국과 조선을 상대로 한 ‘금수’ 조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셋째, 베트남 인민 해방 전쟁. 1954년 4월 인도차이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 회의가 열리기 직전, 티토 집단은 베트남 인민의 정의로운 투쟁을 극구 비방하며,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베트남 인민을 “자기들의 전후 냉전 정책에서 한 장의 패로” 삼는다고 중상했다. 그들은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디엔비엔푸 해방 전투를 “선의에서 나온 태도가 아니었다”고 폄훼했다.
넷째, 알바니아에 대한 전복 활동. 오랜 기간 티토 집단은 사회주의 알바니아에 대해 시종일관 전복 활동과 무장 도발 활동을 벌여 왔다. 그들은 앞뒤로 1944년, 1948년, 1956년, 1961년, 네 차례에 걸쳐 중대한 반역 사건을 조작했다. 티토 집단이 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 국경에서 벌인 무장 도발 활동은 1948년부터 1958년까지 470차례가 넘었다. 1960년, 티토 집단과 그리스 반동파는 지중해의 미국 제6함대와 더불어 알바니아에 대한 무장 침공을 공모하기도 했다.
다섯째, 헝가리 반혁명 폭동. 티토 집단은 1956년 10월 헝가리 반혁명 폭동 사건에서 간섭자이자 선동자라는 치욕스러운 역할을 했다. 반혁명 폭동이 일어난 후, 티토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여 반역자 나지의 갖은 반혁명 조치를 지지했다. 11월 3일, 티토 집단은 나지에게 남의 유고슬라비아 주재 대사관으로 피신하라고 알렸다. 11월 11일, 티토는 연설을 발표하여 반혁명 폭동이 “진보적 분자”들의 저항 운운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노선이 승리하느냐” 아니면 “스탈린주의 노선이 승리하느냐”라는 문제를 망령되게 제기했다.
여섯째, 중동 사건. 1958년, 미 제국주의가 군대를 보내 레바논을 점령하고 영 제국주의가 군대를 보내 요르단을 점령하자, 전 세계는 미영 군대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유고슬라비아 외무장관 코차 포포비치는 유엔 총회가 중동 정세를 토의하는 긴급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미국과 영국이 취한 행동에 대한 규탄을 반복하거나 찬성하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아가 미 제국주의가 조종하는 유엔이 간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곱째, 타이완 해협 사건. 1958년 가을, 중국 인민해방군은 타이완 해협에서 미 제국주의의 도발 활동을 타격하고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장제스(蔣介石) 비적 집단을 응징하기 위해 진먼(金門)에 포격을 가하였다. 티토 집단은 중국의 정의로운 투쟁을 “전 세계에 대한 위협”이며 “평화에 해롭다”고 중상하였다.
여덟째, U-2기 사건. 1960년 미국은 U-2 정찰기를 파견하여 소련을 침범하고 파리 4국 정상회담을 파탄시켰다. 티토는 5월 17일 성명을 발표하여, 당시 소련 정부가 취한 정당한 입장을 “이토록 대규모의 분규”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아홉째, 일본 인민의 반미 애국 투쟁. 1960년 6월, 일본 인민은 전례 없는 반미 애국의 정의로운 투쟁을 일으켰다. 티토 집단은 도리어 미 제국주의를 두둔하며, 미국의 일본 점령이 “일본 정치 생활의 민주화를 촉진한 바 있다”고 말하였다. 이후 티토 집단은 일본 사회당 전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稻次郎)가 “미 제국주의는 일본과 중국 두 나라 인민의 공동의 적이다”라고 말한 것을 “극단 노선을 주장”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열째, 인도네시아 인민의 투쟁. 티토 집단은 인도네시아 인민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비열한 활동을 벌여, 인도네시아에서 민족주의자, 종교계, 공산당원을 망라한 민족단결 정부, 즉 ‘나사콤’ 내각의 수립을 방해하려 획책하였다.
