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나우티쿠스』 — 차스트로와 경건파·교황지상주의·자유사상 진영의 우르닝
인물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슈바이처,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페르디난트 라살레, 요하네스 뢰징,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용어독일 형법 제175조 사건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아르고나우티쿠스』
차스트로와 경건파·교황지상주의·자유사상 진영의 우르닝
피의 갈망과 책임 능력에 관한 논의, 우르닝 세계에서 온 짧은 소식, 그리고 형사 사건들 — 에든버러의 모렐 주교, 포젠의 차르네츠키 백작, 빈의 포르스트너 감독 — 을 덧붙여
누마 누만티우스: 제9권
지은이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재야 학자, 전 하노버 왕국 관구 배석 판사.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학술상에 값한다고 인정받은 논문 『de foro reconventionis』(반소의 재판적에 관하여)와 『de pace Westphalica』(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 관하여), 그리고 우르닝 사랑에 관한 저작 『인클루사』, 『포르마트릭스』, 『글라디우스 푸렌스』, 『멤논』의 저자.
라이프치히
A. 제르베 출판사
1869년
머리말
머리말 1. 나는 이 책을 학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의 말로서 펴낸다. 이 책의 대상에 거슬려하는 사람은, 여기서 다루는 것이 참으로 진지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 하나 남김없이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주관적 혐오 때문에 학문적 문제의 검토에서 물러나는 사람은 그것만으로(eo ipso) 의학자, 법학자, 또는 그 밖에 학문의 일꾼을 자처할 권리를 잃는다.
머리말 2. 타고난 본성에 따라 성애의 끌림으로 오로지 남성 개인에게만 끌리는 남자들을 나는 우르닝이라 부르고, 그들의 사랑을 우르닝의 사랑이라 부르며, 이 현상 전체를 우라니즘이라 부른다. 우르닝은 자연의 수수께끼다. 그는 몸의 생김새로만 남자일 뿐, 사랑의 충동으로는 남자가 아니다. 그의 사랑의 충동은 오히려 여성적 존재의 그것이다.
성인 우르닝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의 독일 전체 | 약 | 25,000명 |
| 오스트리아헝가리 | 약 | 25,000~28,000명 |
| 프로이센 | 약 | 10,000~12,000명 |
| 빈 | 약 | 1,000명 |
| 베를린 | 약 | 600~900명 |
독일에서는 성인 남자 약 500명, 곧 전체 인구 약 2,000명 가운데 평균 1명꼴로 성인 우르닝이 있다. 따라서 인구 10만 명의 도시에는 평균 50명이 있다.
*아직 충분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더 최근의 관찰에 따르면, 이 수치는 실제에 훨씬 못 미친다. 거의 두 배로 잡아도 될 것이다.
* 머리말 3. 『아르고나우티쿠스』는 『인쿠부스』를 늘린 제2판이다. 늘어난 절과 덧붙인 대목에는 *를 달았다.
I. 차스트로 사건 서론
제1절. 48세의 퇴역 중위 카를 에른스트 폰 차스트로가 1869년 1월 17일부터 베를린에서 혐의를 받고 있는 그 행위는 참으로 악마 같은 짓이다. (계간(鷄姦), 신체 훼손, 살해 미수와 살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 두 명에게 저지른 것이다. 아래 제26절.) 그 행위를 감싸는 것이 내 의도일 수는 없다. 이 책은 변호서가 아니다. 다만 나는 요구한다. 다른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그에게도 온전히, 깎임 없이 주어져야 한다. 그가 우르닝이라는 이유로, 설령 계간자라 하더라도, 그 권리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법치 국가에서는 범죄로 기소된 계간자라 해도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제2절. *이런 대상을 건드려야 하는 나의 과제는 참으로 보람 없는 일이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가 옹호하는 대의의 적들에게 차스트로 사건은 굴러 들어온 먹잇감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사건을 가지고 우르닝 본성의 정당성을 공격할 밑천으로 삼느라 몹시 분주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 본성을, 물려받은 무지의 권위적 판결은 지금까지 반자연이라는 낙인을 찍어 왔다. 그들의 수작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지금까지 우르닝을 상대로 한 가장 중요한 형사 소송들이 진행되는 동안 우르닝 쪽에서 한마디라도 거든 적은 없었다. 그들은 자연의 끌림을 따랐다는 이유로 금고형, 징역형, 중금고형, 명예 상실형, 그 밖에 온갖 소름 끼치는 이름의 형벌을 선고받았다. 몇몇은 쇠창살 뒤에서 시들어 죽었다. 다른 이들은 치욕을 피하려고 체포되는 순간 독을 먹거나 제 목을 그었다. 우르닝들은 우르닝에게 닥친 이 모든 일을 말없이 겪어 넘겼다. 여론의 공포 정치에 겁을 먹고 숨을 곳에 숨어서, 절망하여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도 죄스러울 만큼 비겁하게 그 연극이 펼쳐지는 것을 구경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명을 해 줄 수 있었다. 아마 판사조차, 그 시절에도 입법자는 아마 틀림없이, 학문은 어떻든 고마워했을 해명을. 우르닝 사랑을 반자연으로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우르닝 한 사람이 맹목적인 분노의 먹이가 될 위험에 처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깨우쳐 주고 항의하고 멈추라고 외치며 소리 높여 함께 말하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바로 극악한 사건에서는 침묵이 더욱 위험하다. 나로서는 그 공포 정치가 겁주는 유령에 지나지 않으며 이 수치스러운 시대가 극복되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갔음을 증명한다.
제3절. 사실 문제, 곧 “폰 차스트로가 범인이었는가?”는 통상의 증거 방법으로 답할 수 있는 한에서는 검토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폰 차스트로가 만일 정말로 범인이었다면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만 검토한다. 그 대신 사실 문제에 대해서는 자연 과학의 관점에서 내놓을 수 있는 예비적 답이 하나 있다(제66절).
또 그런 잔혹 행위를 저지르는 자를 경찰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하는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검토하지 않는다. 내가 다루는 것은 오로지 법정의 절차, 곧 “처벌할 것인가, 처벌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뿐이다.
제4절. 폰 차스트로의 성적 본성이 내가 『멤논』에서 묘사한 우르닝의 성적 본성과 같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베를린 신문들은 그의 “여성에 대한 무뚝뚝함”과 그가 “늘 여자들을 멀리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모든 우르닝이 타고나는, 여성에 대한 그 혐오의 증상이다.
“그의 얼굴 표정의 부드러움”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멤논』 제92절과 맞아떨어진다.
그의 “그림자 같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는 거동”과 “불안정하고 섬뜩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이는 악의적으로 묘사되었을 뿐, 부드럽고 반쯤 여성적인 기질로서, 겪은 굴욕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쫓기는 짐승처럼 새로운 모욕을 겁내며 피해 다니는 것이다.
그가 종교 음악과 경건 서적을 좋아한 것은 대부분의 우르닝에게 고유한 부드러운 정서에 걸맞다. 거기서 위선의 냄새를 맡을 근거는 없다. 우르닝은 거의 언제나 외톨이로 지낸다. 반쯤 여성적인 성정을 타고난 탓에, 젊음이 달아나고 나면 홀로 늙어 가는 노처녀의 버릇을 닮은 특이한 버릇이 그에게 흔히 들러붙는다. 노처녀처럼 그는 의지할 곳과 위안이 필요하다. 노처녀처럼 그는 그 둘을 즐겨 종교에서 찾는다. 깊이 사무치는 모욕을 겪은 뒤라면 더욱 그렇다. 노처녀처럼 그의 마음은 억지로 떠맡은 성적 단념에서 오는 남모를 고통을 달래 줄 것을 즐겨 종교에서 붙잡으려 한다. 여성적인 마음에서는 신앙심이 격렬한 사랑의 갈구, 아니 끝없는 관능과 나란히 머무는 일이 흔하다. 바로 우르닝 가운데서 나는 그런 예를 알고 있다. 사랑의 갈구가 종교적 열광이나 경건 수련으로 뿌리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동시에, 베를린의 김나지움 교사 프로이스 박사의 열광적인 “경건함”을 얼마 전 그토록 반가운 조롱거리로 삼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가 자기 김나지움의 아름다운 젊은 최상급반 학생들을 남달리 몹시 사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말이다.
물론 경건함을 꾸며 내는 현대의 기술을 모르는 것이 우르닝뿐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5절. 나는 폰 차스트로와 관계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다.
1867년 4월 24일 프로이센의 장군 폰 포이크츠레츠가 내가 공공연히 밝힌 정치적 법률관을 이유로 재판도 없이 나를 두 번째로 국사범으로 만들어 민덴 요새로 끌고 가게 했을 때, 동시에(『멤논』 제2부 XXXIII쪽 참조) 하노버 근교 부르크도르프의 내 집에서 내 서류가 모조리 경찰에 의해 실려 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내게 들어온 런던, 파리, 이탈리아, 베를린 우르닝들의 명단도 있었다. 베를린 명단에는 일부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약 150명의 이름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 폰 차스트로라는 이름도 있었다.
베를린의 《뵈르젠차이퉁》은 2월 20일 자에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의 남성 사랑을 드러내 놓고, 또 즐겨 고백한다. 이 사랑은 전 하노버 왕국 관구 배석 판사 울리히스의 자주 언급되는 저작들에서 신체 기관의 원인과 정신적 조건으로 소급된다. 그는 이 저작들의 내용을 완전히 제 것으로 삼았다. 이 저작들, 특히 『멤논』은 그의 서재에서도 발견되었다.” 남성 사랑을 이렇게 드러내 놓고 고백한 것은 나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프리드리히슈타트의 한 카페에서 프로이스 박사를 편들어 공공연히 나섰던, 참으로 대담한 그의 행동도 마찬가지다(《트리뷔네》가 이 일을 전한다). 그때 그는 “거칠게 말을 끊겼다.”(당연하다! 지금까지의 체제 아래서 거기서 무례함 말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트리뷔네》는 이렇게 쓴다. “그는 결코 더러운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몇 해 전 베를린에서 우르닝인 한 젊은 장교가, 여느 우르닝들이 흔히 하는 것보다 더 대담하고 떳떳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다른 장교들에게 사임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을 꾸며 내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들 앞에서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정당하다고 끈질기게 변호했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은 그의 설명에, 더는 그와 함께 복무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대답했다. 대단한 영웅적 행위다! 그것으로 그는 반박된 셈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1865년이다. 그때 내게 폰 차스트로라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면 내가 크게 잘못 기억하는 것이리라.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친척 한 사람, 곧 베스트팔렌 군관구 사령관 폰 차스트로 각하가, 사람들이 나를 가두어 둔 민덴의 장교 영창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정치적 취지의 꽤 퉁명스러운, 아니 위협적인 훈시를 베풀어 주었는데, 거기에 “당신은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군요”라는 큰 친절을 섞어 넣었다. 그 전까지 내 매일의 산책에는 하사관 한 사람만 따라다녔다. 그는 여기에 병사 하나를 더 붙였다. 총검을 꽂은 총과 실탄 세 발로 무장한 병사였다.
제6절. 《뵈르젠차이퉁》 3월 5일 자는 내가 서명한 다음 성명을 실었다.
“… 사람들은 감히 내 저작들이 폰 차스트로가 기소된 것과 같은 범죄를 미화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넌지시 비쳤다. 또 우르닝 사랑이 그 자체로 그런 범죄로 이끌기 쉽다는 두려움도 나타났다. 그런 범죄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혐오한다. 우르닝 사랑은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똑같은 정도로 타고난 것이며, 그 본성상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범죄로 이끌지 않는다. 그와 비슷한 범죄는 본래적 남성들의 사랑에서도 일어난다.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든, 책임 능력이 장애된 상태에서든 말이다.”
II. 경건파·교황지상주의·자유사상 진영의 우르닝
제7절. 나는 프로이스 박사에게 쏟아진 독설과, 바로 그의 경건함이 조롱에 얼마나 반가운 재료였는지를 언급했다.
대체로, 정당들이 상대 당의 대열에 불쑥 우르닝 하나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상대 당을 창으로 꿰고 단검으로 찌르는 꼴을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크로이츠차이퉁》과 《북독일 알게마이네》는 나에게서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을 때 “벨프 왕가파”를 얼마나 헐뜯었던가. 나에게, 곧 독일인이 독일인을 상대로 저지른 하노버 병합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 행위로 보는 나에게서 말이다. 두 번째로 민덴에 끌려갔을 때, 프로이센 경찰은 앞서 말한 내 서류들 가운데서 우르닝 사랑에 관한 엄청난 양의 메모, 원고, 편지 따위를 찾아냈다. *그것들을 나는 오늘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1867년 4월부터 1869년 9월까지! 그런데 이제 바로 그 두 신문의 동아리에서 경건한 프로이스가 갑자기 우르닝으로 정체를 드러내자, 자유주의 신문들이 얼마나 헐뜯는가!
*나의 정치적 입장을 언급하는 것은 일부러 하는 일이다. 프로이센에서 나는 그 입장 때문에 persona ingratissima(가장 달갑지 않은 인물)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나의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내가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내놓았음이 증명될 것이다.
*1869년 1월 말, 쾨젠(프로이센) 근교 슈필베르크의 62세 교사 차이들러가 체포되었다. 《나치오날차이퉁》에 따르면 얼마 전 프로이스 박사를 면직시킨 바로 그 “풍속에 반하는 범죄” 때문이었다. 그 역시 예전에 “봉건당의 총아”였다. 그는 3월에 나움부르크에서 징역 2년 반을 선고받았다.
우르닝으로 “정체가 폭로된” 민덴의 경건파 상인도 여기에 속한다. 자유주의 신문들은 그의 체포와 유죄 판결(1868년 2월 11일)을 몹시 고소해했다. 『멤논』 109쪽.
자유주의 신문 《프랑크푸르터 저널》은 여러 해 전부터 “교황지상주의” 성직자들 가운데 우르닝 하나가 “정체를 드러낼” 때마다 그것을 가톨릭을 공격하는 밑천으로 삼아 왔다. 1864년 티롤의 호퍼 신부 때가 그랬고(『멤논』 제135절), 또 1862년 리에주의 한 신부 때도 그랬다. 그 신부는 밤에 보초를 서던 병사가 자기에게 건네려던 애무에 “도덕적 분노에 차서” 붙잡았고, 그 뒤 마스트리흐트로 달아났다. 거꾸로 쾰른의 교황지상주의 신문 《라이니셰 폴크스할레》는 1850년, “종교 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자유주의적인 나사우의 한 학교 교사가 우르닝적 성향을 지녔음이 드러났을 때 똑같이 굴었다.
제8절. 널리 알려졌듯이,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라살레파인 베를린의 폰 슈바이처 박사는 1862년 9월 5일 만하임 구 법원에서 경범죄 처벌을 받았다(『인클루사』 35쪽 참조). 만하임 궁정 정원에서 한 젊은이와 하찮은 장난을 치다가 부주의로 “공연한 풍기 문란”을 일으켰다는 것, 곧 호기심 많은 나이 든 처녀 둘에게 엿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일로 그의 적들은 얼마나 신이 나서 그에게 화살을 쏘아 댔던가! 1867년 9월 7일 엘버펠트바르멘의 민주파 유권자들이 그 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회 의원으로 뽑을 만큼(9,000표 대 6,800표) 성숙함을 보이자, 비스마르크 편에 선 부르주아지의 풍자 신문 《클라데라다치》는 1867년 10월 13일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민주주의란 말인가?
저런 자가 인민 권리의 대변자란 말인가?
살아생전 나는 그토록 붉었던 적이 없다,
그 일로 무덤 속에서 붉어졌던 만큼은!
그런데 폰 슈바이처가 비스마르크의 숨은 지지자로 통하는 지금, 《클라데라다치》는 그에게 양처럼 얌전하다. 그 대신 이제 비스마르크에 적대적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1869년 2월 21일 자)에서 다음과 같은 오자 정정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치히, 2월 18일 …
나는 폰 슈바이처의 작센 선동원들을 ‘볼품없는’(formlose) 녀석들이라고 하지 않고 ‘악의 없는’(harmlose) 녀석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볼품’(Formen)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 폰 슈바이처 씨가 아니지 않은가!”
이 일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목소리들이 매번 《클라데라다치》의 얼굴을 앞세우고 순진무구하게 덕스러운 눈을 치켜뜨는데, 그 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 우리 당이 여기 이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제9절. 언론이 다른 이들보다 교황지상주의적이거나 “경건한” 또는 보수적인 우르닝을 더 많이 고발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띌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사상 정당은 1850년 《라이니셰 폴크스할레》가 나사우에서 그토록 운 좋게 찾아낸 그 교사 말고는 그 품 안에 우르닝을 하나도 품고 있지 않단 말인가? 사람들은 저쪽 편이 더 많은 “폭로꾼”의 감시를 받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민족자유주의 신문과 진짜 자유주의 신문의 통신원들은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다. 누가 그들에게 제 살붙이를 고발하라고 요구할 만큼 잔인하겠는가?
추기. 제 안에 우르닝을 품은 자유주의 정당에는 1848~1850년 브레멘 민주파도 있었다. 그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명망 있는 오랜 도시 귀족 가문 출신인 요하네스 뢰징이었는데, 그는 당시 우르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10절. 아니, 그렇지 않다. 저울의 바늘은 흔들린다. 교황지상주의자들도 앙갚음할 수 있다. 1869년 2월 21일 저녁 빈에서 제11포병 연대의 포병 안톤 포겔이 한 신사를 경찰에 끌고 와서, 이 사람이 방금 8시 15분에 시립 공원에서 자기에게 말을 걸며 부도덕한 행위를 하자고 꾀었고, 그래서 자기가 곧바로 그를 억지로 경찰서까지 데려왔다고 신고했다. 그 신사는 머뭇거리다 신분을 밝혔다. (빈의 《프레세》 2월 24일 자.) 이번에도 “종교 개혁”의 사람, 떠들썩하게 가톨릭 교회를 떠났던 사람, 겨우 스물다섯 살인 빈 “유니테리언”의 감독 카를 포르스트너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고 성경에 “역사적 가치”를 두는 교파다.) 그는 풀려났지만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고발자가 우르닝을 고발하려고 음흉하게 덫을 놓은 것은 아닐까? 바로 그쪽에서 도발한 것은 아닐까? 베를린의 《추쿤프트》는 이렇게 썼다. “프로이스, 차스트로 일당의 본보기가 오스트리아에 불을 붙이는 모양이다. 유니테리언 감독이 – – 포병 한 명에게 사랑을 고백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빈의 《키케리키》는 곧바로 이 사건에 달려들었다. 3월 11일 자에는 그림이 실렸다. 장면은 시립 공원, 벤치 하나. 그 오른쪽에는 포병 하나, 왼쪽에는 목에 성직자의 표장을 단 신사 하나가 허둥지둥 달아나고 있다. 그 신사가 외친다. “저기 저 포병이 나랑 부도덕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건 들을 수가 없다.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벌써 두 번째다!”
제11절. 《키케리키》는 차라리 “털이꾼” 사기단도 한번 그려 보는 것이 좋겠다. 이들은 아직도 폐지되지 않은 낡은 형법전의 비호를 받으며, 비열하게 거짓 사랑을 미끼로 우르닝들을 갈취하려고 바로 빈 시립 공원을 제 구역으로 골라 잡았다. 그런데 1868년 2월 3일 빈 지방 법원은 웨이터 요제프 발리에게 갈취죄로 중금고 8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시립 공원에서 바로 이 포르스트너에게 20굴덴을 내지 않으면 부도덕한 폭행으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그때 포르스트너의 요청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공판에서 그는 자기 동료 하나가 이미 여러 번, 특히 젊은 성직자들을 상대로 그런 시도를 해서 재미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프레세》 1869년 2월 24일 자. 빈의 《타크블라트》 1868년 2월 4일 자.)