열한째, 콩고 사건. 1960년 여름, 미 제국주의가 유엔의 깃발을 내걸고 콩고에 무력 침략을 감행했을 때, 티토 집단은 유엔에서 미 제국주의에 찬성 투표를 했을 뿐만 아니라, 미 제국주의의 의중에 따라 공군 병력 일부를 파견하여 콩고 인민에 대한 유혈 진압에 직접 가담하였다.
열두째, 라오스 문제. 1961년 1월, 미 제국주의가 라오스에 대한 간섭을 확대했을 때, 티토 집단은 오히려 미국이 “라오스의 평화와 중립화를 진정으로 염려한다”고 선전하였다. 1963년 5월, 미 제국주의가 라오스에서 정치적 암살과 무력 충돌을 조작했을 때, 티토 집단은 또다시 라오스 애국 세력이 “모든 것을 미국 탓으로 돌린다”고 공격하였다.
열셋째, 미국의 ‘진보를 위한 동맹’ 계획. 1961년 8월, 미국은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강박하여 이른바 ‘진보를 위한 동맹’ 계획을 체결하게 하였으며, 이는 미 제국주의가 라틴아메리카 인민을 예속시키기 위한 새로운 도구였다. 이 침략 계획은 라틴아메리카 인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티토 집단은 그것이 “상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띄워 주었다.
열넷째, 중-인도 국경 분쟁. 인도 반동파가 1959년 중-인도 국경에 긴장 사태를 조성한 이래, 티토 집단은 중국에 대한 인도 반동파의 팽창·침략·도발 활동을 일관되게 지지해 왔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획정 작업은 금세기 초에 주지의 맥마흔 라인의 형태로 완료되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있는 힘을 다해 흑백을 전도시켜, 중국이 “제멋대로 무력을 사용하여 인도와의 국경을 변경”하고 인도를 “침략”한다고 중상하였다.
열다섯째, 쿠바 혁명과 카리브해 위기. 티토 집단은 대량의 논평을 발표하여, 쿠바가 “단지 혁명을 믿을 뿐”이라며 공격하였고, 쿠바 혁명이 “전범이라기보다는 혁명적 길의 예외에 가깝다”느니 하였다. 1962년 가을 카리브해 위기 동안, 티토 집단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 행동을 두둔하며 “어려움은 쿠바 혁명이 미국 기업들의 아픈 곳을 찔렀기 때문에 시작되었다”느니, “미국이 쿠바라는 가까운 이웃에 로켓 기지가 설치된 데에 격노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느니 하였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십수 년 이래 티토 집단이 어떻게 광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을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파괴하며, 각국 인민의 반제 혁명 투쟁을 헐뜯고, 제국주의, 특히 미 제국주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해 왔는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흐루쇼프는 입버릇처럼,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국제 문제에서 티토 집단과 입장이 “부합”하며 “일치”한다고 말한다. 좋다, 우리는 묻겠다: 티토 집단이 저지른 일련의 반혁명적인 죄악적 행위가 과연 당신들의 행실과 부합하는가, 일치하는가? 만약 용기가 있다면, 대답해 보기 바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부르주아 독재로의 변질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의 범람, 유고슬라비아의 전인민적 소유 경제의 국가자본주의 경제로의 변질, 유고슬라비아가 미 제국주의의 부용으로 전락한 것은, 결국 유고슬라비아 당과 정권의 성격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유고슬라비아 인민은 독일·이탈리아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용감한 투쟁을 벌여,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반동 통치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민민주 정권을 수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 집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길로 나아갔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당과 국가 정권을 점차 변질, 변색시켰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영광스러운 혁명 투쟁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티토 집단의 변절은 우선 당내에서 강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티토 집단은 자신이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당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성하는 대량의 공산당원들을 배척하고 숙청하였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의 기간에만 20여만 명의 당원을 제적했는데, 이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기존 당원 총수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들은 “코민포름 분자”라는 죄명으로 유고슬라비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혁명 간부, 혁명 인민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살해했으며, 체포·구금된 공산당원과 혁명 적극분자는 그 수가 3만 명 이상에 달했다. 이와 동시에 티토 집단은 반혁명분자, 부르주아 분자, 각양각색의 반사회주의 분자, 그리고 당증을 믿고 출세와 치부를 꾀하는 투기분자들에게 편의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1952년 11월, 티토 집단은 “당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명칭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변경했다. 티토 집단은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정직한 공산당원들의 의사에 위배하여,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선봉대적 성격을 변경했고,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을 사실상 티토 집단의 독재 통치를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정권이 공산주의 정당에 의해 영도된다. 공산주의 정당이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질되면, 정권의 성질도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부르주아 독재로 변질된다.