[덧붙여 말하자면, 빈에서 털이꾼 한 명에게 취한 이 단호한 조치는 — 그 곁에는 다른 사례들도 있다 — 베를린의 이중적인 처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한 우르닝이 웨이터 한 명과 연애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연인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갔을 때, 사랑받는 쪽은 제삼자 하나를 장롱 속에서 엿듣게 했다가 미리 짜 둔 순간에 뛰쳐나오게 하고는, 침묵을 돈으로 사지 않으면 당장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겁에 질린 그는 현금 300탈러와 금시계를 내주었고, 그 밖에 600탈러짜리 어음에도 서명해야 했다. 이것은 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그제야 그는 경찰에 갔다. 그러자 경찰은 —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들이 점찍은 희생자인 그까지 체포했다!(1869년 2월과 3월) 이것은 궁지에 몰린 희생자가 보호를 요청하지 못하게 겁주고, 그리하여 닳고 닳은 털이꾼들을 오히려 북돋는 일이 아닌가? 갈취를 처벌하는 법의 핏줄을 묶어 버리는 일이 아닌가?(『글라디우스 푸렌스』 부록 참조) 이렇게 해서는 사기꾼들의 수작을 막지 못한다! 베를린 신문들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 물론 셋 다 체포했다”! — 베를린의 다른 사건에서는 우르닝의 눈앞에서 뻔뻔하게 시계를 빼앗은 겨우 16세의 사기꾼이(1869년 2월 20일) 재빨리 처벌받았고 우르닝도 체포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우르닝은 형사 경찰의 가택 수색으로 시달림을 당했고, 이때 『멤논』을 비롯한 문서와 책 35점을 빼앗겼다.] 제12절. 포르스트너는 3월 4일 장로회에서 직무 정지를 당했으나, 3월 13일 직무 정지가 다시 풀렸다. — 인간으로서, 국가 시민으로서 제 의무를 다하고 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우르닝이라면 악당이나 아무 철없는 녀석이 손바닥 뒤집듯 그의 명예와 삶의 행복을 뒤엎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 줄을 쓰는 사람의 삶의 행복도 이 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바라건대 그의 명예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기를. 장하다, 그 일에 빗장을 질러 준 빈 장로회의 여러분!
나중에 나는 포르스트너의 반박문을 읽었다(《타크블라트》 2월 26일 자).
“그 포병은 꽤 오랫동안 내 뒤를 바싹 따라온 뒤에 시립 공원에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바로 내 앞의 벤치에 앉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은 공원에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자기가 11시까지 외출 허가를 받았는데(그때는 막 7시였다. 일요일이었다) 그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시립 공원에서 벌써 여러 번 재미난 모험을 겪었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고 했다. 여러모로 소문이 자자한 이 공원을 나도 공연히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했다, 등등. 그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그가 뻔뻔스럽게도 나를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 나는 그런 고발이라면 그의 중대장 앞에서나 경찰 앞에서 내 얼굴에 대고 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난폭해졌고 경찰로 가자는 데 응했다. 그가 내게 오기 전에 민간인 하나가 그에게 나를 가리켜 주었다. 그러니 이것은 아마도 비열한 사주이거나 실패한 투기였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날마다 시립 공원을 찾는데,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벌써 두 번째다.”
앞서 말한 포병의 말은 그 자체로 그럴듯함의 도장이 찍혀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내놓는 자의 말투이거나, 아니면 올가미를 놓는 자가 흉내 낸 말투 그대로다. 이 점에서 빈과 베를린은 달걀 두 개처럼 닮았다. 내가 전해 들은 바로는 포겔이 발리의 사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수심에서 사주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심 판사에게는 포르스트너를 지독하게 헐뜯는 익명의 편지들이 들어왔다. — 《키케리키》 4월 8일 자는 「정통 교리」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포르스트너 감독이 학교 수사회에 들어간다고 믿어라.”(제14절, 제72절 참조)
제13절. 이미 1863년 무렵에도 다른 감독 한 사람, 곧 경건파 개신교 감독이 병사와 벌인 우르닝적 장면으로 고발된 적이 있다. 괴팅겐 성 알바니 교회의 목사로, 나의 먼 사촌인 자르니히하우젠이다. 국왕 게오르크 5세가 직접 나서자 하노버 교육·종무 장관은 그에게 사임하도록 했다. 그는 아메리카로 떠났다. 그의 삶의 행복도 짓밟아야만 했던 것이다!
*뮐하우젠 근교 작센고타 공국의 월경지 쾨르너의 헤네 감독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그곳 약국의 조제 관리인 펠트캄프를 사랑했다. 이 연애 관계 때문에 그는 교구민의 고발로 면직되었고, 그 밖에 여러 해의 금고형인지 징역형인지를 치러야 했다. 아마 1850년에서 1860년 사이였을 것이다. 지금 그는 나이 든 몸으로 고타 공국에서 살고 있다.
*1869년 6월 뉘른베르크에서 에든버러 대주교의 보좌 주교 토머스 모렐이 체포된 일에 관해서는 제69절을 보라.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의 무척 경건한 감리교 성직자 reverend father(목사님) 카트리지는 1867년 성인 청년과 함께 있다가 붙잡혔다. 그가 전에 무척 존경받던 사람이었던 만큼 이 일은 교회에서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다. 그래도 교회의 일부만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법원은 그에게 penitentiary(징역) 5년(7년?)을 선고했고, 그는 지금 그 형을 치르고 있다.
*프로이스 박사도 아메리카로 갔다. 오하이오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그는 다시 소년들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그곳 극단적 경건파의 총아가 되었고, 그들은 이제 그의 베를린 시절 우르닝 행적을 자유주의자들의 중상 탓으로 돌리려고 애쓰고 있다(《추쿤프트》). 제14절. 이것을 적어 놓자마자 바늘이 벌써 다시 가톨릭 쪽으로 기운다.
《뉘른베르거 안차이거》는 장크트갈렌 신문의 보도를 전할 수 있게 되어 환호한다(1869년 3월 18일). 보덴 호숫가 로르샤흐 실업 학교 교장인 가톨릭 신부 뢰멜러가 “자연에 어긋나는 악덕”으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1869년 2월 25일 자로 이미 스위스에서 내게 이런 편지가 왔다. “장크트갈렌주에서 한 성직자가 우르닝 사랑(?) 때문에 파면되었습니다. 그는 달아났습니다.(뢰멜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1869년 2월 17일 빈의 제국·왕립 고아원에서 가톨릭 수도회인 그리스도교 학교 수사회(frères ignorantins) 소속 교사 “마리누스 수사”가 아우크스부르크 근처의 고향으로 해임되어 돌아갔다. 9세와 12세의 고아 소년 둘, 곧 니콜라우스 폰 베르크호프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한 소년이 그를 음란으로 고발하면서 어떤 일에서 그의 뜻을 받아 주는 것을 자기들이 거부했다고 말했다. 《프렘덴블라트》와 《프레세》에 따르면 그는 소년들이 자기 “뜻을 받아 줄” 때에만 좋은 성적표를 주었다고 한다. (1698년 아우크스부르크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예수회원 모렐이 세 젊은 제자, 곧 루프레히트 푸거바벤하우젠 백작, 안톤 푸거키르히베르크바이센보른 백작, 크라프토 폰 외팅겐 백작과 맺은 우르닝적 연애 관계와 비교해 보라. 『포르마트릭스』 주 12.) 빈의 자유주의 언론은 피고가 가톨릭 수도사라는 이유로 독거미에 물린 듯 굴었다. 끔찍하게 떠들어 대며 법원 수사를 요구했다. 수사가 이루어졌다. 결과는 이랬다. “그에게 씌워진 행위는 일부는 완전히 왜곡되었고, 일부는 아예 사실이 아니다.”(《포어슈타트차이퉁》 3월 26일 자)
아직 끝이 아니다! 누가 내게 뮌헨의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1869년 3월 초 무렵의 한 호)에서 오린 기사를 보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F. M …(현재 A… 거주)이 한 청년을 유혹하여 도덕적으로 죽인 일에 관해 추가 증거를 제공하는 분께 100굴덴을 드림. U L 99887로 발송부에 연락 바람.”
1869년 2월에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한 가톨릭 사제가 어느 과자점의 펀치 방에서 열두 살 소년과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들켜 검사에게 고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수사 청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제68절 참조).
(내가 미성숙한 소년을 유혹하는 일을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본다는 것은 굳이 다짐할 필요도 없다.)
*최근 빈 근교 뫼들링의 가톨릭 신부 헤어초크가 우르닝적 사랑을 행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곧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니까 위에서 든 것만 보면 민주파 두 명과 종교 개혁 지지자 두 명에 맞서, 독일 개신교 감독 두 명, 영국 개신교 성직자 한 명과 감리교 성직자 한 명, 경건파 또는 “봉건파” 교사 두 명, 경건파 상인 한 명, 그리고 고발당한 오늘날의 가톨릭 성직자가 무려 여섯 명이다.
*예전에는 상대 진영에 우르닝이 있다는 것을 알면 오늘날보다 좀 더 거친 무기를, 그러나 어쩌면 덜 독이 묻은 무기를 골랐던 모양이다. 적어도 앙리 4세 시대 프랑스의 한 자유주의 개신교도는 아주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다. 그는 자기가 펴낸 작은 책자에서 이름까지 밝힌 동시대 예수회원 한 사람의 우르닝적 범죄, 정체 폭로, 형사 수사, 화형 선고와 처형을 묘사했다. 정교한 동판 속표지 그림은 이 교황지상주의 위선자를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보여 주었다. 그는 화약 연기 속의 블뤼허처럼 보였다. 불길 사이로 얼굴만 겨우 내다보였다. 그가 우르닝이었을 수는 있다. 나머지는 모두 — 지어낸 것이었다. (귀스타브 브뤼네가 『Dissertation sur l'Alcibiade fanciullo』(『소년 알키비아데스』에 관한 논고)에서 자세히 이야기한다. 『멤논』 제134절 9 참조.) 제15절. 1869년 3월 23일 이곳(뷔르츠부르크)에서 25세 청년 하나가 구걸로 체포되자, 이곳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60세 문지기 발렌틴이 수도원의 어느 방에서 자기를 우르닝적으로 유혹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바이에른 법에 따라 발렌틴에 대해 어떤 사법 조치도 취해지지 않자 적잖이 놀랐다. 바이에른에서는 전혀 처벌 대상이 아닌 행위에 대한 고발이니, 검사는 분명 아예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검사는 그 대신 자세한 조서를 작성해 수도원에 보냈고, 수도원은 곧바로 발렌틴을 내보냈다. 그는 나를 찾아왔다. 3월 31일 나는 수도원장 비르간스 신부를 찾아가, 어디서 굴러 온 떠돌이에게 증명되지도 않은, 순전히 꾸며 낸 것일 수도 있는 주장 하나로 착실한 사람을 손바닥 뒤집듯 밥줄에서 쫓아낼 힘을 쥐여 주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말했다. “어느 부랑자가 언젠가 성직자를 두고 그런 진술을 할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일관성을 지키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또 비르간스 씨에게 포르스트너 사건의 경과를 알려 주었는데, 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얻은 것은 어깨 한 번 으쓱하는 것과 발렌틴에게 내린 칭찬 한마디뿐이었다. 해고는 그대로였다! — 하지만 어쩌면 자유주의 신앙고백의 장로회는 가톨릭 수도원보다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주의 언론의 비열한 공격을 면하니까.
*검사는 한 국가 시민에게 쓰라린 손해를 끼치면서 처벌 대상이 아닌 행위에 끼어들었다. 내 권유로 발렌틴은 그를 상대로 법무 장관에게 서면 진정을 냈다. 그가 받은 것은 — 아무 답도 없었다.
*인간애의 불길에 이끌려 모든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인권을 요구하고, 부당하게 억압받는 모든 이를 위해 나서는 그런 자유주의를 공격할 생각은 내게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인기에만 아첨하고, 법 감정을 상투어로 질식시키고,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하녀 하나가 사죄를 거부당하면 정의를 외치고, 단순한 출판법 위반 사건에서 주교 하나를 사면하면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면서도, 수천 명의 인권과 인간 존엄을 벌레처럼 짓밟을 때는 냉담하게 구경만 하는 저속한 자유주의는 — 그것이 그런 자유주의와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III. 차스트로 사건에 관한 논의
제16절. 위의 서론으로 독자에게 나의 주된 주제를 겉으로나마 안내했다고 믿는다. 이제 나는 세 가지 물음을 내놓는다. 그것들에 대답하려는 것이라기보다 그것들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이 검토를 돕기 위해 나는 자료를 모으고 내 자신의 논의도 덧붙이겠지만, 결론은 내리지 않겠다.
물음은 다음과 같다. 사건이 요구하는 대로 나는 이 가운데 셋째 물음에 무게를 둔다.
A. 폰 차스트로는 남성 개인에 대한 자기 성적 성향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가?
B. 그는 자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게) 저지른 우르닝적 성애의 행위에 책임이 있는가? 그는 그 행위를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저질렀는가?
C. 그는 이런 성적 행위를 할 때 사납게 날뛰는 욕구로 사랑하는 소년들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는가? 그는 그것을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저질렀는가?
A. 우르닝적 성애 충동의 존재에 대한 책임
제17절. 남성 개인에 대한 자기 성적 성향의 존재에 대해 폰 차스트로는 분명 어떤 식으로도 책임이 없다.
헐뜯기를 가장 좋아하고 뿌리 뽑기를 가장 즐기는 박해자들조차 얼마간 검토한 뒤에는 거리낌 없이 이렇게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향은 많은 사람에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타고난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 싹은 아주 어린 시절의 그토록 여린 나이에 심어지므로, 그 존재에 대한 책임은 말할 수 없다.”
앞의 말은 베를린의 이름난 법의학 권위자로 안타깝게도 1864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카스퍼가 『임상 단편집』(1863년, 34쪽. 그의 말은 『멤논』 제1부 32쪽에 옮겨 실었다)에서 한 것이다. 뒤의 말은 1869년 1월 말에 나온 책 『베누스 우라니아의 역설』(23쪽 아래)에 있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낸 광고가 자랑하듯이 내 저작들(특히 『인클루사』와 『멤논』)을 “분쇄하는 비판”에 부치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우르닝 사랑이 타고난 것이라는 내 이론에 일부는 직접적으로, 일부는 조건부로 가장 중대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익명으로 분쇄한다. 그 저자는 의학 교수로, 뷔르츠부르크의 가이겔이거나 베를린의 피르호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이제야 카스퍼에게서 읽은 대목이다(『법의학 편람』 제4판, 1864년, 제1권 164쪽).
“남색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성향은 타고난 것이며, 말하자면 정신적 양성 구유다. 이들은 여자와의 성적 접촉에 진정한 구역질을 느낀다. 그들의 상상은 아름다운 젊은 남자들에게서 즐거움을 얻는다.” [남색이란 남성 개인에게 행하는 계간이다.]
1868년 10월 31일 빈의 “정신 의학·법의학 협회”에서 그곳의 베어 교수는 카스퍼의 앞의 말을 가리키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제7권 5장으로 그것을 뒷받침했다(아래 제22절). 또 의학 박사 라이히의 “그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소질”에 관한 견해도 참조하라(아래 제20절). 나 자신의 이론은 아래 제49절. 제18절. 우르닝 사랑의 다른 점에서는 화해할 줄 모르는 적수인 아돌프 슈타르의 발언도 어쩌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의 수법의 견본은 아래에서 보겠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한 줄기 빛을 보여 준다. 카스퍼 하나만 빼면 비(非)우르닝들 가운데서 나는 아직 이와 비슷한 것을 만난 적이 없다. 1861년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번역의 부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타락을”(타락?) “너무 가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소년애는 오늘날 남녀 사이의 사랑과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기는 하지만, – 그것은 본디 근원적이고 영원한 사랑의 감정이었으며, 말하자면 정당한 자리에서 쫓겨나 그릇된 자리에서 인간 본성을 사로잡은 것이 아닌가.” (“그릇된 자리에서”에 관해서는 『멤논』 제5·8절과 『포르마트릭스』 제92~94절 참조.) 다만 이상한 것은, 영원한 사랑의 감정이 청년에 대한 사랑이라는 형태로 오늘날에도 수천, 또 수천 사람의 가슴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슈타르가 전혀 짐작조차 못 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B. 저지른 우르닝적 성애 행위에 대한 책임
제19절. 그렇다면 타고난 우르닝은 자기 성적 행동, 곧 그가 남성 개인에게 저지른 성적 행위에 책임이 있는가?
나는 책임 무능력을 주장하는 비(非)우르닝들의 견해를 검토하도록 내놓겠다. 반면 우르닝 사랑에 관한 나의 저작 일곱 권에서 나는 책임 능력 그 자체를 어디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고려하는 것은 성애 일반에 깃들어 있고 실제로 억누르기가 극히 어려운 힘이 될 수 있는 격정의 맹렬함이 끼치는 영향뿐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도 이 맹렬함으로부터 완전한 책임 무능력을 끌어내지 않았다. 『글라디우스 푸렌스』 28·29쪽 참조. 거기서 나는 감경된 책임 능력만을 말하며, 이 맹렬함을 형벌 감경 사유로 다룰 뿐 형벌 조각 사유로 다루지 않는다.
그 밖에 나는 미성숙한 소년에 대한 성애를 병적이라고 밝혔지만, 그렇다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투지는 않았다. 『멤논』 제2부 19쪽.
이 모든 점에서 나는 우르닝의 사랑을 디오닝, 곧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같은 단계에 놓는다. 반면에 앞으로 인용할 목소리들은 바로 디오닝의 사랑과 대비하여 우르닝의 사랑에서 책임 능력 자체를 부정한다.
제20절.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주 최근의 디오닝 목소리 넷인데, 그 가운데 셋은 이상하게도 바로 나의 저작들을 근거로 그렇게 말한다.
1) 빈의 《메디치니셰 프레세》(1869년 1월 3일 자, 22단)에서 『멤논』을 몹시 격렬하게 비판하는 익명의 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별 사례에서 우르닝이 처해 있는 책임 무능력 상태인데, 울리히스는 자기도 모르는 채 그것을 변론하고 있다.”
2) 브롬베르크 근처 슈빈의 변호사 율리우스 주스만은 “슈빈, 1868년 12월 26일”에 내게 이렇게 쓴다.
“당신의 책”(곧 『멤논』)“에서 나는 책임 능력에 관한 학설에 대한 매우 보호할 가치가 있는 기여를 봅니다. 학문의 이익을 위해 나로서는 새로운 진리가 진리로 여겨지는 일이 그토록 드물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여기서 나는 빈의 디오닝으로 쇼펜하우어의 추종자인 J. 호르눙이, 분쇄하는 『역설』과 《메디치니셰 프레세》의 격렬한 비판을 둘 다 읽고 나서 내게 써 보낸 글을 끼워 넣는다. 그는 두 곳의 공격 방식에서 마주친, 비학문적 무기를 마다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빈, 1869년 2월 23일).
“《메디치니셰 프레세》에서 나는 당신의 『멤논』에 대한 진짜 비판을 기대했는데, 비판과는 이름 말고 아무것도 공통점이 없는 부끄러운 졸작을 발견했습니다. 『역설』을 읽다가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책을 구석에 내던졌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적들이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것도 비(非)우르닝들 사이에서 이런 효과가 나리라고는 두 곳 모두 거의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두 정신적 산물의 학문적 내용뿐이다.
3) 1과 2보다 더 단호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 『역설』이다. 29쪽.
“우리는 그것을”(우르닝의 정신적 성적 본성을) “… 고정 관념 또는 편집광으로 본다. 건강한 삶의 정상적 현상에서 그 정도로 벗어난 탈선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장애, 질병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르닝들은 정신 기능이 장애를 겪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부를 것이다.”
아니, 이 익명의 저자는 더 나아간다. 나는 『멤논』에서 우르닝의 신체 형성에서조차 남자의 그것과 뚜렷이 다른 점이 자주 나타나며, 그 신체 형성이 분명하게 여자의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이 신체적 차이들까지 그 질병 속에 엮어 넣는다. (그 차이들은 속속들이 건강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는 거기서 “전체 인간의 병적 상태가 문제라는 새로운 증거”를 찾는다. 30쪽에서 그는 그런 정신 장애의 사례들을 다음으로부터 제외한다.