유고슬라비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유고슬라비아 인민이 오랫동안 영용하게 투쟁하여 얻은 결과이다. 그러나 티토 집단이 변절한 이후, 이 정권의 성질은 변했다.
티토 집단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독재, 즉 사회주의 국가 제도라는 수단은 점점 더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독재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말로 없어졌고, 부르주아 독재는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야만적인 파시스트 독재이다.
티토 정권은 많은 파시스트식 감옥과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각종 참인한 형벌을 사용하여 수천수만의 혁명자를 고문해 죽였다. 이와 동시에 티토 정권은 반혁명분자와 반파시스트 전쟁 시기의 매국노를 대대적으로 사면했다. 1951년 1월 7일, 티토는 UPI 기자와의 문답에서 유고슬라비아가 1만 1천 명의 정치범을 사면했다고 말했다. 1962년 3월 13일에는 국외로 망명한 반혁명분자 15만 명을 또 사면했다. 이러한 인민의 적에 대한 독재는 확실히 취소되었고, 이 사람들은 오히려 “민주”를 얻었다. 티토 집단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민주”는 소수의 신·구 부르주아 분자 내부의 민주일 뿐이며, 광범위한 근로 인민에게는 철두철미한 독재이다. 티토 집단은 유고슬라비아에 한때 수립되었던, 소수 착취계급을 진압하는 혁명적 국가 기구를, 프롤레타리아트와 광대한 근로 인민을 진압하는 국가 기구로 바꾸어버렸다.
유고슬라비아 국가 정권의 변질은, 폭력을 통해 기존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전환”의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것이 여전히 티토 집단 무리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사람들은 이미 노동자·농민 및 모든 근로자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으며, 제국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신·구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한다.
티토 집단은 국가 정권을 이용하여 국가 경제의 명맥을 장악하고, 유고슬라비아 근로 인민을 극대한도로 착취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 하나의 관료 부르주아지를 형성했다. 이 관료 부르주아지는 미 제국주의에 부착하여 농후한 매판성을 지니며, 또한 매판 부르주아지이기도 하다. 티토 집단이 장악한 정권은 바로 이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 독재의 정권이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일련의 사실들은, 모든 측면에서 티토 정권이 실행하는 정책이 자본주의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정책, 즉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반식민지 혹은 부속국으로 만드는 정책임을 설명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정권 성질의 변질은 사회주의 경제 제도의 파괴, 자본주의 경제 제도의 복벽을 초래했다. 자본주의 경제 제도가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수립되고, 신형의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가 점차 형성된 후, 그들은 부르주아 독재를 한층 더 강화하고, 자본주의 경제 제도에 적응하는 정치 제도를 한층 더 발전시켜 자신들의 통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요구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당과 정권의 변질로부터 전체 사회 경제 제도의 자본주의 복벽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실현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변질 과정은 이미 15년이나 된다. 이것은 한 사회주의 국가가 어떻게 “평화적 전환”하여 자본주의 국가가 되는가에 관한 역사이다.
티토 집단은 미 제국주의의 지지에 의지하고, 관료 매판 부르주아지 독재의 국가 기구에 의지하고, 매수한 일단의 노동 귀족에 의지하고, 농촌의 부농에 의지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의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또한 갖가지 기만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반동적 정체를 가리고 인민대중을 우매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반동적 정책은 극히 민심을 잃은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변질되고, 독립국에서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혹은 부속국으로 전락하는 것, 이는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근본 이익을 위배하는 것이며,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정직한 공산당원과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이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들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가진다. 비록 티토 집단이 한동안 횡포를 부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믿는다. 인민과 적이 된 어떤 통치 집단이든, 어떤 고압 수단을 쓰든, 어떤 기만 술책을 부리든, 결코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하리라는 것을. 티토 집단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가려진 사람들은 마침내 차츰 깨어날 것이다.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유고슬라비아 인민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들이, 결코 영원히 티토 배반자 집단의 손아귀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앞날은 밝다.
중국공산당의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대한 원칙적 입장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어느 시기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제도의 성격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 지금 중국 지도자들이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급격히 바꾸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유고슬라비아는 일찍이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 나라는 확실히 한때 사회주의 길을 따라 발전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티토 집단의 배반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의 사회 제도는 한 걸음 한 걸음 변질 타락해갔다.
1954년, 흐루쇼프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제의했을 때, 우리는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길로 되돌아오도록 쟁취하고 아울러 티토 집단을 더 관찰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 대우하는 데 동의했다.
바로 그때조차도, 우리는 티토 집단에 대해 지나친 희망을 품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4년 6월 10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이미 꽤 멀리 나갔으며, 그들이 쟁취를 거부하고 사회주의 길로 되돌아오기를 거부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설령 그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평화·민주·사회주의 진영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아무런 손해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유고슬라비아 인민과 전 세계 인민 앞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의 위선적 면모가 더 폭로될 것이다.”
우리의 불행한 적중이었다! 티토 집단은 과연 우리의 쟁취를 완전히 거부했고, 수정주의 길을 따라 갈수록 더 멀리 나갔다.
티토 집단은 1957년 선언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뒤, 1958년에 철두철미한 수정주의 강령을 내놓았고, 현대수정주의의 깃발을 높이 세워 각국 공산당과 노동자당이 공인한 공동 강령인 1957년 선언에 맞섰다. 국내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미 한 걸음 한 걸음 자본주의 복벽 과정을 완수했다. 국제적으로, 티토 집단은 갈수록 더 열심히 미 제국주의의 반혁명 특별 행동대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 티토 집단을 대하는 것은, 형제당·형제국가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을 쟁취하는 문제가 아니며, 이 배반자 집단을 단호하고 철저하게 폭로하고 투쟁하는 문제이다. 이 점은 1960년 성명에서 이미 명확히 논단되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서한은, 1957년 11월 형제당 회의 이후의 일련의 중요한 사실들을 일부러 회피하고, 1960년 형제당 회의가 내린 일치된 결론을 회피하면서, 1957년 9월 12일 《인민일보》 사설에서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언급한 한 마디를 인용하여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잘못된 입장을 변호한다. 이는 완전히 헛심을 쓰는 짓이다.
사실이 증명하듯, 티토 집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실제 정황에 부합하고, 원칙적이며, 1960년 형제당 회의의 공동 합의에 부합한다. 그런데도 소련공산당 지도자가 백방으로 티토 집단의 전례를 뒤집으려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1960년 성명을 팽개쳤으며,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을 도우면서 유고슬라비아와 전 세계 인민을 기만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티토가 ‘잘못을 말소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흐루쇼프가 티토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인가?
흐루쇼프는,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이 아주 많은 잘못을 말소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티토 집단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더더욱 무엇을 말소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티토 집단은 말한다. 그들이 잘못을 고치는 것은 “필요 없고”, “시간 낭비일 뿐”, “이것은 순전히 쓸데없고 우스운 일”이라고.
사실은 도대체 어떤가? 티토 집단은 수정주의 강령을 바꾸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1957년 선언과 1960년 성명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국내적·국제적 수정주의 정책을 바꾸었는가? 역시 아니다.