“인간의 행위에 지울 수 있는 한에서의 책임.” 그 반대는, “그 행위가 과도한 성적 활동이라는 명료한 의식과 윤리적 동기로 그것과 싸울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
4) 내 저작들을 알지 못한 채, 의학 박사 라이히는 그의 소책자 『부도덕에 관하여』(1866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색을 하는 자는 정신이 나간 것이며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82쪽) – “그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소질 없이는 어떤 조건에서도 남색 충동이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질을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오늘날의 학문에 아직 기대할 수 없다.”(83쪽) – “누구나 되도록 빨리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해 주고, … 남색가들을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한다면, 이 악덕의 확산을 가장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93쪽)
한 번은 “정신이 나갔으며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한다”고 했다가, 또 한 번은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하라”고 한다. 또 신체적·정신적 소질이 충동의 원천이라고 했다가, 또 결혼을 가능하게 해 주면 충동을 없앨 수 있다는 어린애 같은 확신을 내보인다! 그러고 보면 어쨌든 어려운 물음은 이것이다. 정작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할 것은 남색가인가, 아니면 이런 미친 소리를 지어내는 사람인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이히도 특유하고 독자적인 소질을 충동의 원천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제21절. 우르닝의 충동을 병적 정서 장애의 산물로 보는 사람은 이제 다음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a) 병적 정서 장애가 우르닝을 그의 성적 행위로 절대적으로 강제한다면, 그는 그 행위를 할 때 분명히 완전한 책임 무능력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게 저지른 그의 성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는 전혀 없다.
b) 반면에 감경된 책임 능력의 상태라면, 곧 그 내적 강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감경된 형벌은 물론 선고할 수 있다.
제22절. 우르닝의 사랑의 충동을 병적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밝히는 것은 고대의 존경할 만한 권위자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말은 동시에 C절의 물음에도 닿아 있다. 그 말을 찢어 놓지 않으려고 여기서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 싣는다.
이 자리에서 나는 아돌프 슈타르의 처사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차분하고 맑게 생각하는 이 그리스인을 근대의 박해욕 입맛에 맞추려고 애쓰며, 그래서 그의 번역에 “자연에 반하는 음욕”과 “음행”이 득시글거리게 한다. 이 표현들은 원문이 한 음절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이런 본문 변조를, 내가 『멤논』 제1부 XIV쪽에서 언급한 그 경건한 위조들과 나란히 놓는 일은 독자에게 맡긴다.
빈의 베어 교수가 앞서 말한 강연의 바탕으로 원문을 삼는 수고를 하지 않고, 슈타르식 가필을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며 청중에게 들려준 것을 나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5장·7장.
제5장 제1절: “어떤 것들은 본래 즐거운 것이고, ……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고 …… 일부는 습관 때문에, 일부는 (비뚤어지고 결함 있는 본성 때문에) 즐거운 것이 된다. …… 제3절. (다른 것들, 곧 욕구와 성향은 어떤 이들에게서 질병이나 정신 장애 때문에 생긴다.) …… [또 다른 것들은 병적”(질병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병적)“이거나 습관에서 비롯된다.] 손톱이나 숯이나 흙을 먹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또 여기에 속하는 것은 [원문 결락] [또 남성 개인과의 성애 향유에 대한 (성향)도 여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흙 따위를 먹는 성향과 우르닝의 성향은) “어떤 이들에게는 본성으로”(슈타르가 뜻으로는 아주 올바르게 옮긴 대로 “타고난 자연적 성향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습관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길든 이들이 그렇다. 제4절. 그러니 본성이 원인인 이들을 누구도 분명 (자제력 없다, 방탕하다,) 음란하다고 부를 수 없다. 여자들이 성애 향유에서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여자들을 (음란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습관으로 병적인 상태에 걸린 이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의 본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내가 (『빈덱스』 제20절, 『멤논』 제58절에서) 암탉에게 새끼를 낳으라고 요구할 수 없고 암소에게 알을 낳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진짜 디오닝이 우르닝적 행위에 길들어서 진짜 우르닝이 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멤논』 제40절, 제81, 82절.]
제7장 제6절: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버텨 낼 수 있는 쾌락에 굴복하는 사람은 우리의 비난을 받을 만하다. 다만 결함 있는 본성이나 질병이 그 탓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다.”
제23절. 이에 따라 나는 물음을 이렇게 정식화한다.
“폰 차스트로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들과의 성적 교섭에 관해 책임 능력이 있는가? 또는 그의 책임 능력이 감경되어 있는가? 앞에서 소개한 목소리들이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또는 내가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감경되어 있는가?”
제24절. 내가 미성숙한 소년에 대한 성적 성향을 병적인 것으로 보는 쪽으로 기운다 해도 [원문 결락], 나는 미성숙한 개인에 대한 성향이 디오닝 쪽에서도 꼭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해 둔다. 거기서도 그것은 병적인 것이리라.
(사례 1.) 나는 1856년 마인츠에서 몽주아 출신의 22세 디오닝 발렌틴 H.를 알았다. 그는 내게 거듭 털어놓기를, 아주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격렬한 충동을 느끼는 반면 다 자란 여자들에게는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아무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그렇게 흥분시키는 예닐곱 살 난 꼬마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 그렇게 느껴 왔다. 그 점을 빼면 나는 그에게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병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속속들이 명예로운 인품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 격정이 그를 대양 건너로 몰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는 형사 수사를 피해 달아났다고 한다.
물론 병적이라는 가정에 맞서, 물릴 대로 물린 늙은 우르닝 죄인이나 디오닝 죄인에게는 미성숙한 소년이나 미성숙한 소녀가 아직도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나는 간과하지 않는다. 매춘이 가장 어린 나이조차 결코 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로 여기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스티니아누스가 535년 12월 1일의 정결 칙령(“sancimus, omnes, secundum quod possunt, castitatem agere”(우리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만큼 정결을 지키도록 정하노라))에서 탄식한다. 그는 이 칙령을 향기로운 냄새로 주 하느님께 바친다(“haec sacra nostra lex, domino Deo oblata pro alio quodam suavitatis odore”(주 하느님께 다른 어떤 향기로운 냄새 대신 바쳐진 이 우리의 거룩한 법)). 곧 그는 이렇게 말한다(신칙법 제14호). “Cognovimus, … aliquos sic scelestos existere, ut puellas nec decimum annum agentes ad periculosam deponerent corruptionem”(우리는 알게 되었노라. … 어떤 자들은 어찌나 사악한지 열 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들을 위험한 타락에 내맡긴다).
카스퍼는 『법의학 편람』(제4판, 제1권, 사례 95~100)에서 아이들에게 음란한 행위(생식기를 문지르고 자극하는 행위)를 저지른 문지기와 교사 한 사람씩을 언급한다. 문지기는 소년 다섯 명에게, 교사는 소년 두 명(5세와 6세)과 소녀 세 명(6세, 7세, 9세)에게 그런 짓을 했다!
카스퍼는 강간과 음행을 당한 여성 218명을 검사했다.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았다(앞의 책 117쪽).
| 14세 이상 | 겨우 | 25명 |
| 14세 미만 | 193명 | |
| 10세 미만 | 124명 | |
| 7~10세 | 83명 | |
| 2세 반~3세 | 6명 |
북쪽이든 남쪽이든 거의 모든 배심 법원이 비슷한 사례를 보여 준다.
카스퍼가 증언하는 바로는(앞의 책 168쪽) 미성숙한 소년을 유혹하는 일은 독일에서 비교적 드물게만 일어난다. 그는 그런 일 가운데 특별한 사례 하나를 이야기하는데(앞의 책 사례 94), 슐레하이더 사건(『멤논』 제2부 17쪽)의 짝이 되는 일이다. 힘은 세지만 겨우 막 성숙한, 고작 14½세인 농촌 청년이 들에서 일하다가 8세 소년을 유혹했다. (그것도 진지한 카스퍼조차 웃으며 덧붙이듯 시골스러운, 아주 하찮은 값으로, 곧 “버터 바른 빵 한 쪽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그랬다. 저 분방한 프로페르티우스가 이미 이 사건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베르길리우스에게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1]
“Felix, qui viles pomis mercaris amores!”(과일 몇 알로 값싼 사랑을 사는 그대는 행복하여라!))
제25절. 폰 차스트로가 소년들과 나눈 성적 교섭에 관해서는 아무런 책임 무능력도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이 교섭 중에 저지른 잔학 행위에 관해서는 책임 무능력일 수 있다.
C. 사랑하는 소년들에게 저지른 사나운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
“Αἱ δὲ διά τε νόσους γίνονται καὶ μανίαν ἐνίοις· αἱ δὲ νοσηματώδεις”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5장 3절. (“또 어떤” 욕망들은 몇몇 사람에게서 질병으로 말미암아 또는 정신 장애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또 어떤 것들은 그 자체가 병적이다.”) – “자유로운 의지 결정 능력이 비정상적인 심리 과정으로 방해받는 곳에서, 그 개인은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의학 박사 폰 크라프트에빙. (《법의학 회보》 1864년.)
제26절. 범행은 다음과 같다.
1. 당시 5¾세였던 가구 장인의 아들 에밀 한케에게. 범행 시각: 1869년 1월 17일 오후 4시 반쯤. 장소: 베를린, 그뤼너 베크 45번지 집의 5층 위 다락.
a. 계간.
b. 소년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감정 증거를 마련하려고 예심 판사는 물린 상처가 난 얼굴을 사진으로 찍게 하고, 폰 차스트로의 치열은 밀랍으로 본을 뜨게 했다.
c. 신체 훼손. 소년의 고환을 잘라 냈다.
d. 목을 천으로 졸랐다. 무슨 의도로?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목 졸라 죽이려고? 그렇다면 모살 미수인가? 아니면 사나운 탐욕에서 아무 목적 없이?
e. 소년의 머리를 러시아식 난방 연통에 처박았다. 질식시키려고?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소년은 베타니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열병과 기관지염으로 위중한 상태로 그곳에 머물다가 2월 26일 나아서 퇴원했다.
* 저녁 8시 15분, 집에 사는 사람들이 다락 쪽에서 나직이 흐느끼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서둘러 올라갔다. 끔찍한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게리히츠차이퉁》 1869년 7월 6일 자에 따르면 그들이 발견한 소년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고, 《트리뷔네》 1869년 7월 6일 자에 따르면 똑바로 서 있었지만 “제 발로 거의 몸을 가누지 못했다.” 추위에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서리 내린 날씨였다). 손과 몸의 다른 부분은 그을음으로 시커멨다. 얼굴과 다른 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물어뜯겨” 있었다(《게리히츠차이퉁》). 왼쪽 뺨에는 위아래 이빨 자국이 깊이 박힌 물린 상처가 있었고(《트리뷔네》), 이마에는 피부가 벗겨진 자국이 있었다. 신발은 벗겨져 있었고, 옷은 몸에서 일부 뜯겨 나갔으며, 몸에서 셔츠가 벗겨져 있었다. 목에는 천 하나가 단단히 감겨 있었다. 후두 위로 목을 빙 둘러 이 천에 들어맞는 교살 자국이 나 있었다(《트리뷔네》). 목에는 “누가 손가락으로 세게 누른 듯한 자국”이 있었다(《트리뷔네》). 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엉긴 핏자국이 있었다.
II. 15세 제빵 견습공 코르니에게. 1867년. 베를린 근교의 빈터에서.
a. 계간.
b. 신체 훼손과 모살. 코르니의 시신은 근처 개울인 판케강에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사인이 익사로 나왔는지, 아니면 목에서 칼에 베인 자국이나 단검에 찔린 자국 따위가, 또는 마찬가지로 목 졸린 흔적까지 발견되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우 생식기는 완전히 잘려 나가 있었다. 잘린 부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소문의 먹이가 되었다. 소문은 그것을 동화처럼 부풀렸다. 코르니의 시신이 — 옛날 콜키스에서 압시르토스의 시신이 그랬듯이![2] — 작은 토막과 가닥으로 잘려 흩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신은 다른 방식으로 끔찍하게 다루어져 있었다. 직장이 “통째로 도려내져” 있었다(무슨 뜻인가?). 그 구멍으로 해서 몸 전체를 관통해 나무 막대 하나가 폐까지 박혀 있었다.
제27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런 악마 같은 잔혹 행위는 간단히 형법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형법의 적용을 받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이보다 더 끔찍한 행위들도 범인이 범행 순간에 책임 무능력이었기 때문에 이미 형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검토도 없이 “폰 차스트로는 책임 능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짧고 편하다. 그러나 정의롭지는 않다. 베를린 신문들은 “그를 상대로 한 심문들로 보아 그의 책임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런가? 그러나 어떤 책임 능력 말인가? 현재의 것인가, 범행 순간의 것인가? 뒤의 것을 심문으로 알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 드러났단 말인가? 책임 능력 문제에 답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검토하는 법의(法醫)의 일이지 예심 판사의 일이 아니다.
*7월 5일 심리에서 검사가 한 발언에 따르면, 방대한 예심 동안 “피고인의 정신 상태에 대한 탐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푸블리치스트》 1869년 7월 6일 자). 제28절. 독자는 내가 나 자신을 권위자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학문의 대표자들에게 발언권을 준다. 그들의 말 곁에서 나 자신의 견해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먼저 카스퍼의 말에 유의하기 바란다. “격정적이지만 아직 책임 능력이 있는 정동과 실제 정신 장애 사이에 경계를 긋기란 극히 어렵다.” (『편람』 제1권 493쪽.)
나로서는 그 곁에서 네 가지 점에 주의를 환기한다.
1. 성 충동과 긴밀하게, 아직 해명되지 않은 방식으로 얽혀서, 눈에 띄는 편집광, 곧 병적 정서 장애가 자주 나타난다. 이때 성 충동 자체는 결코 병적으로 손상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말했듯이 우르닝의 성 충동을 병적으로 손상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편집광은 디오닝, 여자, 우르닝에게서 두루 만난다.
2. 어떤 개인들에게는 때때로, 계획도 목적도 없이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목마르고 사나운 욕구, 곧 피의 갈망이 있다. 그것은 보기에 책임 능력이 있는 정동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그것이 엄습하는 순간에는 마치 어둠의 나라에서 솟아오른 인쿠부스처럼 그 개인의 영혼을 짓누르는 듯하다.
3. 성 충동과 자주 얽혀 있는 그 병적 정서 장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피의 갈망이다. 성 충동과 얽힌 채 그것은 성적 신경 흥분이 정점에 이른 순간에, 또는 충족 직후 갑자기 맥이 풀린 순간에,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로 나타난다. 그것도 바로 격렬한 욕망을 불태웠던 그 존재에게서 이 피의 도취를 채우려는 욕구로 나타난다.
4. 심리학적으로 보아, 흐려지지 않은 정신 건강 상태에서 이런 악마 같은 파렴치한 짓이 저질러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법하지 않다.
제29절. 폰 Z.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사나운 피의 갈망의 행위라면, 아무리 극단적인 것이라도 나는 나의 논의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그가 실제로 희생자를 죽였거나 죽이려 했다 하더라도 그렇다. 다만 나는 계획 없고 목적 없는 피의 갈망의 행위만을 말하며, 따라서 폭행을 저지른 뒤 그 흔적을 지우고 두려운 증인의 입을 막으려는 의식적 목적으로 행한 행위, 곧 본래의 모살과 모살 미수는 제외한다. 그 경우라면 책임 능력에 대해 더는 논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살해나 살해 미수가 있는 경우, 폰 Z.가 의식적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 아니면 계획 없는 피의 갈망에서 행동했는지는, 나의 논의에 대해서는 선결 문제다. 그것은 예심 판사가 밝혀낸 증거 자료로 답해야 할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래의 사례들도 어느 정도 나름대로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제30절. 여기서 저질러진 것은 잔인한 폭행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 사정을 우르닝 특유의 여성처럼 부드러운 기질과 모순된다고 보면서, 우르닝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contra naturam sui generis”(자기 부류의 본성에 반하는 일)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그럼에도 폭행을 저질렀다면 이것까지 정신 장애의 근거로 끌어오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에 맞서 두 가지 사실을 내놓는다. 그것들은 예외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든 우르닝도 건강한 정신력을 지닌 채 폭행을 저지를 소질이 있을 수 있음을 증언한다.
a. 불체스호펜(니더외스터라이히)의 농부 크라프트는 자연을 거슬러 한 여자와 혼인했다. 그는 우르닝이며, 결코 계간자가 아니다. 독일에서는 우르닝 가운데 계간자가 아주 적다. 그에게 우르닝 특유의 여성 닮음, 이를테면 여성적인 일과 취향 같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그의 변호인인 빈의 법학 박사 도스탈이 내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도 1868년 2월 8일 그는 그 아내를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였다. (이야기는 『멤논』 제2부 XII쪽에 있다.)
b. (사례 2.) 다음은 분명 지극히 드문 사례인데, 보증받은 것이다. 1849년 어느 저녁, 베르가모(롬바르디아) 근처의 숲에서 이탈리아인 우르닝 둘이 마침 그 길을 지나던 말쑥한 오스트리아 병사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다가갔다. 그 병사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으로, 기마 포병대 소속이었고 군도를 차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몸에 숨겨 지니고 있던, 실탄을 잰 권총을 갑자기 들이대고는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여(그야말로 강간 그대로!) 그를 강제로 두 사람 각자의 능동적 충동에 쾌락을 내주게 했다. 그의 이름은 나에게 알려졌다. 1864년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디오닝이었다. 내 출처는 그의 옛 전우가 나에게 써 보낸 편지다. 이 전우는 우르닝인데, 그 사실을 병사는 꿈에도 몰랐고, 그래서 언젠가 이 전우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미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에도 이런 우르닝적 겁탈이 나온다. 젊고 아름다운 기톤에게 아스킬토스가 칼을 뽑아 든다. “네가 루크레티아 노릇을 하겠다면, 내가 너의 타르퀴니우스가 되어 주마!”[3]
제31절. (사례 3.) 기묘한 우연의 장난으로, 베를린에서는 이미 예전에도 하필 한케라는 이름의 소년이 습격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사정은 다르다. 그것은 신체 훼손 없는 직접적 살해였지만, 범인은 그 전에 소년을 거듭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자백한 사람이었고(그는 매우 자세히 진술한 그 자백을 나중에 철회했지만), 끝내 책임 무능력으로 판정받았다. 요한 그니저는 52세로, 허약하고 몸이 마비되었으며 지력이 모자랐고, 마음이 여렸으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18..년(대략 1840~50년) 2월 11일 어느 지하실에서 12세 소년을 도끼로 너댓 번 내리쳐 머리를 박살 내 죽였다. 그는 장작 지하실의 나무 받침대 둘레에 도미노 패를 흩어 놓았는데, 자기의 작은 살림을 돕던 한케가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히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되자 그는 첫 일격을 가했고, 한케는 쓰러져 그르렁거리며 신음했다. 그는 곧장 경찰에 가서 말했다. “내가 소년 하나를 때려죽였으니 이제 되도록 빨리 처형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체와 도끼가 놓인 지하실의 열쇠를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한케를 학대했을 때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의붓아버지에게 이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때려죽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삶이 지긋지긋해서, 단두대에서 빠르고 손쉽게 죽으려고 그랬다고. 그는 때때로 “얼빠진 생각”에 사로잡혔다. 범행 11일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어떤 때는 ‘연금 생활자’라고, 어떤 때는 ‘가구상’이라고 적는단 말이야. 내가 직함을 두 가지나 쓴다는 걸 경찰 고문관이 알게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랬다간 나를 잡아가라고 할 거야.” 카스퍼는 말한다. “이 사례는 광기가 있는데도 가장 가까운 지인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 그니저는 이성의 사용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고의 방향에서 얽매여 있었다 해도, 계획적인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죽었다.(카스퍼, 『법의학 편람』 제4판, 제1권, 487쪽. 『임상 단편집』, 1863, 299~304쪽.)