196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가 통과시킨 신헌법은, 티토 집단이 자신들의 수정주의 입장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헌법은 티토 집단의 철두철미한 수정주의 강령을 법률의 형식으로 한 걸음 더 확정한 것이다. 카르델은 신헌법 초안에 관한 보고에서, 신헌법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강령의 개념을 “정치 법률 및 조직 면에서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흐루쇼프가 티토 집단과 형제처럼 친하고 불같이 가깝게 지내는 것은, 티토 집단이 무슨 잘못을 고쳤기 때문이 아니라, 흐루쇼프가 티토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첫째, 티토가 스탈린을 반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전면 부정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둘째, 티토와 흐루쇼프는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고, 모두 중국공산당원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하는 다른 공산당원들을 “교조주의자”라고 공격하며,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자신의 왜곡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이라고 말한다.
셋째, 티토와 흐루쇼프는 모두 미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를 떠받들어 찬양했다. 티토는 아이젠하워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며, 케네디의 노력이 “국제 관계를 개선하고 세계의 절박한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흐루쇼프 역시 아이젠하워가 “진심으로 평화를 바란다”고 말했고, 케네디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넷째, 티토와 흐루쇼프는 모두 핵전쟁의 공포를 극도로 과장하여, 세계 인민을 위협하여 혁명 투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티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은 “인류의 멸망”이라고 말했다. 흐루쇼프 역시 핵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의 노아의 방주인 지구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섯째, 티토와 흐루쇼프는 모두, 제국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조건에서 이른바 무기 없는 세계, 군대 없는 세계, 전쟁 없는 세계가 실현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여섯째, 티토는 “적극적 평화공존”이 유고슬라비아 대외정책의 “기초”라고 선전했다. 흐루쇼프는 “평화공존”이 소련 “대외정책의 총노선”이라고 주장했다.
일곱째, 티토와 흐루쇼프는 모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가능성이 커졌다고 선전했다. 티토 집단은 “인류가 여러 경로를 통해 거부할 수 없이 사회주의 시대로 깊이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흐루쇼프는 “의회의 길”로 10월 혁명의 길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덟째, 티토는 “평화경쟁”을 통해 세계의 “정치적 통합과 경제적 통합”을 실현하자고 선전했다. 흐루쇼프 역시 “평화적 경제 경쟁”을 통해 제국주의와의 “전면적 협력”을 실현하자고 선전했다.
아홉째, 티토 집단은 각 방면에서 민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전쟁을 파괴한다. 흐루쇼프는 “어느 작은 ‘국지전’도 세계대전의 화재를 일으키는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구실로 민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전쟁을 반대한다.
열째, 티토 집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지한다. 흐루쇼프 역시 “전인민국가”라는 구호 아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지한다.
열한째, 티토 집단은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선봉대임을 부인한다.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이 이미 “전체 인민의 당이 되었다”고 말한다.
열두째, 티토는 “비동맹”을 내세우며 사회주의 진영을 반대한다. 흐루쇼프 역시 “진영 같은 것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 진영을 없애려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사람들은 오직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흐루쇼프는 대외정책이든 국내정책이든 실제로 티토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수정주의의 길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저버리고 1960년 성명을 찢어버리며 배신자 티토 집단과 같이 더러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소련의 이익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며 소련 인민과 전 세계 인민의 이익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을 지닌 위대한 소련 인민과, 대다수의 소련공산당 당원과 각급 간부들은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소련공산당 당원은, 흐루쇼프가 티토 집단과 결탁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견지하는 형제당들을 반대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소련공산당 당원은, 흐루쇼프가 티토 집단과 결탁하여 제국주의와 연합하고 사회주의인 중국, 알바니아 등 형제국가들을 반대하며 사회주의 진영을 파괴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소련공산당 당원은, 흐루쇼프가 티토 집단과 결탁하여 각국 반동파와 연합하고 각국 인민을 반대하며 혁명을 반대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소련공산당 당원은, 흐루쇼프가 유고슬라비아 수정주의라는 본보기를 따라 당과 국가의 성격을 바꾸어 자본주의 복벽의 길을 여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쇼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하늘에 검은 구름을 몰고 왔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의 역사에서, 소련의 역사에서 이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기만당하고 눈이 가려진 사람들도 결국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가 이미 증명했고 또 계속 증명할 것이다. 누구든 소련 인민이 나아가는 방향을 돌리려 하는 것은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자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간결한 맺음말
자본주의의 유고슬라비아 복벽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새로운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이는 노동계급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길 사이의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지의 투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고슬라비아는 바로 자본주의 복벽의 전형을 제공했다.