제32절. 이제 성 충동과 한데 얽혀 자라난 저 잔혹성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낮은 정도의 잔혹 행위부터 시작하자. 점점 심해지는 양상이 아주 뚜렷하게 우리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옛 자료들을 바탕으로 엮은 작은 모음집 『가톨릭 성직자의 교리와 생활에 관한 폭로』(존더스하우젠, G. 노이제 출판, 1862, 73쪽)는 1713년의 일로 이렇게 전한다.
“란츠베르크의 마기스터 율리우스 펠란다는 소년들을 어찌나 걷잡을 수 없이 사랑했던지, 음욕에 겨워 미친 사람처럼 그들의 뺨을 깨물었다.”
마르티알리스(11권 71편)도 우르닝 투카에 대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투카가 사랑했던 소년을 두고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Nil te dente movent saucia colla tuo”(네 이빨에 상처 입은 목이 너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투카는 물어뜯을 곳으로 뺨 대신 목을 골랐던 것이다.
(사례 4.)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어느 계간자의 다음과 같은 잔혹 행위를 전해 들었다. 북독일의 매우 지체 높은 인물인 이 사람은 몸을 결합하는 행위를 할 때 상대를 난폭하고 가차 없이 다루려는, 억누를 수 없는 갈망에 휘둘렸다. 그렇게 해야만 그는 진정한 쾌락을 느꼈고, 그래서 환희에 겨워 환성을 질렀는데, 상대가 그의 밑에서 고통으로 몸을 비틀수록, 더 크게 비명을 지를수록 그 환희는 더 컸다.(이와 견주어 더 나아간 현상으로는 아래 사례 9, 드 라발 드 레를 참조.) 여기서(사례 4에서) 희생자는 소년이 아니라 프로이센 병사들이었다. 그 인물은 아직 살아 있다.
이런 가차 없음과 진짜로 물어뜯으려는 저 탐욕은 아무래도 특이하며, 흥분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랑의 충동의 본성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제33절. *(사례 5.) 성적 향유가 순간적으로 정신 상태 전반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1868년 빈의 한 우르닝에게 다른 (27세) 우르닝이 들려준 사례가 증명한다. “그는 누운 채로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내가 그의 위에 엎드리는 포옹을 원했다. 그는 격렬하게 나를 껴안았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이 감기더니, 손이 경련하듯 내 몸에 달라붙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적잖이 겁이 났지만 가만히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그는 사과하면서, 한동안 금욕하고 나면 성애를 향유할 때 거의 언제나 이런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자주 하면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그 밖에는 그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제34절. 잔혹 행위로 돌아가자. 아무 목적도 없는 잔혹 행위는 보통의 사랑에서도, 성적 폭행의 경우에 일어난다. 성적 폭행은 주로 광란에 가까운 성적 흥분 상태에서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사건에서 강간범은 목마른 탐욕에 내몰려 강간당한 여자의 생식기에 나무 막대를 세차게 쑤셔 넣었다. 코르니 사건의 비슷한 만행과 비교할 만하다. 1868년 헤센다름슈타트에서 오버뵐슈타트의 페터 포이어바흐가 12세 소녀를 겁탈하고 살해할 때의 “끔찍한 정황”(나는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도 어쩌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피에 굶주린다는 영예를 우르닝에게 돌리는 어느 법의의 순진함에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1868년 6월 19일 앞서 말한 아내 살해범 크라프트에 대한 공판 중에 코르노이부르크의 의학 박사 알렉산더 퀴힐러는 “젊은 남자들과 성적 교제를 하는” 자들에 대해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잔혹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수준의 학문이라면 사모예드인이나 피푸호하인도 이미 올라섰을 것이다.
제35절. 신체 훼손의 대상은 코르니에게서나 한케에게서나 생식기였다. 코르니의 시신에서 잘린 부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훼손한 자가 그것을 가져가기라도 한 것처럼! 심리학적 비교를 위해 여기에 짝이 되는 사례 둘을 든다.
a. (사례 6.) 열다섯 살쯤 된 한 우르닝에게서 성숙이 깨어나면서 성적 쾌락의 첫 불길이 타올랐으나 충족을 찾지 못했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상상이 그를 고삐 풀린 환상에 몸을 맡기도록 몰아붙였다. 상상은 그를 전쟁터로 데려갔다. In quo campo militi alicui juveni interfecto, formositate ceteros superanti, humi jacenti, membra genitalia abscindere sibi visus est.(그 전쟁터에서 그는 죽임을 당해 땅에 누워 있는, 아름다움에서 다른 이들을 능가하는 어느 젊은 병사의 생식기를 자기가 잘라 내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를 지배하던 목표 없는 음탕한 탐욕에 이 상상은 어느 정도 충족을 주었다. 약 2년 뒤 그는 충족되지 않은 채 남은 성 충동에 쫓겨, 한집에 사는 사람의 것인 죽은 사슴에게 밤에 몰래 다가가 membri virilis partem(그 수컷 생식기의 일부)을 잘라 내 그 조각을 가져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대담한 짓을 할 때 나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쫓겼습니다. 그때처럼 몸이 떨리고 전율한 적은 없었습니다.”
b. (사례 7.)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사례에서는 안타깝게도 범인이 우르닝이었는지도, 어떤 심리적 원인이 그를 범행으로 몰았는지도 알 수 없다. 빈의 《프레세》 1869년 2월 24일 자, 운터크라인발 2월 18일 기사: “2월 11일 한낮에 전역병 N.이 클라인코렌 마을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짜 수염으로 얼굴을 꾸민 낯선 남자 셋이 그에게 다가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그의 목에 큰 칼을 들이대고 ‘소리를 한마디라도 내면 너는 죽는다’ 하고 위협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를 몇 길 떨어진 덤불 속으로 끌고 가서 옷을 찢어 벗기고 그를 부분적으로 거세했다. 그러고는 전리품을 가지고 떠났다. 이 범죄의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훼손당한 본인도 모른다. 그는 아직 생명이 위태롭다. 아마 미신이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무슨 미신인가? 미신이나 질투에 찬 디오닝의 복수라면 이 사례는 여기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의 경우라면 훼손당한 사람이 그 동기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또 복수의 달콤함이 복수한 자에게 승리의 순간에 입을 다물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르닝이 저지르는 거세라면 그 동기를 단순한 잔혹성에서 찾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 생식기에서 성적 흥분을 채우려는 탐욕, 곧 거기에 잔혹 행위를 가함으로써든, 그것을 차지하여 그 소유로 만족을 얻음으로써든 성적 흥분을 채우려는 탐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젊은 남자가 우르닝에게 미치는 모든 성적 매력이 바로 이 부분에 모인다는 것을 디오닝들은 보통 알지 못한다(『포르마트릭스』 제8, 9절).
제36절. 이제 우리는 한케와 코르니에게 저질러진 것과 같은 부류의 잔혹 행위라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영역을 한 신비주의자의 언명으로 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귀신론적 개념을 빼면 그의 견해는 나의 견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비주의적 귀신론의 길로, 나는 자연과학적 심리학의 길로 거기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J. 폰 괴레스(『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제4권 제2부, 1842, 460쪽)는 「악마적 피의 갈망」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한다. “생식의 쾌락과 친족 관계에 있으면서 그 이면을 이루는 것이 살인의 쾌락이다. 둘 다 피의 도취를 일깨운다.” 그에게(421쪽) 생식 충동과 피의 갈망은 똑같이 “악마적 교감의 접점”,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 광란과 맞닿을 수 있는 성향이다. 461·462쪽에서는 이렇다. “자라나는 충동은 의지의 지배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 그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그 저항할 수 없음 속에서 충동은 이제 제 농노를 끔찍한 짓에서 끔찍한 짓으로 몰아가고, 마침내 오브세시오”(일종의 신들림) “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 거기서 생겨나는 행위는 악마적 성질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격정에 의한 압도였던 것이 마침내 악마에 의한 압도가 된다.”
제37절. (사례 8.) 성욕이 피에 대한 갈증과 광기와 한데 얽혀 자란 것을 우리는 괴물 같은 쥘 드 사드 후작(1740년 출생, 1814년 사망)에게서 본다.[4] 그는 그 긴 생애 가운데 띄엄띄엄 29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는데, 믿기 어려운 성적 방종 때문에 그곳에 갇혔던 것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음란한 관능으로 (거의 그런 것 같은데, 그야말로 뒤섞어) 여자 사랑과 남자 사랑을 행했고, 덜 자란 소녀와 소년을 욕보였다. 모든 것이 극단에 이르렀고, 희생자들에게 가장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는 그들을 채찍질하고, 깨물고, 베었으며, 일부는 죽이기까지 했다. 그는 비세트르 정신병원에서 죽었는데, 그곳에서 정신이 흐려진 채 마지막 몇 해를 보냈고, 광증 속에서도 여전히 음란하고 방종했다. 언젠가 그가 감옥인지 정신병원인지로 끌려간 뒤, 사람들이 그의 성의 정원에서 공기를 더럽히던 늪이 된 연못의 물을 뺐다. 그 안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채 서로 묶인 소년과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에는 분홍 비단 리본이 살갗을 꿰어 지나가 있어, 토끼 고기에 비계를 꿰어 넣듯이 이를테면 꿰어 박혀 있었다. 후작이 그들을 욕보이고 산 채로 그렇게 고문한 다음 물에 빠뜨려 죽였으리라고 짐작되었다.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 외딴 작은 집을 하나 두고 사람들을 꾀어 들였다. 크레키 후작 부인이 『회상록』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그가 어떤 처녀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무릎 아래 살가죽을 째서 일부를 벗겨 냈다고 한다. 처녀의 비명을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와 보니 현관문이 잠겨 있었으나 이를 부수고 들어갔고, 그러자 그는 달아났다. 사람들은 살가죽 한 자락이 다리에서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후작 부인은 비세트르에서 그를 보았는데, 그는 다른 미치광이들과 함께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다. – 그는 널리 알려진 소설 세 편을 썼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1794), 『쥘리에트』(1798), 『카르투지오회 수도원 문지기 동 부그르 이야기, 또는 사튀르냉의 회상』(1777)이다. 이 소설들은 여자, 남자, 소녀, 소년에게 가해지는 피에 굶주린 음욕의 가장 미친 산물들을 담고 있으며, 읽는 이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참으로 전대미문의 괴롭힘과 고문, 채찍질, 살인을 그린다.(미쇼, 『세계 인명 사전』, 브로크하우스·피러·마이어의 백과사전, 쥘 자냉의 「사드 후작」, 앞서 말한 『회상록』.)
여기서도 우리는 베기 따위와 나란히 깨물기를 본다. 이렇게 결합되어 있을 때 깨물기는 그것이 따로 떨어져 나타날 뿐인 펠란다와 투카의 무해한 경우보다 분명 더 급성의 성격을 띤다. 그러니 깨물기는 정신 장애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무게를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제38절. (사례 9.) 사드와 짝을 이루는 놀라운 사례를 우리는 질 드 라발몽모랑시, 곧 레 남작에게서 만난다. 프랑스 원수였던 그는 아이들을 살해하고 계간과 마술을 행한 죄로 1440년 낭트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돈에 쪼들리게 되자, 처음에는 연금술에서, 다음에는 악마에게서 도움을 구했다. 그의 친구이자 하수인인 프렐라티에게 악마는 스무 살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숲에서 금괴 더미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누런 모래 더미로 드러났다.(감옥에서 한 프렐라티의 진술이다. 재판관들은 아닌 게 아니라 마술 혐의로 심문했다.) 그 자신에게는 악마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첫 제물로 악마에게 바쳤다 – – 죽인 아이의 손과 심장과 눈과 피를.(!) 이보다 더 확실히 입증되었고 동시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는 늙은 여자를 시켜 양치기 소년, 거지 아이 등을 자기의 마슈쿨 성으로 꾀어 오게 했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언제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괴레스는 이렇게 쓰는데, 아마 로비노의 말일 것이다. 아래를 보라) 상상력이 지어낼 수 있는 가장 파렴치한 쾌락에 빠졌다. 이 쾌락에는 피의 갈망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의 야수성의 희생자들이 오직 죽어 가는 순간에만 그에게 진정한 자극을 줄 정도였다! 그는 제 손으로 그들을 죽였다. 그들의 비명, 그들의 그르렁거림, 그들의 경련과 몸부림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사나운 갈망에 차서 그들의 고통을 더 늘리고 더 끌려고 애썼다. 이 쾌락을 마음껏 누리려고 그는 죽어 가는 아이들 위에 걸터앉곤 했다.” 샹토세 탑에서는 그가 도살한 희생자들의 뼈가 가득 든 통이 하나 나왔다. 그가 죽인 아이들의 총수는 150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고소한 것은 아이를 빼앗긴 아버지 여섯 명뿐이었다. 그는 분명 유도에 따라, 아이들을 악한 세력, 곧 벨제붑, 벨리알 등의 귀신과 저 젊은이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자백했다”.(그가 소녀들도 그렇게 다루었는지는 괴레스의 글로는 알 수 없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괴레스뿐이다.) 1440년 10월 25일 그는 낭트 근처의 막달레나 풀밭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다. 그는 뉘우치며, 저 프렐라티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확신 속에 죽었다. 이 뉘우침 때문에 그의 유해는 축성된 땅에 묻히기까지 했다.(소송 기록은 오늘날에도 낭트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발췌본은 파리 제국 도서관에 493번으로 있다. – 로비노, 『브르타뉴사』 제1권, 1707, 614~617쪽. – J. 폰 괴레스, 같은 책 462~466쪽.) – 그 시대에도 고전은 있었다. 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Πᾶσα γὰρ ὑπερβάλλουσα ἀκολασία καὶ χαλεπότης αἱ μὲν θηριώδεις αἱ δὲ νοσηματώδεις εἰσίν.(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7권 5장 5절) “모든 도를 넘는 방종과 사나움(잔혹, 탐욕)은 짐승 같은 것이거나 병적인 것이다.”
제39절. 실제의 피의 갈망과 대비되면서 이를테면 그것과 나란히 가는 것으로, 병적인 상상 속에만 있는 피의 갈망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세 사례, 곧 10, 11, 12를 들겠다. 12는 제28절 2와 나란히 간다. 반면 10과 11에는 (11에는 적어도 여기저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성적 관능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사례 10.) 라발 드 레보다도 더 놀라운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 1613년 이셀 수녀원의 네덜란드 수녀 마리 드 생스다. 사람들은 그녀의 잔혹한 망상이 빚어낸 상(像)을 실제로 저지른 범죄로 다루었다. 마술에 대한 믿음에 흠뻑 젖어 있던 그 시대에는, 광기가 곧잘 마술사, 마녀, 늑대인간 따위라는 망상의 형태를 띤 것 같다. 우리 시대에 “왕자”, “국왕”, “메시아” 따위라는 형태를 띠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그 망상에 정신 의학이 아니라 형사 수사로 대처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1611년쯤 마리 드 생스는 자기 자신을 고발하여 체포되었다. 1613년 그녀는 포괄적인 자백을 했다. “나는 많은 아이를 죽였습니다. 몇몇은 산 채로 배를 갈랐습니다.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을 이로 짓씹어 먹었습니다. 몇몇은 산 채로 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솥에 삶았고, 몇몇은 압착기로 눌러 죽였고, 몇몇은 사자와 뱀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고, 몇몇은 벽에 머리를 부딪쳐 깨뜨리고 가죽을 벗겨 소금에 절이려는 듯 토막 냈으며, 몇몇은 목이나 팔이나 다리나 그 (남자) 생식기에 매달았습니다.”(관능!) “모두 악마에게 바쳤습니다. 몇몇은 구세주를 욕보이려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내가 목 졸라 죽여 사람들이 묻은 아이들을 밤에 다시 파내어 우리의 밤 모임에 가져갔습니다.”(마녀들의 상상 속 집회, 곧 “마녀의 안식일”을 말한다.) 그 수녀원은 봉쇄 수녀원이어서 그녀는 담장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녀원에는 아이들도, 사자와 뱀을 기르는 동물 우리도 없었다. 모든 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일흔 살의 메헬렌 대주교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 불행한 수녀에게서 본 것과 같은 죄와 악덕과 범죄와 끔찍한 짓의 심연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틀림없이 산 채로 화형당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뒤에도 같은 값어치의 자백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컨대 1634년 뷔르츠부르크의 “마녀 화형” 때가 그랬고, 개신교 지역에서도, 이를테면 북독일과 잉글랜드에서도 꼭 같은 규모로 그랬다. 틀림없이 그녀도 “뉘우치며” 죽었을 것이다. 화형당한 마녀들이 거의 모두 그랬다고 전해지듯이.(Historia de tribus energumenis in partibus Belgic.(벨기에 지방의 세 귀신 들린 자 이야기) – 괴레스, 같은 책 468~470쪽.)
(사례 11.) 편집광의 상상이 빚어낸 상 속의 피의 갈망을 보여 주는 예로는 또, 한때 독일 등지에서, 그러나 특히 프랑스에서 늑대인간이라 하여 처형한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역시 산 채로 화형당했고, 아주 드물게 종신 수도원에 갇히거나 아예 사면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후스 시대에 콘스탄츠에서 늑대인간 하나가 화형당했고, 마지막은 1603년 그르노블에서였다. 아주 젊은 청년이나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 고문도 없이 자기의 상상 속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백했다. 이 기묘한 정신병자들은 옷을 벗었다고 생각한 뒤 갑자기 늑대의 모습이 되어 늑대 털과 늑대 이빨이 온몸에 곤두서고, 네 발로 걷고, 울부짖으며 들과 숲을 헤매고, 생각처럼 빠르게 휙휙 아득히 먼 거리를 내달리고, 공중으로 질주하며 강과 큰 강을 건넌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늘 피의 갈망에 쫓긴다고 느꼈고, 소와 양을 찢어 죽이고, 심지어 사람, 특히 아이와 젊은 처녀를 덮쳐 갈기갈기 찢고, 목 졸라 죽인 아이의 뇌를 파먹는다고 믿었으며, 그러다가 다시 진짜 늑대들 틈에 섞여 암늑대와 교미한다고 믿었다.(관능.) 같은 무렵에 실제로 사람과 가축이 늑대에게 습격당한 일이 드물지 않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면 이 사실이 자백의 확증이 되었고, 늑대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암늑대인간으로 형사 수사를 받던 한 여자가 법정이 보는 앞에서 기절했다. 두 시간 뒤 깨어나서 그녀는, 방금 늑대의 모습으로 (두 시간 길 떨어진) 도시 옆 목초지에서 소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찢어 죽였다고 밝혔다. 법정은 부랴부랴 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목초지에서 실제로 늑대가 소와 양을 찢어 죽였던 것이다. 이 환자들은 자기가 늑대라고 믿지 않는 시기에도 네 발로 걷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구를 자주 보였고, 그 일에 보기 드문 재주까지 보였다. 어떤 젊은 늑대인간은 물고기의 날 내장을 몰래 삼키다가 들켰다. 그는 13세 청년으로, 법원 판결로 종신 수도원에 갇혀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서도 여전히 사람 고기, 특히 젊은 처녀의 고기가 먹고 싶다고 고백했다.(관능.) 그는 열일곱 살도 되지 못해 죽었다. 언젠가 늑대 한 마리가 어떤 처녀를 덮쳤다가 제3자가 휘두른 몽둥이에 쫓겨난 일이 있었다. 저 13세 소년은 “그 늑대는 나였다!”라고 밝혔다. 그는 사건 현장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 일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말했고, 그 가운데는 제3자가 그때 어떤 소리를 질렀는지도 있었다. 그 진술은 들어맞았다. 그러나 범행 당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 기절해 있었는지, 광란 상태였는지 따위는 확인되지 않았다.(괴레스, 같은 책 472~484쪽.) 독일과 프랑스에 아직 늑대가 없었다면, 늑대인간도 좀처럼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피의 갈망의 상상은 틀림없이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이른바 늑대인간들은 실제로는 어떤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은 무해한 존재였다. 단 한 사람, 리옹의 질 가르니에에 대해서만은 실제로도 아이들을 덮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1573년 돌에서 처형되었다.(괴레스, 484쪽.)
실제로 변신할 수 있는 늑대인간이 있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되었고, 아마 모든 인도게르만 민족의 공유 재산일 것이다. 로마인은 틀림없이 그 믿음을 게르만인의 신화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신 에다』에서는 아스 신들이 로키의 아들 발리에게 늑대의 모습을 주고, 그러자 발리는 제 형제 나르비를 찢어 죽인다.(짐로크 역 『에다』, 1851, 284쪽.) 『고 에다』의 「훈딩 살해자 헬기의 노래 1」에서는 구드뮌드가 신피외틀리에게 아주 수상한 일들을 들이댄다.
“너는 숲에서 늑대들과 어울려 흥청거렸다.
얼음 같은 숨결로 자주 상처를 빨았다.
너는 펜리르의 늑대들보다 더 고약했다. 늑대 울음에
익숙해져 숲속
덤불 아래 누워 있었다. 너는 그라니의”(아마
어느 늑대의) “신부였다. 달리도록 길들여지고
고삐가 채워졌다. 여러 길을 나는
너를 타고 달렸다.”
(같은 책 132·133·401쪽.) 신피외틀리가 늑대로 변한 일은 『뵐숭 사가』 12·13장에 분명히 이야기되어 있다.
페트로니우스는 트리말키오의 잔치에서 니케로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게 한다.
“밤에 우리는 공동묘지를 지나갔다. 내 길동무가 옷을 벗어 길가에 놓았다. 갑자기 그는 늑대가 되었다. 울부짖으며 숲으로 달려갔다. 그의 옷은 돌이 되어 있었다. 죽을 만큼 놀란 채 나는 아침에 멜리사의 집에 닿았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늑대 한 마리가 우리 마을에 와서 가축을 물어 죽였어요. 그런데 우리 하인이 그놈 목에 창을 던져 꽂았지요.’ 돌아오는 길에, 돌이 된 옷이 놓여 있던 자리 땅바닥에서 나는 많은 피를 보았다.”(피를 많이 흘리는 누군가가 거기서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런데 집에 와 보니 내 길동무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례 12.) 인정 많고 마음씨 착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던 우리 집안의 한 부인은 여러 해 동안 기이한 불안에 시달렸고, 그 불안은 해마다 심해졌다. 예컨대 아이가 물가에서 노는 것을 볼 때 그랬다. 그녀는 말했다. “마치 내 안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나더러 저 아이를 물에 던지라고 몰아대는 것 같아.” 언젠가 딸의 젖먹이 가까이에 칼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같은 불안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다급하게 딸에게 말했다. “그 칼 치워라! 꼭 내가 그걸로 네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해야만 할 것 같구나.” 한번은 딸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그 칼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지 좀 봐라. 꼭 내가 벌써 아이를 해치기라도 한 것 같구나.” 딸은 기겁하여 제 어머니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칼에 손도 대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참으로 괴롭혔던 그 행동의 유령을 실행하려는 시도는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다른 종류의 망상은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제40절. 책임 능력과 정신 장애에 관해 여기서 몇 가지 법의학적 언명을 들겠다.
1) 카스퍼는 어떤 사람이 책임 능력을 갖추려면, a) 자기 행위의 결과와 그것이 형법과 맺는 관련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하고, b) 동시에 위법한 욕망이 밀려들 때 이에 저항할 힘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임상 단편집』 267쪽.) 위의 제20절 3을 참조하라. “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이 멈춘 정신병자는 정념을 이성과 도덕률로 더는 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둘에게서 풀려난 정념이 그에게서 터져 나온다.”(같은 책 249쪽.)[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은 잠깐 동안만 가로막힐 수도 있지 않은가?] “정신 장애가 지성의 전 영역을 늘 어둡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명료하게, 아니 날카롭게 말하고, 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정신병자들이 있다.”(같은 책 273쪽.) “경험은 부분적 광기의 사례들 가운데 정신 전반의 반응을 결코 일으키지 않는 것들을 보여 주고, 또 광기가 사람을 분명히 광기의 낙인이 찍힌 행위로 내모는 다른 사례들도 보여 준다.”(앞에서 본 해롭지 않은 늑대인간들을 질 가르니에와 대비하고, 상상 속 피의 갈망을 실제의 피의 갈망과 대비해 보라.) “… 고정관념이 … 어떤 정념의 토양 위에서 자라났고 …, 마침내 그것이 환자를 위법 행위로 휩쓸어 가서 환자가 그 고정관념의 관점에서 그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때는 그가 그 고정관념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다.”(『편람』 제1권 503쪽.)[앞에서 본 괴레스의 언명을 참조하라.] 그런데 지속하는 부분적 광기만 있는 것일까? 사드나 라발 드 레 같은 자의 정서를 사슬로 묶는, 순간적으로 일깨워졌다가 금세 다시 지나가 버리는 광기, 곧 순간적 광란의 광기는 없는 것일까?
2) 의학 박사 폰 크라프트에빙은 이렇게 말한다(프리드라이히의 《법의학 회보》, 1864, 244쪽).
“사법은 자연 연구의 성과에 문을 닫아걸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 병든 상태에서 인간이 느끼고 의욕하는 법칙을 규명하려고 애써야 한다. 거기서 얻은 결과를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아야 한다. 자유로운 의지 결정 능력이 비정상적인 심리 과정으로 방해받는 곳에서, 그 개인은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3) *북아메리카의 한 의사가 영국의 권위자 테일러를 내게 인용해 보여 준다. 테일러는 경험이 많은 현역 법의다. 그는 저서 『법의학』(Medical jurisprudence, 1864)에서 성행위 때 나타난 피의 갈망의 두드러진 사례들을 보고하고, 그러면서 순간적 책임 무능력을 지지한다. – 위에 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도 참조하라.
제41절. 책임 능력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곳에서는 아무리 신중하게 검토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코린스키 백작 사건이 입증한다. 1868년 뮌헨의 배심원들은 몇몇 의사가 그를 이미 부분적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선언했는데도 경솔하게 그를 책임 능력이 있다고 판정했다. 아니, 이 의사들(특히 뮌헨의 실링 박사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모로 박사)은 머지않아 그에게서 전반적 광기도 터져 나올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다. 실제로 불과 몇 달 뒤 광란증이 터지는 바람에 그를 로젠베르크 요새에서 에를랑겐 정신병원으로 이송해야 했고, 그 이송 길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자기의 모직 담요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쥐어뜯고 씹어 놓았다.(*그 뒤 그는 치유될 수 없는 치매 환자로서 그곳에서 오스트리아의 한 정신병원으로 넘겨졌다.) 이 일은, 폰 차스트로에게 나중의 “발병”이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중하라고 촉구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제42절. 차스트로 사건은 우르닝의 성적 본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에게 세 번 거듭 당부하고 경고하는 바이다. 불거지는 심리학적 문제를 보통의 법의들에게 맡기지 말라. 그들은 이 성적 본성의 특이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연구해 본 적도 없으며, 그래서 이를테면 물려받은, 그토록 위험한 “자연에 반한다”는 개념을 그것에 갖다 붙이는 일을 아직도 그만두지 않는다.(*지금까지는 우라니즘 전체를 한마디 상투어로 처리해 버리기를 좋아했다. “인간 본성의 타락한 충동을 알게 되는 것은 보람 없고 소름 끼치는 일이다.” 로스히르트의 말이다. 『형법』, 1821, 제219절.) 그러지 않았다가는 정말이지 피고인의 자유와 명예를 알렉산더 퀴힐러 식 지식의 지평 속에 가둘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퀴힐러 같은 자들은 코르노이부르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43절. 이제 책임 능력이 검토 대상이 되었고 차스트로 사건을 곁눈으로 비추어 보게 해 주는 근래의 형사 사건 네 가지를 더 들겠다.
(사례 13.) 푸리우스(가명)는 디오닝으로, 사납게 분노가 폭발한 가운데 장전한 소형 권총을 어느 순경의 가슴에 대고 쏘았다. 그는 7년 전에 잠시 정신병원에 있었으나, 그 뒤로는 더는 정신병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심 판사는 그를 완전히 책임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카스퍼도 첫 진찰에서 마찬가지였다. “그의 생각은 명료하고, 대답은 일관된다. 그는 혐의를 능란하게 물리칠 줄 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의 새 감정은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이었다. 그사이에 그가 손수 쓴 긴 운문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극비에 부쳐 두었는데, 부인들에게 바친 것으로, “더없이 조잡한 헛소리와 더없이 역겨운 외설”로 가득 찬 “정신병 든 머리의 토로”였다.(카스퍼, 『편람』 제1권, 사례 184.)
(사례 14.) 포크트는 한 저녁에 여러 번 강간 행위를 저질렀다. A의 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목을 졸랐고, B의 목을 손으로 조르려 했으며, C의 목구멍을 손으로 눌렀는데, 그때 C의 왼손을 할퀴어 피를 내면서 내뱉었다. “빌어먹을 개 같은 년, 소리 한 번만 더 내면 고양이처럼 목 졸라 죽여 버린다.” 샤리테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그가 사방을 할퀴고 물어뜯어서 묶어 두어야 했다. 카스퍼는 말한다. “그가 그런 흥분 속에서 살해 협박을 내뱉고, 심지어 그것을 실행하려는 행동까지 하므로, 이러한 성적 흥분은 더욱더 병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감정은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포크트는 그 뒤 때때로 밤에 속옷 바람으로 계단을 두 층 내려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더 나중에는 인형과 헝겊 조각을 가지고 놀았다.(『임상 단편집』 267~271쪽.)
(사례 15.) 슐레지엔의 36세 시골 귀족 아가씨 울리케 폰 라이니켄도르프(가명)의 정신 상태를 두고 1858년 의사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녀는 예전에 부모의 하인 세 명을 차례로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다. 군대에 징집된 율리우스와 알베르트와 헤어졌을 때는 “미친 여자처럼” 되었다. 카스퍼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판정했다. 한편으로는 이 “도를 넘은” 사랑의 불길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 일기의 괴상한 내용 때문이었다. 일기는 “메모와 문구의 어지럽고 거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몇 대목을 예로 든다. 1847년 율리우스와 헤어진 뒤(여러 날에 걸쳐 적은 것): “왜 내 입이 이렇게 부르텄을까? 새끼 고양이는 아는 것 같다. 내일 군대가 지나간다. 그러면 나도 따라가련다. 그러니까 너는 군인이 되고 싶은 거지? … 그는 내가 웃는 것을 보았다. …… ‘너 얼굴이 참 창백하구나!’ 그러자 그는 얼굴이 빨개졌다. 나이트캡! 나는 달이 비치니까 함께 타고 간다. 그리고 북 밑에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 나는 오늘 카이저 프란츠 연대에 지원했다.” 그녀는 그를 “mes uniques amours, honneur et charme de ma vie”(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 내 삶의 명예이자 매력)라고 부른다. 1849년: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지는 해가 두 사람을, 서로 무척 사랑하는 두 사람을 비추는 것이 이 거울 속에 보인다. 거울 뒷면에는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사랑하는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그러나 그를 더는 보지 못했다.” 1855년: “내 가엾은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이었다.”(『임상 단편집』 사례 34, 「음란광(Aidoiomanie)」.) 여기서도 우리는, 아마 오랫동안 억눌려 왔을 성적 사랑과 망상이 한데 얽혀 자란 것을 본다. 그런데 그것이 만성으로, 곧 길게 늘어진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면, 분명 급성으로, 곧 응축된 형태로, 순간적 광란으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성적 광란이 흥분하고 피의 도취가 깨어난 순간에는, 사드나 라발 드 레 같은 부류의 기질에게서도 틀림없이 “내 머릿속의 끔찍한 혼돈”을 짐작해도 될 것이다. 제44절. (사례 16.) 1868년 다름슈타트 근처 뷔텔보른 마을에서 기묘한 형사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이 사건을 드는 것은 차스트로 사건과 세 가지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a) 성 충동과 얽혀 자란 편집광(제28절 1. 3이 아니다)(물론 이 점은 여기서 완전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b) 다투어진 책임 능력, c) – 새로운 점! – 대중이 편파적으로 법의들의 감정에 끼어든 것이다. – 그 마을에 재산 있는 양배추 농부 페터 루스티쿠스(가명)가 살았다. 그는 폐쇄적이었고, “음흉하다”고 여겨졌으며, 내가 들은 바로는 반가톨릭 경건파 광신자였다. 그는 우르닝이었으나 계간자는 아니었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우르닝들에게 흔한 방식으로, 곧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껴안는 방식으로 한 젊은 청년의 몸에서 사랑 충동을 채웠다. 그런데 그는 믿기 어려운, 물론 완전히 확인되지도 않은 욕망에 이끌렸다. 사랑의 쾌락을 누리려면 연인이 nudato corpore(맨몸으로) 펼쳐 놓은 제단 책 위에 누워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제단 책(미사 경본, 성경 등)은 교회나 제의실에서 훔친 것이어야 했고, 그것도 한 번 쓰고 마는 것이어야 했다. 얼마나 기막힌 관념의 결합인가! 그는 이런 성경 절도를 무려 20건, 다른 소식으로는 32건이나 저질렀다고 유죄가 입증되었는데, 거의 모두 폭력적으로 침입해 저지른 것이었다. 체포되어 1868년 다름슈타트에서 배심 법원에 회부된 그는 무죄 방면되었다. “자연에 반하는 음행”은 증거 불충분으로, 교회 절도는 책임 능력 결여로 무죄였다. 그는 석방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교회에서 성경 따위를 여러 권 가져갔다는 혐의를 짙게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869년 1월 다시 체포되었으나 곧 다시 풀려났다. 그를 정신병원에 넘기는 것이 아마 더 옳았을 텐데도 말이다. 판결은 그가 자기 행위의 처벌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군(郡) 의사의 감정서는 그가 이전에도 저지른 여러 가지 “엉뚱한 짓”을 확인했다. 감정서는 그의 도벽이 저 책들처럼 생활에 아무 쓸모없는 대상을 향한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전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기술했다. 감정서는 이에 따라 “그러한 행위를 향한, 의지로는 억누를 수 없었던 불행한 성향”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대중은 이 감정서에 몹시 불만이었다. 무죄 방면은 악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이건 범죄 전반에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분노는 오로지, 남자를 사랑했던 자가 무죄 방면되는 것을 본 실망을 향한 것이었으리라! Hinc illae irae!(그래서 저 분노가 나온 것이다!)
제45절. 그럴수록 나는 우르닝을 위해, 계간자를 위해서도 굽히지 않는 법을 더욱 소리 높여 요구한다. 나는 “민중”이 “‘피고인은 계간자다. 그러므로 sans phrase(군말 없이) 유죄!’”라는 평결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 여론의 거친 폭력 때문에 법이 굽혀진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처음이 아닐 것이다. 특히 폰 차스트로에 대해 베를린의 민중 여론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그의 감옥 앞에 모여든 폭도들이 보여 준다. 그들은 “수사를 마치면 정신병원에 보내려 한다는” 그를 민중의 손으로 가로등 기둥에 매달겠다는 목적을 공공연히 내걸고 모였다.
“파도가 미쳐 날뛴다. 제물을 원한다!”[5]
또 베를린 언론도 그것을 보여 준다. 언론은 기왕의 맹목적 분노를 억제하기보다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이니, 법이 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참으로 때에 맞을 것이다. 계간자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려고 목말라하는 폭도의 아우성 앞에서도, 법원의 침해할 수 없는 독립성이 “그런 인간에 대해!” 뜻밖의 판결을 내린다면 “분개”할 이른바 교양 계층의 아우성 앞에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니 테미스여,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여,
단단히 조심하라.
너의 화관이 위태로워지지 않도록!
제46절. 폰 차스트로는 베를린에서는 편견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브란덴부르크의 배심 법원에 회부해 달라고 신청했다고 한다. 도덕적 정의에 비추어 근거 있는 신청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보고도, 그런 주민 가운데서 뽑힌 배심원들이 법정 문턱을 넘을 때 저마다 이미 꼬아 둔 밧줄을 주머니에 넣고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판단하겠는가? 그러나 브란덴부르크로 간다 해도 그는, 낙숫물은 피할지 몰라도, 결국 장대비를 만나는 격일 것이다. 배심석 절반을 그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심리에 끌고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증을 주는 배심원들, 곧 우르닝이 차지할 때에만 그에게 참된 정의가 주어진다. 근거 있는 요구는 “실행 불가능성” 때문에 근거 없는 요구가 되지 않는다.
제47절. 앞에서 말한, 법의의 감정으로 책임 무능력 판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 명에게서, 모두는 아니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보인 여러 가지 괴벽을 만난다. 그니저에게는 얼빠진 생각이, 루스티쿠스에게는 엉뚱한 짓이, 푸리우스에게는 거친 운문이, 울리케에게는 적어 놓은 문구의 혼돈이 있었다. 예컨대 포크트와 사드에게는 없었다. 포크트의 경우 인형과 헝겊 조각을 가지고 노는 일은 나중에야 나타났다. 코린스키도 그런 괴벽이 아직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몇몇 의사가 부분적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선언했다. 사드의 경우 광인 판정은, 적어도 처음에는, 아마 오로지 그의 피에 굶주린 잔혹성의 끔찍한 비정상성과 무목적성에 근거했을 것이고, 포크트의 경우는 살인욕과 얽힌 그의 조야하게 관능적인 행동 방식의 지나침에 근거했다. 곧 독자적인 하나의 계기에 근거했던 것인데, 예컨대 루스티쿠스의 경우 그의 성경에 대한 욕망의 비정상성과 무목적성이 이 계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떠오른다.
폰 차스트로 역시 오로지 그의 피에 굶주리고 사납고 잔혹한 행동 방식의 끔찍하게 비정상적인 지나침과 무목적성을 근거로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으로 판정해야 하지 않는가?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폰 차스트로의 일상생활에서도 괴벽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오로지 나에게 이 글을 발표하지 말라고 말리려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써 보냈다. “파리, 1869년 3월 4일. … 책임 능력 문제는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틀림없이 제기될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이유에서 말입니다. 그를 아는 사람은, 아니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가 반쯤 실성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일종의 괴벽은 어쩌면 벌써 다음과 같은 특이한 습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월 5일 배심 법원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왜 바지 주머니를 늘 그렇게 눈에 띄게 깊이 지어 입게 했느냐고. 그는 대답했다. “깊은 주머니가 아주 실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늘 전 재산을 국채로 지니고 다녔으니까요.”(《게리히츠차이퉁》.)
제48절. 앞에서 든 사례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개인에게는 병적 정서 장애가 일어난다.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든 순간적인 것이든, 또 그와 아울러 본격적인 망상이 있든 없든 마찬가지인데, 이 장애 속에서 개인은 억누를 수 없는 내적 충동에 의해 사납고 목적 없는 잔혹과 피의 갈망의 행위로 내몰린다.[다른 경우에 그렇게 내몰린다고 망상할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는(*“강제하는 피의 도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미친개에게 물린 사람이 처하는 저 소름 끼치는 병적 상태와 비슷한 것 같다. 특히 의식은, 물린 사람의 광견병이 터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 때문에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든 말든, 그것에서 나오는 행위에 대한 책임은, 물린 사람이 사방을 물어뜯는 데 대한 책임과 똑같은 정도로 배제되는 것 같다. 설령 그 개인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두 상태 모두에서 행동할 내적 자유는 똑같은 정도로 없어지는 것 같다.
한케와 코르니에게 저질러진 만행 가운데 깨물기와 막대기로 꿰뚫기는 무목적적인 잔혹 행위로, 성행위를 하는 도중이나 그 직후에 살아 있는 몸에서 생식기를 잘라 낸 것은 성적 광란의 미친 짓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음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폰 차스트로는 저 광란과 비슷한 정서 장애의 억누를 수 없는 내적 강제 아래 행동한 것이 아닌가?
이로써 내가 스스로 맡은 과제는 다 다루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었던 자료로 풀 수 있는 데까지 그것을 풀었다.