이는 노동계급의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을 때에도 노동귀족에게 장악되어 부르주아지 정당으로 변질되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들에게 장악되어 부르주아지 정당으로 변질되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은 바로 이러한 변질의 전형을 제공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복벽이 반드시 반혁명 쿠데타를 통해서만, 또는 제국주의의 무력 침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지도부 집단의 변질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새는 내부로부터 가장 쉽게 탈취되는 법이다. 유고슬라비아는 바로 그러한 전형을 제공했다.
이는 수정주의가 제국주의 정책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구수정주의는 일찍이 제국주의가 노동귀족을 매수하고 부추기는 정책의 산물이었다. 현대수정주의도 그렇게 생겨났다. 지금 제국주의는 이 매수 규모를 확대하여 비용을 아끼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부 집단을 매수하고, 그들을 통해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적 변질’ 정책을 실현하려 한다. 미 제국주의가 유고슬라비아를 ‘앞장서는 양’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유고슬라비아가 이 방면에서 하나의 전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복벽한 것은 전 세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일이 왜 필요하고 절박한지를 사람들이 더욱 똑똑히 인식하게 해줄 수 있다.
보아하니 세계에 제국주의가 아직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을 이미 제거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자기네 쪽에서는 이미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을 제거했고, 이미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댄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물론 기쁜 일이겠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여러 면에서 유고슬라비아라는 본보기를 배우고 있으며, 이미 아주 위험한 길에 들어섰다. 이는 우리를 몹시 우려하게 하며, 또한 우리를 몹시 가슴 아프게 한다.
우리는 위대한 소련과 위대한 소련공산당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여전히 소련공산당 지도부에게 진심으로 호소하고자 한다: 동지들, 친구들, 유고슬라비아의 길은 결코 걸어선 안 되는 길이오! 어서 돌아서시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소.
주
일, 토도로비치: 「두 전선에서의 투쟁」. 유고슬라비아 《나샤 스트바르노스트》 잡지, 1954년 3월호 참조.
이, 1961년 12월 8일 유고슬라비아 《수요일 전령》. 750디나르가 1달러이며, 303디나르는 약 1위안에 해당한다.
삼, 1961년 12월 6일 유고슬라비아 《수요일 전령》.
사, 카르델: 1959년 5월 5일 유고슬라비아 노동인민사회주의동맹 제4기 9중전회 개막사.
오, 바카리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제6차 대표대회 연설.
육, 카르델: 「우리나라 농촌정책의 몇 가지 문제」. 유고슬라비아 《코무니스트》 잡지, 1954년 제4호 참조.
칠, 코마르: 「농촌과 농가의 몇 가지 문제」. 유고슬라비아 《소치얄리잠》 잡지, 1962년 제5호 참조. 유고슬라비아 농림비서는 농림부 장관에 해당한다.
팔, 유고슬라비아 《인덱스》 잡지, 1962년 제2호.
구, 코마르: 「농촌과 농가의 몇 가지 문제」.
십, 1958년 2월 17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이 각급 조직과 지도부에 보낸 공개서한.
십일, 바카리치: 1959년 4월 7일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동맹 제4차 대표대회 보고.
십이, 파피치: 「유고슬라비아의 투자 재원」. 《집단경제연감》, 1959년 4—11월호, 베오그라드 인행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