뷔르츠부르크, 1869년 2월, 3월, 4월.
K. H. 울리히스
IV. 이론과 귀결
제49절. 내가 『멤논』에서 가장 자세히 밝혀 놓은, 우르닝 본성의 기원에 관한 나의 자연과학적 이론은 이러하다.
우르닝의 몸의 성은 남성이고, 영혼의 성은 여성이다. 그는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의 영혼)다. 그래서 그는 여자처럼 성적으로 여자에게는 반발을 느끼고 남자에게는 끌린다. 그러나 남자의 몸의 영향을 받아 우르닝의 영혼은 몇몇 부분에서 남성과 비슷해져 있다. 영혼은 그 본질에서는 여성으로 남아 있으면서, 여기저기 이를테면 남성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역설』의 교수는 “불가능하다! 몸과 영혼은 함께 하나의 통일된 존재를 이룰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반박했다고 믿는다. 베를린의 철학자 프라우엔슈테트도 최근 그곳에 있는 내 통신원 한 사람에게 내 이론에 대해 본질적으로 똑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통일성에 맞선 적이 없으며, 인간의 통일성 때문에 내 이론이 궁지에 몰리지도 않는다. 일은 아주 간단하다. 통일된 인간의 어떤 구성 요소들은 길이 자로도, 제곱인치로도, 세제곱피트로도 잴 수 없고, 파운드나 로트로도 달 수 없다. 사고력, 기억력, 의지력, 결단하는 능력, 정념, 성향, 기질, 감정과 감각의 생활, 성적인 사랑의 동경과 성적인 관능의 욕구가 그렇다. 똑같이 잴 수 없고 똑같이 달 수 없기에 같은 종류인 이것들의 총체를 나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남자와 여자에게서 그 성질이 여러모로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기질, 성향, 사랑 충동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 충동은 정반대로 맞선다. 첫째로는 끌어당기는 대상에서 그렇다. 저쪽은 오직 여자, 이쪽은 오직 남자다. 둘째로는 관능적 욕구의 방식에서 그렇다. 저쪽은 능동적, 이쪽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기질과 성향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 영혼과 여자 영혼의 성을 말해도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르닝의 몸은 남성인 반면, 그의 영혼의 성은, 아무리 수수께끼처럼 보일지라도, 여자의 영혼의 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다. 다만 차이가 있는데, 예컨대 둘째 표지, 곧 수동적인 관능적 욕구에서 벗어나 있다. 이 차이는 우르닝의 영혼과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남자의 몸의 영향, 특히 그의 남성 생식 기관에 깃든 남성의 성적 힘에 그 근거가 있다. 남성 생식 기관의 남성적인 성적 힘과 여성적인 사랑 충동의 여성적인 성적 힘 사이에서 이를테면 땅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싸움의 결말은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여성형 우르닝과 남성형 우르닝과 혼합형이 있다. 우르닝의 사랑 충동이 여성적이라는 것 자체는 모든 태아가 갖추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싹에 그 근거가 있다. 『멤논』 제3~12절, 제73~80절. 나는 내 명제들을 사실의 현실 세계에서 입증했다고 믿는다(일부는 이미 『인클루사』와 『포르마트릭스』에서). 이 논증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우르닝에게서는 남성의 몸과 여성의 영혼이[우르닝긴에게서는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과 남성의 영혼이] 하나의 통일된 인간으로 떼어 놓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우르닝[과 우르닝긴]의 본질은 개인의 통일성 안에서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 있는 성적 이원론(자웅동체성)이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있는 이상,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반론은 속 빈 호두만큼의 값어치밖에 없다. *“inclusa”(갇힌)라는 낱말을 나는 고집하지 않는다. “innata”(타고난)라고 해도 좋다. In verbis simus faciles(말에 대해서는 너그럽자). 덧붙여 거듭 말하지만(『멤논』 참조), 나에게는 나의 자연과학적 이론 자체가 그 모든 귀결보다, 특히 그 이론 때문에 피할 수 없게 되는 형법 조항 폐지라는 귀결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물론 나는 “드레스덴, 1869년 6월 21일” 자로 나에게 이렇게 써 보낸 익명의 인물이 옳다고 자부할 만큼 나가지는 않는다.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의 영혼)라는 당신의 이론을 나는 학문 연구의 가장 빛나는 성과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
*『역설』에서는 몇 가지 그럴싸한 근거로 내 이론을 공격하는 것과 아울러, 우르닝의 존재 자체를 주로 “분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선한 욕설을 홍수처럼 퍼붓는다. 그것도 익명이라는 은신처에서 퍼붓는다. 망명지에서 홀로 사는 한 평범한 개인은 온 세상 앞에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고백한다. “우르닝의 사랑은 자연의 권리에 따라 정당하다.” 그런데 한 의학 교수는 그에게 욕설로 더 편하게 대꾸하려고 숨을 곳을 찾는다. 그가 그렇게 해서 스스로 자초한 패배보다 더 큰 패배를 내 펜이 그에게 안겨 줄 수 있겠는가?
제50절. *나의 이론이 도덕률에 대해 갖는 귀결은 이러하다. 자기에게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대는 디오닝들의 지배적인 의견은 이렇게 말한다. “우르닝의 사랑을 행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부도덕하다. 우르닝은 평생 무조건 자기의 사랑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a. 우르닝의 사랑은 디오닝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 기원을 자연에 두고 있다.
b. 우르닝의 사랑은 디오닝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디오닝의 사랑처럼 개인과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만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클루사』 제100절, 『멤논』 제57절).
c. 우르닝의 사랑에서도 사랑을 행하는 것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d. 자연은 우르닝에게도 이렇게 따를 것을 요구한다. 우르닝에게도 이렇게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자연의 욕구이며, 그것도 몸과 정신의 건강을 지키려면 주기적으로 채워야 하는 욕구다.
e. 어떤 살아 있는 존재에게도 평생 사랑 충동을 억누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이 다섯 가지 근거에서, 디오닝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르닝의 사랑과 그 실행도 도덕률 앞에서 정당하다. [디오닝의 사랑의 실행도 바로 이 다섯 가지 근거에서만 정당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새겨 두기 바란다. 우르닝 앞에서 반신(半神)처럼 굴지 말라. 디오닝의 사랑에 이 다섯 가지 근거가 없다면, 디오닝의 사랑의 실행은 혼인 안에서조차 무조건 파렴치와 부도덕일 것이다(『멤논』 제84절). 또 디오닝의 사랑은 결코 인류에 이바지하는 그 자연의 목적, 곧 생식 능력만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근거 모두로 정당화된다. 디오닝의 사랑에도 그 능력이 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우르닝의 사랑도 성애 일반이 부도덕해지는 조건 아래에서는 부도덕해진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는 논의할 만한 문제다. 그러나 다음만은 확실할 것이다. 도덕률은 자연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평생 무조건 금지할 수도 없고, 이행할 수 없는 조건에 묶어 둘 수도, 곧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우르닝의 사랑에서,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특히 혼인에 의한 인가를 요구할 수 없다. 디오닝의 사랑에서도 형식적인 혼인을 교회조차 무조건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제를 부를 수 없어서 형식적인 혼인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교회도 긴급 혼인을 허용한다. 거기서는 종교적 축성을 전혀 곁들이지 않고 enunciatio consensus matrimonialis coram duobus testibus(두 증인 앞에서의 혼인 합의 표명)로 충분하다(『멤논』 제2부 서론 VII 및 제111절). 우르닝의 사랑에서는 지금 형식적인 혼인에 의한 인가는 원칙적으로 전혀 불가능하고, 긴급 혼인에 의한 인가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며, 아니 대개는 사실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것, 곧 디오닝들의 증오 탓이기는 하지만[『멤논』 제1부 주 40, 제2부 XXX쪽 각주], 적어도 우르닝의 탓은 아니다. 그런데 인가의 특정한 형식(종교적 축성 따위)만이 아니라 인가 자체도 덧붙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가가 비로소 덧붙는 대상, 이미 있는 것은 자연의 권리다. 또 인가는 바뀌는 것이기도 하다. 우르닝의 사랑에 대한 인가는 어떤 민족들에게는 이미 있었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 인류의 수호신에게 감사하라 – 오늘날에도 있다(제54절 참조). 반면 자연의 권리는 바뀌지 않는다. 성애의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은 인가가 아니라 자연의 권리다. 교회조차 이 원리를 인정하는 것 같다. 저 긴급 혼인이 바로 이 원리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가가 가능한 곳에서는 나도 무조건 인가를 요구하고 싶다. 교회가 사제의 입회가 가능한 곳에서는 무조건 그것을 요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 이 명제들에 무슨 근거 있는 반론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디오닝들이 얼굴도 붉히지 않고 우리에게 설교해 온 것이 우스꽝스러운 사이비 도덕률이 아닌지 묻고 싶다. 특히 평생의 금욕을 개신교 목사가 우리에게 설교할 때는 눈물겹게 들린다. 그 목사는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그리 가혹하지 않다. 족장 시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다산하는 그의 아내가 그것을 가르쳐 준다.(덧붙이자면 나 자신도 개신교도다.)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금하지 않는 이 양반들은 참으로 말하기 쉽다.
*우리의 사랑에서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정당성을 박탈하는 것, 곧 그 생명줄을 뿌리째 끊어 버리는 것은 물론 손쉬운 처리법이고, 동시에 겉보기에 온갖 성가신 논의를 면하게 해 주므로 퍽 솔깃한 수단이기도 하다. 전제 정치는 이런 근본 처방을 좋아하고, 저속한 자유주의의 전제적인 심성도 그렇다. 반론에는 “응하지 않는다.”
*디오닝들은 때때로 이렇게 자문해 보기 바란다. “내가 우르닝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단념하라고? 평생 단념하라고? 그래, 누가 원한다면! 교회조차 단념을 누구에게도 의무라고 선언한 적이 없고, 단념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선언한 적도 없다. 도덕률 앞에서도 인권은 있다. 도덕률 앞에서도 인권을 단념하거나 단념하지 않을 자유는 있다. – 교회는 어째서 발칸반도에서처럼 우리 땅에서도 진작 우르닝에게 제단 앞에서의 표명(enunciatio)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 자세한 것은 『멤논』 제58절, 제111절, 『아라 스페이』 제114절, 제118~120절, 『아라 스페이』 제23절, 제28절 이하를 보라.
*자연의 선물은 고르게 나뉘어 있지 않다. 자연에게는 친자식과 의붓자식이 있다. 그러나 도덕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도덕률은 두 가지 잣대로 잴 수 없다. 친자식에게 허락된 것이 의붓자식에게 죄일 수는 없다. 도덕률에게는 의붓자식이 없다. 우르닝은 자연의 의붓자식이다. 그의 사랑은 디오닝의 사랑이 때때로 그러한 것, 곧 열매 맺지 않는 꽃이다. 생식할 수 없는 꽃은 창조 세계에 바닷가 모래알처럼 피어 있다. 그러나 열매 맺지 않는 꽃에게도 필 권리, 아침노을에게 꽃받침을 열고 그 신비를 치를 권리가 있지 않은가? 친자식에게 허락된 것이 의붓자식에게 죄일 수는 없다.
제51절. *형법에 대한 귀결은 이러하다. 우르닝도 법치 국가의 정당한 시민이다. 그런데 시민으로서 그는 입법자에게, 그에게도 정의의 기초를 지키고 그와 디오닝을 두 가지 잣대로 재지 말라고 요구해도 된다. 곧 그가 과잉 행위(권리 침해)를 저지르지도 않고 공공장소에서 수치심을 해치지도 않는 한, 그에게 기준이 되는 자연법칙에 복종한다는 이유로 그 역시 처벌받지 않기를 요구해도 된다.
*베를린의 《베오바흐터 안 데어 슈프레》 1869년 5월 10일 자와 6월 14일 자, 그리고 베를린의 《트리뷔네》 6월 1일 자가 『인쿠부스』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베오바흐터》는 남자 사랑을 처벌하지 않는 것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데 나와 의견을 같이한다. “사람은 자기 몸을 자유로이 처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우리 몸을 망치거나 해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솔직하고 터놓고 말하게 해 주기 바란다. 《베오바흐터》는 우르닝의 사랑의 쾌락이 지닌 여러 방식 가운데, 사람들이 유일한 방식으로 떠올리는 데 익숙해진 것, 곧 계간을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우르닝에게만 속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디오닝의 사랑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거기서는 변덕일 뿐 어떤 자연의 필연성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토록 분개하며 늘 우르닝에게 쏘아 대는 이 화살은 디오닝에게 되튀어 돌아온다. 예컨대 파리에 관해서는 파랑뒤샤틀레의 『매춘에 관하여』(제1권 225쪽, 카스퍼에게 인용됨)를 참조하라. 남쪽 나라들에서는 계간이 디오닝의 사랑에서 심지어 대단히 널리 퍼져 있다. 그곳에 오래 머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아주 분명하게 증언한다. 어떤 논거로 계간과 싸우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망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르닝의 사랑에서 그것이 몸을 망친다는 것은 이미 카스퍼가 어리석은 할머니 옛날이야기라고 선언했다.(물론 강제와, 덜 자란 소년을 겁탈하는 경우는 빼고. 『법의학 편람』 제4판, 1864, 제1권 165·166·168쪽, 『임상 단편집』 40·41쪽.) 오래전에 반박된 이런 꾸며 낸 이야기를 왜 자꾸 되풀이하는가? 『글라디우스 푸렌스』 20~23쪽 참조.
*우르닝의 사랑 충동은 경우에 따라 계간으로 이어지는 충동이다. 디오닝의 사랑 충동도, 우리가 보듯이, 경우에 따라 계간으로 이어지는 충동이다. 디오닝들의 정의감을 잘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이 디오닝 계간자를 두고 “인류의 치욕 기둥”, “역병”, “파렴치한 원숭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역설』 참조).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현행 형법이 디오닝의 계간을 그냥 – 자, 선생,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그 법을 만들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 그냥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헌법, 기본권, 순진한 좌파 의회 연설가들은 “모두에게 평등한 권리”니 “법 앞의 평등”이니 하고 즐겨 딸랑거린다. 다만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당장 전제 군주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울리는 놋쇠가 무엇 때문에 있겠는가, 가끔은 그것으로 딸랑이는 방울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6]
V. 우르닝 세계에서
제52절. * 이사벨 2세의 부군 돈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이사벨 곁에 마르포리라는 이름을 대는 것은, 자연의 얼굴을 후려치며 맺어진 혼인의 어그러진 사정 가운데 겨우 절반을 건드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7] 국가 이해타산이 그녀와 짝지어 준 에스파냐의 왕자는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없었고, 혼인의 행복도 사랑의 행복도 애당초 여자에게 줄 수 없었다. 그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연에 반하는 혼인, 혼인의 일그러진 꼴을 만들어 냈다. 이사벨을 남자를 사랑하는 우르닝에게 묶어 놓은 것이다. 돈 프란시스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내면이 여자인데, 대다수 우르닝보다 훨씬 더 그렇다. 여자의 수줍은 온순함이 그의 정서 전체의 바탕을 이룬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여자 손일, 특히 자수다. 무엇보다 그는 카바동가의 성모(nuestra sennora de la Cabadonga)에게 손수 재단한 비단옷을 바느질하고 수놓아 드리기를 좋아한다. 바늘, 뜨개바늘, 가위, 수바늘을 다루는 솜씨가 젊은 아가씨들, 아니 여성 모자 장인들도 부러워할 만하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맑고 가성 같다(『멤논』 제86절 d, 제92절 참조). 어떤 디오닝은 “그의 목소리가 하도 눈에 띄어서 나는 거의 깜짝 놀랐다”고 전한다. 구스타프 라슈는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 보낸 마드리드 통신(1869년 2월)에서 시종 악의적인 서술 방식으로 그 목소리를 “꽥꽥거린다”고 한다. 그가 혼인할 때부터 프랑스 신문들은 그가 남자가 아니라고 비웃었다. 신문들은, 그가 자기의 진짜 성향에 대해 사람들 눈에 모래를 뿌리려고 최근 한 무용수와 관계를 맺었다고 전했다.(우르닝 겁쟁이들이 흔히 쓰는 잔꾀다.) G. 라슈는 프란시스코의 관계 두 가지를 전한다. 하나는 그의 피아노 선생 노릇을 한 나바라 출신의 겔벤수와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세비야의 거리 악사였던 메네세스와의 관계다. 라슈는 “무슨 정념이 그를 겔벤수와 맺어 주었는가?”라고 묻고는 “이곳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정념이라고 짐작한다”고 덧붙였다. 메네세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도 자주 들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겨우 몇 해 전이다. 그 무렵 메네세스는 남성적인 젊은 아름다움의 눈부신 화신이었음이 틀림없다. 메네세스에 대한 그의 열광은, 자기 마음의 연인에게 공작 작위를 주라고 각료 회의에서 요구할 정도에 이르렀다. 여왕이 이미 “목욕탕 공작(Duca del Banno)” 임명에 서명하려던 참에 법무 장관이 부서(副署)를 거부했다. 장관은 유럽의 비웃음을 두려워했다. 그때 마드리드는 나르바에스의 절대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튿날 밤 메네세스는 다짜고짜 체포되어 곧바로 프랑스 국경 너머로 보내졌다. 이상의 내용은 대부분 이미 공표되었다. 《빈 포어슈타트차이퉁》 1868년 10월 15일 자, 《그라츠 타크블라트》 1868년 10월 16일 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1869년 2월, 《빈 타크블라트》 1869년 2월 26일 자. G. 라슈가 그 밖에 메네세스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그전에 한 러시아 부인이 그를 알게 되어 여행 동반자로 데리고 다녔다. 몰타에서 그 부인이 살해되었다. 그녀의 귀중품들이 사라졌다. 동반자에게 강도 살인 혐의가 씌워졌다. 그곳의 영국 당국이 그의 체포를 명했다. 그는 도망쳐 체포를 피했다. 몇 해 뒤 사람들은 마드리드 거리에서 그가 프란시스코와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G. 라슈는 또 “프란시스코와 그 패거리”가 젊은 처녀들을 교육하는 살레사스 레알레스 수녀원에 밤에 침입한 일도 전한다. 그러나 그는 장난기 많은 디오닝들의 동행자로서 끼었을 뿐이지, 처녀들에게 끌려서 그랬을 리는 없다. 아마 이번에도 “모래를 뿌리려고” 그랬을 것이다. 메네세스는 지난겨울 다시 파리에 있었고, 예전처럼 다시 프란시스코의 측근에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총아로는 C.라는 이름의 지체 높은 젊은 영국인을 들었다. 프란시스코는 마흔두 살쯤이다. 지난겨울 그를 본 한 파리 사람은 그의 외모가 호감을 주며,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고 내게 묘사했다. – 알려진 대로 그는 이사벨의 아버지의 형제의 아들, 곧 사촌이다.
*프란시스코와 이사벨 말고도 유럽에는 남편이 우르닝인, 왕위에서 쫓겨난 왕실 부부가 또 한 쌍 살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더 큰 명예를 지닌 채 내려왔다). 왕좌가 무너진 뒤 언젠가 왕비가 남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나는 왕비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구나!”
*또 다른 경우에는, 사제가 축복을 내리기 전에 제때 알아챈 성적 반발이, 사랑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무지가 맺은 끈을 풀어 주었으니, 양쪽 모두 얼마나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메클렌부르크의 구스타프 공작은 1830년과 1840년 사이에 50~60세로 죽었다. 루트비히슬루스트의 빌라 구스타바와 슈베린의 겨울 궁전에는 공작이 손수 수놓은 덮개를 씌운 가구만 놓인 방들이 있다. 그가 우르닝이라는 것은 온 나라가 안다.
제53절. * 모스크바. 그곳에는 예전에 참으로 소녀 같은 아름다움으로 눈에 띄던 우르닝이 한 사람 산다. 언젠가 그는 비로드와 비단으로 차려입고 한 무도회에서 젊은 귀부인을 어찌나 감쪽같이 연기했는지, 그리고 여자다운 우아함으로 디오닝들의 눈길을 어찌나 끌었는지, 귀족 한 사람에게서 그곳 관습대로 발에 입맞춤하는 경의를 받았다. 그곳 우르닝 사회에서 그는 그 일로 “크냐기냐”, 곧 “공작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늘날에도 그 별명을 적잖이 뽐낸다.
*그곳의 또 다른 우르닝은 몸집이 커서 영락없이 들통나는데도 여자 옷을 입고 춤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예전에 척탄병 연대의 기준병이었다!
*모스크바의 두 우르닝은 둘 다 독일계 개신교도로 20대였는데, 서로 사랑했다.(한 사람은 아마 남성형 우르닝에, 다른 사람은 여성형 우르닝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은 (1857년쯤) 자기들의 사랑의 맹약을 봉인하고 정절을 맹세하는 뜻으로 그곳의 한 개신교회에서 함께 성찬을 받았다. 이로써 그들은 우르닝이 그토록 아프게 아쉬워하는, 우르닝의 사랑의 맹약을 인가하는 형식을 스스로 생각해 내어 찾았던 것이다.(위의 제50절, 『아라 스페이』 제148절, XXIII쪽.)
제54절.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1868년 12월 10일 자로 이런 편지를 받았다. “여러 민족에게서 감정 생활의 현상이 이토록 서로 다르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것은 대부분 틀림없이 혈통의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와 아울러, 그 현상이 약하게 피어나느냐 힘차게 피어나느냐는 식물이 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후와 기온과 지리적 조건 전반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알로에 꽃대 하나가 자라는 데 온갖 인공적인 도움을 주어도 여기 가장 메마른 달마티아 바위섬에서보다 열 배나 오래 걸립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신경 섬유가 펼쳐지는 것도 같은 비율로 여기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향연』의 황금 술잔에 비치는 저 생각을 – 플라톤의 『향연』은 우르닝의 사랑을 다룬다 – 당신은 이제 오리엔트와 남슬라브 민족들에게서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독일 사람들의 차가운 심장 박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 그리스의, 아티카 사람답게 절도 있으면서 한편으로 가볍게 옷자락을 걷어 올린 관계조차 정념의 깊이에서는 남슬라브인들에게 훨씬 못 미칩니다. 발칸반도 전역에서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대의 숭배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오리엔트 사람의 내밀함과 깊은 내면성에 맞추어 열광적이고 관능적인 신비주의가 되었습니다. 주고받은 언약은 여기서는 제단 앞으로 이어집니다. 관습은 의식을 요구합니다. 그 의식을 치르는 방식은 양쪽이 이 맹약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는 뜻깊은 상징입니다. 이 맹약은 대대로 물려받은 옛 이름을 충실히 이어 갑니다. 거룩한 의례에 따라 한번 섞인 피는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끈을 맺습니다. 이렇게 끊을 수 없다는 데서, 축성 없이 맺은 어떤 인간적 결합과도 전혀 다른 의무가 생기지만, 또한 전혀 다른 힘도 생깁니다.”[8](알바니아인의 우르닝 사랑의 열정: 『멤논』 제31~32절, 알바니아인의 맹세와 질투: 『아라 스페이』 X쪽, 에페이로스 등지의 인가 형식: 『아라 스페이』 XXIII쪽. 다음 책에서는 자세한 사실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멤논』 제111절.]
제55절. * 런던. 1869년 6월 초 그곳의 한 젊은 상인은 한 젊은 남자에게 품은 사랑의 동경을 거절당했다. 그는 절망을 어찌나 깊이 마음에 새겼는지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았다. 그는 곧바로 심장을 겨누었다. 총알은 실제로 가슴을 꿰뚫었다. 그런데도 기적처럼 중요한 장기는 다치지 않았다. 물론 꼬박 3주 동안 그는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갔고, 마침내 의사들이 살 가망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상처는 아직 곪고 있었지만, 이미 점점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상대는 그를 더는 자기 잔인함의 희생자로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하게 그를 대했다. 그는 몸을 바쳐 간호했다. 밤낮으로 그토록 중상을 입은 이의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친 이에게는 잠과 열에 들뜬 헛것에서 깨어날 때 연인의 눈길과 마주치는 것보다 더 달콤한 위로가 있을 수 없었다. 그가 회복되는 대로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로 요양 여행을 떠나려 한다. 덧붙이자면 상대는 결코 디오닝이 아니다. 내 독자들은 이미 그를 안다. 『멤논』에 나오는 젊고 분방한 우르닝 비올라다. 이 사건에 대해 나는 두 가지 보고를 받았는데, 둘 다 제3자에게서 왔다. 첫 보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48시간 뒤 그는 위험을 벗어난 듯했다. 그러나 7일째가 지나자 한 사고 때문에 비로소 참된 생명의 위험이 닥쳤다. 그 위험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비올라는 미치기 직전이다.” 나는 비올라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안다. 다친 사람도 훌륭한 젊은이라고들 내게 묘사한다.
제56절. *베른에서 1869년 3월 1일 자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소식을 알려 왔다. “그의 약혼 직후, 그러니까 2년쯤 전에, 이곳 《인텔리겐츠블라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른 아침 왕궁 계단에서 젊고 싱싱한 마구간 하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머리에 총을 쏘았는데, 아마 약혼과 다가오는 혼인을 비관한 탓인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인텔리겐츠블라트》는 그 소식을 독일의 어느 신문에서 따왔을 것입니다.” 그 소식이 내게는 처음 듣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알아보았다. 소득은 없었다. 그곳에서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수도에서도 그 소식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소식이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내가 그 결과를 베른에 알리자 이런 답장이 왔다.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거의 똑같이 뜻깊어 보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마구간 하인의 심장인들 어찌 우르닝답게 뛰지 못하겠으며, 어찌 절망에 빠지지 못하겠는가? 어쩌면 그는 감히 스스로 눈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던 차에, 단 한 번의 다정한 눈길로 낙원에 들어선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제57절. *파리에서 우르닝을 노린 강도 살인 소식을 알려 왔다.(『멤논』 제119·120절 「자살과 살인」 참조.) 1868/69년 겨울 그곳에서 한 젊은 디오닝이 우르닝의 사랑의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한 부유한 우르닝의 거실인지 침실인지에 들어갔고, 제3자가 없는 틈을 타 그를 살해했다. 자세한 것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범행 직후 체포되어 이미 재판에서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공모자 무리 전체와 손잡고 범행했다.
제58절. * 로마. 오래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로마에서 돌아온 한 참사회원이 소식을 가져왔다. 내 저작들이 그곳에 있으며, 벌써 금서 성성이 그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성이 그것을 실제로 금서 목록에 올린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라고 편지는 덧붙였다. “로마의 신학자들은 『역설』의 교수보다 더 철저하게 일합니다.” 금서 목록에 오를 경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포르마트릭스』 IX·X쪽을 보라.
제59절. * 함부르크. 1850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오스트리아군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을 때, 둘 다 우르닝인 오스트리아 기병 장교 두 사람이 N. …라는, 한창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이를 알게 되어 둘 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열여덟에서 스무 살쯤으로, 포도주 상점의 견습생이었고, – 그 자신도 우르닝이었다. 두 사람 다 잘생겼으므로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열을 올렸다. 그들이 잘생겼기에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자랑스러워했다. 두 사람 사이에 질투가 생겼고, 질투에서 결투가, 권총 결투가 생겼다. 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제60절. * 뷔르츠부르크. 내 저작들은 여기저기서 전혀 뜻밖의 효과를 내는 모양이다. 『멤논』에 묘사한 우르닝의 여성적 특징을 디오닝 대학생들이 장난으로 흉내 내는 것을 나는 내 눈으로 보았다. 이곳 학생 단체 「레나니아」 코르프스의 학생 두 명이 1869년 6월 22일 이곳 역 승강장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다란 흰 망사 띠를 손에 들고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멤논』에서처럼 서로를 “콩테스”(백작 영애)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학문 연구를 진지하게 여기는 한 미국인이 내 저작들을 읽었다. 1869년 8월 2일 그는 수혈, 곧 내 피를 수혈받아 한 번쯤 14일가량 우르닝으로 바뀌어, 그동안 자기 몸으로 우라니즘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나에게 직접 밝혔다. 『포르마트릭스』 서론 XVIII쪽 참조.
제61절. *『멤논』과 『글라디우스 푸렌스』는 1868년 8월 슐라이츠에서 검사에게 임시로 압수되었다. 1869년 3월 17일 슐라이츠 군 법원의 판결로 두 책은 “음란한 저작”으로 몰수되었다. 6월 23일 아이제나흐 항소 법원의 판결은 몰수를 다시 취소하고, 열 달 동안 봉인되어 있던 두 책을 음란한 저작이 아니라 학문적 저작이라 하여 확정적으로 해제했다.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대학 교수 네 사람이 몰수에 단호히 반대하는 의견을 서면으로 밝혔고, 그 성명을 나를 통해 제출하게 했다. 빈의 로키탄스키, 뷔르츠부르크의 폰 밤베르거와 가이겔, 그라츠의 테베스다. 반면 베를린의 그나이스트와 피르호는 이에 동참하기를 거절했다. 이로써 이제 나의 저작 여덟 권은, 그 가운데 네 권이 몰수되었다가, 모두 자유롭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카셀에서는 그곳 프로이센 왕국 경찰청이 이상하게도 (표제지에 이름이 나온) 서적상 뷔르텐베르거에게 『글라디우스 푸렌스』의 판매를 이유도 밝히지 않고 100탈러의 벌금 또는 6개월 징역에 처한다고 위협하며 금지했다. 그 금지(1868년 5월 14일)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Habent sua fata libelli(책에는 저마다 운명이 있다). – 1868년 10월 26일 슐라이츠에서 작성되고 검사 F. 호른이 서명한 공소장에서는 “음란성”을 이렇게 이끌어 낸다. “이 성애를 채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정당화하면 도덕이 침해된다. 그런데 성의 영역에서 도덕을 침해하는 것은 음란이다. 그러므로 저 저작들은 음란한 저작이다.” 여기서 한 날랜 곡예사가 지배적인 도덕 개념과 도덕률 자체 사이의 골짜기를 뛰어넘는 공중제비(salto mortale)보다 더 대담한 것이 있겠는가? – 위의 공소에 맞서 아이제나흐에서(1869년 6월) 그곳의 변호사 헤링이 저작들을 변호했다.
제62절. * 빈. 털이꾼 둘. 이런 편지를 받았다. “빈, 1869년 6월 13일. 어제 오전 11시 나는 이곳 볼차일레 거리 끝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잘생긴 군인들과 잘생긴 민간인 청년들에게는 아마 좀 더 오래 눈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쯤 되고 말씨로 보아 베를린 사람인 잘생긴 젊은 남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곳이 처음이고 여행에서 막 왔으니 먼지를 털어 내고 싶다며, 목욕탕을 알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나는 그를 목욕탕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아주 상냥했고 믿음이 갔습니다. 거기 도착해서 나는 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목욕을 마친 뒤 함께 더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자기와 같이 목욕하자고 청했습니다. 나는 응했습니다. 우리는 탈의실 하나를 같이 썼습니다. 둘 다 옷을 다 벗고 소파에 앉았을 때, 나는 그토록 오래 참아 온 열정에 압도되어 그를 껴안았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타오르는 사랑의 갈증을 달랬습니다. 다시 옷을 입었을 때 그는 내게 선물을 요구했습니다. 그제야 눈이 뜨였습니다.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3굴덴을 주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2굴덴을 더 얹어 주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다며 그는 벌써 초인종 줄을 잡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돈을 치렀고 우리는 목욕탕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쑥한 신사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여러분! 목욕탕 감독관의 신고에 따라 두 분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장 경찰서로 따라오십시오.’ 내 동행은 울부짖으며 나를 욕하기 시작했고, 내가 5굴덴으로 자기를 유혹했다고 떠들며 자기는 결백하다고 맹세했습니다. 그가 어찌나 소란을 피웠는지 벌써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찰관’에게는 이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우리를 외진 골목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먼저 내 동행에게서 5굴덴을 받아 내고, 이어서 나와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0굴덴으로 자기의 침묵을 사라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차라리 경찰서로 끌려가겠소.’ 다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 바람에 결국 나는 그에게 아직 지니고 있던 것을 다, 곧 5굴덴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으로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는 벌써 금줄 달린 내 시계에 손을 뻗었으나, 나는 다행히 제때 그 손을 막았습니다. 운 좋게도 바로 그때 삯마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나는 재빨리 올라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빈에는 잘 조직된 패거리가 있어서 이 수지맞는 장사를 아주 용의주도하게 벌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이 나를 덮쳤습니다. 눈물이 고였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너는 그런 악당 짓의 희생자였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밤은 잠 못 이루거나 무거운 꿈속에서 보냈습니다. 나에게 이 숙명적인 자연의 충동을 주고서 그것을 채울 방도는 마련해 주지 않은 창조주의 지극한 정의를 나는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요즈음 나는 채워지지 않은 충동의 삼키는 불길이 내 안에서 날뛰는 것을 어느 때보다 더 느낍니다.”
제63절. 베를린. 차스트로 사건이 베를린 주민에게 준 인상은 압도적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관해 입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다. 민중의 말에는 벌써 새로운 표현 두 가지가 자리 잡았다. “차스트로 같은 놈”과 “차스트리렌하다”(우르닝식으로 겁탈하다)이다. 이를테면 “너를 차스트리렌해 주마”는 아예 병영 은어가 되었다고 한다. “차스트로 같은 놈들”에 대한 증오는 건전한 상식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져서, 벌써 디오닝들 자신에게까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카페나 연주회장에서 옆 사람 귀에 대고 “저기 저 신사는 차스트로 같은 놈이야”라고 속삭이기만 하면 몇 분 안에 소동이 일어나고, 지목당한 사람은 설령 실제로는 디오닝이라 해도 거기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프라이엔발데의 한 시 참사회원은 디오닝인데 기차로 도착했다. 그에게 구걸했다가 퇴짜를 맞은 부랑자 하나가 그의 뒤에 대고 “저놈이 차스트로 같은 놈이다!” 하고 외치자, 몇 분 만에 폭도가 떼 지어 그를 둘러싸고 모욕했다. 달려온 경찰관들을 맞이한 것은 그사이에 군중의 창조적인 집단 상상력이 지어낸 완벽한 이야기 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 보호받았느냐고? 천만에! – “차스트로식” 습격의 혐의자로 일단 체포되었다! 그러자 베를린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제 인신의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아우성쳤다. 이런! 이런! 제 자신과 경찰을 속인 그 민중의 분노를 부추기는 데 그들 자신이 톡톡히 한몫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써 보냈다. “베를린, 1869년 8월 8일. 얼마 전 리베노네 술집에서 몇몇 신사가, 디오닝들인데, 한 탁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탁자에 신사 두 사람이 와서 앉았는데, 그중 하나는 젊은이로, 장난스럽게 교태를 부리고 꾸민 몸짓을 하는 바람에 곧 그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우르닝의 냄새를 맡고 늘 하던 빈정거림을 시작했다. 마침내 한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젊은이, 당신 꼭 차스트로의 형제처럼 생겼구려.’
젊은이: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죠. 차스트로의 절친한 친구시니 당신이야 당연히 아시겠죠.’
디오닝 1:
‘내가 그 사람 친구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아시오?’
젊은이: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닮은 점을 알아보실 리가 없잖아요.’
디오닝 2(디오닝 1에게):
‘이봐, 그냥 가자. 안 그러면 차스트로 패거리가 끝내 우리까지 차스트로해 버릴라.’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웃었다. 몇 마디 더 실랑이를 주고받은 끝에 디오닝 신사들은 그러나 졌다고 느끼고는 입을 다물고 – 자리를 떴다.”
제63b절. *8월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이 또 빈정거렸다. “폰 슈바이처가 베를린 미장이 파업에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젊은 미장이 직인들을 각별히 좋아한다는 것은 만하임 법원 기록이 잘 말해 주니까!”
*아이제나흐 노동자 대회(1869년 8월)[9] 뒤에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이렇게 말했다. “폰 슈바이처는 그 음행 소송으로 사생활에서 충분히 낙인이 찍혔으므로, 생각 있고 편견 없는 사람들을 더는 속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마에 찍힌 정신적인 카인의 표 같은 것이란 말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당장 달군 쇠로 그의 몸에 지져 넣지 그러는가? 정신적인 표는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 100명 가운데 99명 눈에는 아예 띄지도 않으니 말이다.
*《노이에 뷔르츠부르거 차이퉁》 1869년 8월 16일 자 기사(내용으로 보아 제11절의 한 소식을 보충한다)의 필치는 눈여겨볼 만하다.
“제2의 차스트로. 베를린의 한 상인이 어제 자기 ‘애인’인 도배공 조수와 함께 자연에 반하는 음행 혐의로 형사 법원에 섰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두 사람 모두 무죄를 선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호색한이 예전에 한 교활한 웨이터에게 약 700탈러를 뜯긴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늙은 신사가 찾아왔을 때 웨이터는 동료 하나를 옷장 속에 숨겨 두었고, 그 동료가 알맞은 순간에 ‘deus ex machina’(기계 장치의 신)처럼 나타나 호색한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상인은 그때 뻔뻔스럽게도 웨이터를 갈취죄로 고발했으나 기각당했다.”
*‘호색한’이 어떻게 ‘뜯기는지’가 필자에게는 물론 더없이 우스운 일이다! 앞서 말한 빈의 사건(제60절)을 읽었다면 그는 아마 배를 잡고 웃었으리라.
*우르닝이 체포되거나, 비열하게 배신당하거나, 모욕당하거나, 그 밖에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그것은 우리의 교양 있는 – 하인들에게? 천만에! 우리의 교양 있는 교양인들에게 만족을, 아니 즐거움을 준다. 이것을 보면 나는 늘, 우리 가축 가운데 한 종이 그 특유의 교미 방식 때문에 거친 손에서 날아오는 돌팔매를 숱하게 맞는 일, 그리고 돌팔매와 시달리는 짐승의 비명이 둘러선 사람들에게도 걸핏하면 즐거움거리가 되는 일이 떠오른다.
*다음 경우에서는 Deus ultor(복수하는 신)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거의 보는 듯하다. 슈베린에 한 고급 장교가 살고 있는데, 그는 한 우르닝의 삶의 행복을 영혼에 짊어지고 있다. 일찍이 냉혹하고 잔인하게 그 우르닝을 생계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그 일은 당시 해당 군인 사회에서 “모두의 만족” 속에 받아들여졌다. 기이한 운명이 창끝을 되돌렸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의 삶의 유일한 희망이요, 그가 눈동자처럼 지키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이가 자라자, 보라, 무엇이 드러났는가! “Καὶ σὺ τέκνον?”(너도냐, 내 아들아?)[10] 그렇다. 그는 우르닝이었다! 복수자가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무엇을 더 묻겠는가? 그대는 그가 폭풍우 속에 불꽃을 일으키며 바위와 골짜기를 넘어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가? 우라니데(우라노스의 자손, 곧 우르닝)여, 우라니데여, 그대의 복수자도 언젠가 달려오리라.
제63c절. 베를린 경찰이 그곳 우르닝 2000명 넘게에 대해 인상착의와 계속 갱신하는 신상 기록을 적은 비밀 명부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머리말 2 참조.) 양쪽의 목적이 조금(대략 남극과 북극만큼) 다르지 않다면, 내가 나대로 암호로 적어 두는 신상 기록으로 저 명부를 여기저기 보충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내가 청할 유일한 사례는 작은 호기심 하나를 채워 주는 것이다. 저 명부가 이 기록만큼 높은 데까지 올라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혹시 어떤 이름들 앞에서는 멈춰 서느냐는 것이다.
제64절. 베를린의 《뵈르젠차이퉁》 1869년 2월 20일 자는 이렇게 쓴다. “울리히스가 내세웠고 아주 끈질기게, 법률가 대회에서도 주장해 온 요구, 곧 제143조를 삭제하라는 요구가 북독일 연방 형법 초안의 기초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제143조에 해당하는 규정은 초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뵈르젠차이퉁》 3월 5일 자에는 내가 서명한 성명이 실려 있다. “… 저 기초자들이 나의 요구, 곧 우르닝의 성애(성인들 사이의)를 앞으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라는 요구를 들어준 것은 나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내세운 두 번째 요구는 그것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곧 지금 성애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수많은 우르닝을 자유의 몸으로 돌려보내라는 요구다. 그런데 앞의 요구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 이 요구도 근거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제64b절. *베를린 경찰은 이제까지 그 희생자들의 명부를 만들어 왔듯이, 이제 그곳 털이꾼들의 명부도 만들려 하고 있다. 물론 자연을 박해하는 법률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동안에는 이 조치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법률이 무너질 날이 머지않았으니, 사기꾼들의 짓거리를 실제로 끝장내는 데 이바지할 준비를 벌써 지금부터 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나는 모든 우르닝에게, 자기가 아는 털이꾼 – 매복꾼이든 미끼든 – 의 이름, 나이, 신분, 신상 정보를 경찰 당국에 보내 주기를 촉구한다.(보낸 이가 우르닝으로 정체가 드러나기를 꺼린다는 점을 밝힌다면, 이름을 적지 않은 제보도 아마 참작해 줄 것이다.) “털이꾼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은 앞으로 덫에 걸린 우르닝들이 단 하나의 참된 구원책, 곧 털이꾼을 현행범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에 손을 뻗을 용기를 크게 북돋울 것이다. 이제까지 당국의 눈에 우르닝은 범죄자의 후광을 두르고 있어서, 아무 놈이나 아주 충성스럽게 그를 “마땅한” 벌에 넘겨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털이꾼의 밀고자 역할은 끝장이 나고, 오히려 경찰은 우르닝이 그런 자들을 그 지역에서 쓸어 내는 일을 쉽게 해 주면 그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제64c절. *경고. 『멤논』 제118절 3에서 나는 브레멘의 피고인 펠트만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신당했는지 이야기했다. 그의 신뢰 속으로 슬그머니 파고들었고 그 자신도 우르닝이었던 필징어라는 털이꾼에게서였다. 이 위험한 인간이 그 뒤에 저지른 새 짓을 누군가 내게 알려 왔다. 그를 경계하라고 알리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기센에서 유복한 집안의 아주 젊은 우르닝 하나가 그를 보았다. 이 젊은이가 대번에 자기의 검은 눈의 그물에 걸려든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그 젊은이의 미숙함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노련한 그는 우선 젊은이에게서 100굴덴을 짜내는 데 성공했지만, 물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젊은이는 더는 줄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의심을 품고 더 보내 주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필징어는 제 먹잇감을 그렇게 빨리 놓아줄 사내가 아니었다. 겁에 질린 젊은이를 그는 문어의 팔로 휘감듯 붙들었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알리겠다는 협박으로 자기 요구에 필요한 무게를 더했다. 그래도 더는 아무것도 뜯어내지 못하자, 그는 정말로 고용주에게 가서 모든 것을 일러바쳤고, 고용주는 곧바로 젊은이를 해고하고 그 일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카를 빌헬름 오토 필징어, 약 28세, 프로이센 태생, 한동안 배우였음.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키는 중키보다 조금 큼. 머리는 갈색. 맵시 있는 금발 콧수염을 기르고, 세련된 최신 유행 옷을 입으며, 화장으로 얼굴을 창백하게 꾸민다. 큰 도시와 휴양지에만 행차하며, 즐겨 펠제크 또는 폰 펠제크 남작이라고 자칭한다. 기센에서도 폰 펠제크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마인츠. 마인츠의 한 고위 가톨릭 성직자가 얼마 전 이렇게 인정했다. “누마 누만티우스가 그리는 대로의 우르닝 사랑이라면 확실히 죄가 아닌 성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디오닝의 사랑이 죄가 되는 것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뿐이다.”
*베른의 대학 교수 막시밀리안 페르티 박사께, 1869년 9월 9일 자 서신에 답하여, 그리고 베를린의 법학 박사 프라거 씨께, 같은 날짜 편지에 답하여.
여자를 실컷 즐겨 물린 끝에, 또는 수음 때문에, 디오닝에게 소년과 젊은이에 대한 성욕이 깨어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감염된 디오닝이 우르닝 집단의 가장 주된 신병 공급원이라고요? 그러나 이 물려받은 우화를 어떻게 아직도 되풀이할 수 있습니까? 인쇄되어 있기는 하지요! 대대로! 확실하게 확인된 사례를 단 하나만이라도 보여 주십시오! 이미 카스퍼도 이 공상에서 물러섰습니다. 디오닝의 본성이 여기서 – 디오닝들 자신에 의해! – 그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타락하기 쉽고 그렇게 경멸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VI. 형사 사건
제65절. * 폰 차스트로에 대한 배심 법원 심리. 1869년 7월 5일.
1) *내 앞에는 7월 6일 자 세 신문, 곧 《트리뷔네》, 《베를리너 게리히츠차이퉁》, 《푸블리치스트》의 자세한 보도가 놓여 있다. 《트리뷔네》와 《게리히츠차이퉁》은 목판화 삽화도 함께 실었다. 《트리뷔네》는 법정, 판사들, 폰 차스트로, 변호인, 소년 한케(꽤 생생하게 그려졌다)를 실었고, 《게리히츠차이퉁》은 초상 하나를 실었는데, 폰 차스트로의 것이라고 하지만 개코원숭이의 초상인 듯하다. 《게리히츠차이퉁》의 보도 전체는 독에 담근 펜으로 쓴 것이다. 《푸블리치스트》만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보도한다. 덧붙여 《트리뷔네》를 보고 알게 된 것인데, 《게리히츠차이퉁》이 작가 위터보크가 쓴 “폰 차스트로를 편드는 저 유명한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 심리는 정식 배심 법정이 아니라 형사 구치소 건물의 한 방에서 열린다. 《트리뷔네》: “민중 사이에 퍼진 흥분 때문에 폰 차스트로를 거리를 지나 호송하려 하지 않았다. 군중이 몰려들까 우려했던 것이다.”(제45절 참조.) 심리는 한케 사건만 다루었다. 더 어려운 코르니 사건의 수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게리히츠차이퉁》 8월 13일 자에 따르면, 이제 뉴욕에서 코르니 사건에 관해 폰 차스트로와, 오데르 강변 슈타이나우 출신의 뮐러라는 공범을 겨냥한 꽤 막연한 새 혐의 근거가 베를린에 신고되었다고 한다.] 재판장은 델리우스, 검사는 헨케, 변호인은 홀트호프. 일반인의 방청은 금지되었으나 언론 대표들은 허용되었다. 공소장 낭독, 피고인 신문, 책임 능력 감정을 구하는 변호인의 신청, 이를 위한 의사 세 사람의 신문, 그리고 연기 결정이 이어졌다.
2) *공소장에서. 반쯤 얼어붙은 소년을 발견하고 “누가 너를 이렇게 끔찍하게 만들었니?” 하고 묻자 소년은 “어떤 남자, 어떤 남자! 그 사람은 불도 갖고 있었어요” 하고 외쳤다. 그에게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 집에 사는 여자가 그에게 차를 마시게 하자 입에서 핏덩이가 떨어졌다. 아직 열이 있던 첫 신문 때 그는 줄곧 자기를 학대한 남자 둘에 대해 말했다. 나중에는 이랬다. “수염이 긴 어떤 남자가 그림책을 주겠다고 하더니 저를 깜깜한 다락으로 안고 갔어요. 거기서 저한테 장갑 한 짝을 줬어요. 그 사람은 지팡이로 저를 때리고 물었어요. 그러면서 계속 ‘얘야, 얌전히 있어!’ 하고 말했어요. 그러고는 제 목도리로 제 목을 조르고 저를 러시아식 난방 연통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았어요. 손발로 오래 버틴 끝에 겨우 머리를 빼낼 수 있었어요.”(보다시피 여기서 핵심은 빠져 있다.) 연통에 얽힌 사정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게리히츠차이퉁》은 범인이 목 졸려 죽었다고 생각한 소년을 연통 속에 통째로 숨기려 했다고 보고, 《트리뷔네》는 범인이 소년을 정말로 질식시키려고 머리만 연통에 처박았다고 본다. – 모든 것을 놓고 보면 《트리뷔네》의 말에 동의해도 좋을 것이다. “이 범행은 예전에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인간 본성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3) *그다지 강력하지 않은 여러 혐의 근거를 바탕으로 공소는 이제 범인이 폰 차스트로라고 본다. 그가 강제로 소년을 계간(鷄姦)하고, 이어서 고의로 그리고 숙고 끝에, 곧 희생자의 입을 막을 목적으로 천으로 목 졸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살 미수다. 눈여겨볼 것은 공소가 다음과 같이 본다는 점이다.
a) 계간에 더하여 “그는 희생자의 고통을 즐기려고 학대를 가했다.”(앞의 라발 드 레 등 참조.) 더 눈여겨볼 것은 이것이다. b) “폰 차스트로의 남자 사랑으로 보아, 그가 이 소년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는 결론은 정당해 보인다.”(아래 제66절.)
4) *폰 차스트로의 인물과 견해. 폰 차스트로의 아버지는 육군 중장이었다. 《게리히츠차이퉁》에 따르면 그는 이미 코르니 사건 때 체포되었다가 잠시 구금된 뒤 다시 풀려났다. 한케 사건에서는 범행 당일에 체포되었다. 1852년 그는 “평판이 나쁜 행실” 때문에 드레스덴에서 추방되었다. 폰 차스트로: “한 남자를 악의 없이 건드린 일이었습니다.” 아주 그럴듯하다! 디오닝은 고삐 풀린 채 온갖 성적 방탕에 빠져도 좋고, 처녀를 꾀어 버리고 영아 살해로 내몰아도 좋고, 간통으로 온 가정의 평화를 허물어도 좋다. 경찰은 그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우르닝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경찰 처분의 구실을 찾아내는 데서나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데서나 아주 운이 좋았다. “평판이 나쁜”이라는 형용사는 경찰에게, 자유주의 언론에게 “가면을 벗기다”라는 동사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말이다. 평판이 나쁜 디오닝이란 없다. 드레스덴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있었다면 물론 그를 처벌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법률은 그러기에 더없이 편리하지 않은가! 왜 그를 처벌하지 않았는가? – 재판장: “당신은 한 번도 자제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곧 사랑의 충동을 짓눌러 없애는 데 말이다. 실례지만, 재판장님, 당신은 늘 당신의 사랑의 충동을 짓눌러 없애 왔습니까?
*폰 차스트로에게서 한 가지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내게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위로와 기댈 곳을 몹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새로 공감의 끈을 맺기는커녕 나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단절되었다고 느꼈습니다.”(박해자들의 밀집 대열과!) 오랜 구금의 고통에 꺾여 기댈 데도 위로도 없던 한순간, 그는 감옥에서 하버코른이라는 친구에게 절망의 말을 써 보냈다. “나는 내가 자연에 반하는 범죄자라고 느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죄를 너무 많이 좇았다.” 고문대에 묶여 힘이 꺾였을 때 많은 마녀도 자기가 범죄자요 죄인이라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거의 모두 뉘우치고 회개하며 죽지 않았던가! 물론 그의 구두 진술은 재기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여기저기 서글픈 인상을 준다. 그 안에서 독특한 짓눌림과 쇠약함, 그리고 기이하게 꺾인 의지력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 그것도 구금 뒤에야 생긴 것이 아니다 –. 이는 “너는 폭풍 속에서도 가라앉지 않으리라” 하고 안심하고 외쳐 줄 수 있는 내면의 굳건함과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폰 차스트로는 이렇게 진술했다. “아름다운 남성의 몸매를 좋아하는 마음은 나에게 타고난 것이고 나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 몸에 다가붙고 싶은 충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은 둘이 아니라 셋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 셋째 성에 넣습니다. 이 셋째 성의 성향도 사랑에 있지만, 여자에 대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것 또한 자연이 정당화한 것입니다. 입법은 결코 거기에 재판하며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는 나를 끌어댔다. 《트리뷔네》: “전 배석 판사 울리히스 같은 권위자를 끌어대며.” 《게리히츠차이퉁》: “진술에서 그는 울리히스의 훌륭한 저작들을 끌어댄다.” ‘훌륭한’이라는 말에 이 신문은 빙긋 웃으며 (?!)를 달아 놓았다. 《푸블리치스트》에 따르면 그는 “재기 넘치는 사람들의 논술에 동조했다.” “결혼하는 것은 나에게 진실에 대한 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서로 몸을 가까이하고 접촉하는 데 만족하는 그런 남자 사랑만 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계간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를 끄는 것은 오직 성인뿐입니다. 미성숙한 소년에게 끌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번 일과 같은 잔혹 행위와 야만 행위는 내 본성과 너무나 반대여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5) *책임 능력. 변호인은 폰 차스트로의 책임 능력을 “범행 당시를 기준으로” 조사해 달라고 신청했다. 그의 어머니가 고정 관념에 시달렸고 외할아버지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 이름나 있고 코린스키 소송에도 불려 나왔던 괴팅겐의 루트비히 마이어 교수를 불러 달라고 신청한다. “바로 외부 사람의 의견도 듣는 것이 적절해 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 그런지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누구나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그러니까 주민들의 편견과, 굽히지 않는 법에 대한 위험을 새로이 확인해 준 셈이다.) 재판장: “피고인, 당신 스스로 책임 무능력이라고, 또는 언젠가 그런 적이 있다고 주장합니까?” 폰 차스트로(《푸블리치스트》는 시적으로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몇 번이나 이마를 짚은 뒤”라고 덧붙인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근래 너무나 끔찍한 일을 겪고 너무나 무거운 고난을 견뎌서, 증인들의 책임 능력을 의심하든지 아니면 내 자신의 책임 능력을 의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학 교수 리만, 스크셰츠카, 베스트팔이 출석해 있었다. 재판장의 질문에 베스트팔은 이렇게 밝혔다. “그의 정신적 책임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나는 떨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간질 발작이나 다른 장애에 시달릴 수 있으며, 그런 범행을 저지를 때는 그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개인을 더 오래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만: “앞서 지적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정신 상태, 그리고 피고인의 비정상적인 성적 방향을 고려해야 합니다.”(그러니까 이것도? 앞의 제19·20·22절 참조.) 재판장: “이런 성적 탈선을 지닌 사람들이 대체 정신적으로 책임 능력이 있습니까?”(‘정신적으로’ 책임 능력이 있다고? 베를린에는 책임 능력 있는 몸도 있단 말인가?) 스크셰츠카: “정신병자들은 높아진 성 충동과 성적인 난폭함도 보입니다.” 베스트팔: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나이 든 남자 한 사람과, 여자를 사랑하는 서른 살 처녀 한 사람을 압니다. 두 사람 다 나중에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법원 결정: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세 감정에 따라, 감정인들에게 폰 차스트로를 관찰할 기회를 주기 위해 심리를 연기한다. 마이어 박사를 불러 달라는 신청은 기각한다.
제66절. *제3절에서 나는 사실 문제에 대한 예비적 답변을 이야기했다. 그가 범인이라는 증명이 분명하고 반박할 수 없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개인적인 우르닝 본성으로 돌아가 보아야 할 것이다. “폰 차스트로는 남성형 우르닝인가, 여성형 우르닝인가, 혼합형 우르닝인가?” 하는 선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곧 그가 여성형 우르닝이라면 그가 범인일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남성형 우르닝이나, 뚜렷한 남성형 특징을 지닌 혼합형뿐이다. 여성형 우르닝에게는 미성숙한 소년을 성적으로 건드리는 것도, 대체로 능동적인 성적 쾌락을 찾는 것도 그 본성상 아주 확실하게 거슬린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정반대의 것이다. 『멤논』 제15·16·17·21·83·136절 이하, 제2부 서론 XV쪽 이하. 반대로 증명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거꾸로 거기서 폰 차스트로는 남성형 우르닝, 또는 혼합형이지 여성형 우르닝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아니, 나는 폰 차스트로가 여성형 우르닝일 가능성은 아예 제쳐 두고 더 나아가겠다. 공소장은 남자에 대한 성적 성향이 있다는 데서 소년에 대한 성적 성향도 함께 있다고 추론한다. 이것은 디오닝들이 우르닝 사랑에 대해 얼마나 위험하게 태평스레 어둠 속을 더듬고 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피고인의 자유와 명예가 이런 피상성에 내맡겨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끔찍하다. 나의 경험과 연구에 따르면 성인 남자에 대한 불같은 사랑과 미성숙한 소년에 대한 불같은 사랑은 서로 너무나 달라서 필연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 경우를 나는 한 번도 듣거나 읽은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미성숙한 소년에게는 혐오에 가까운 냉담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안다. 거꾸로 미성숙한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인 남자와 성적으로 접촉하는 데 대해 그야말로 혐오를 느낀다는 점에 대해서는, 『멤논』 제107절에서 언급한 1652년의 이탈리아어 저작 『알키비아데스』에서 고전적인 증언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특히 76·77·97쪽에서 이 혐오를 표현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gracieux(우아하다)와 대비되는 trop gros(너무 크다), chevreau(새끼 염소)와 대비되는 bouc(숫염소), répugnant(역겹다), la viande du bouc est fétide(숫염소 고기는 악취가 난다), en dégoûter(넌더리 나게 하다). 폰 차스트로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방대한 증거 자료는 공소에 아무런 뒷받침 근거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로 충분히 무게 있는 반증 근거가 된다.
제67절. *《베를리너 게리히츠차이퉁》 7월 6일 자는 이렇게 쓴다. “두 범죄를 저지른 자는 베를린의 저 방탕한 난봉꾼들 무리에서 찾아야 했다. 경찰에 – 듣기로는 그 수가 3000에 이른다고 한다! – 표시되어 있는 자들, 음산하고 멍한 눈길로 거리와 산책로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아름다운 성(性)을 싫어하며, 남자와 소년에게 애정을 품은 그런 꼴들 가운데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끔찍한 꼴들이겠다! 아래에 나오는 포르스트너에 대한 빈의 《프레세》 기사, “꽉 다문 입술에 넓은 입”을 참조하라. 《트리뷔네》 7월 6일 자도 폰 차스트로를 이렇게 그린다. “키는 크지만 자세가 축 처져 있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시들고 늘어진 데가 있어서 보는 사람에게 불쾌한 인상을 준다.”(그가 이미 거의 6개월 동안 미결 구금의 느린 고통을 견뎌 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눈은 흐릿하고 생기를 잃은 듯하다. 그러나 가까이서 살펴보면 차갑고 핏기 없는 얼굴 밑에 남모를 불꽃이 숨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르닝들이여, 안심하라.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얼굴은 동전과 흉상으로 실물 그대로 여러 점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그 얼굴은 고대에서 우리에게 전해 온 가장 고귀한 얼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디오닝의 펜 아래서라면 – 그가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 그 얼굴도 곧바로 소름 끼치는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작은 왜곡쯤이야 하찮은 일이다. 그것은 우르닝 앞에서 필요한 도덕적 분노를 연출하는 방식에 원래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차라리 옷 속에 감춘 긴꼬리원숭이 꼬리와 글라세 가죽 장갑을 낀 코끼리 발톱을 우리에게 달아 주지 않는가? 그편이 훨씬 더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기묘하다! 그 묘사에서 몇 줄 위에, 맨 먼저 든 신문의 표어가 보인다.
“우리의 목표는 정의다!”
놀라운 일이다. 이 훌륭한 신문이 이런 길로 이르게 될 정의라면 퍽 유쾌한 정의일 것이다.
제68절. 그리오트 사건. 앞서 말한 아우크스부르크 사제(제14절)는 53세의 주교좌성당 보좌 신부 막스 그리오트로,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의 전례 담당 사제다. 결국 그에 대해 수사가 개시되기는 했다. 12~16세 아이들을 유혹한 일 때문이 아니라 – 그러려면 아버지의 고소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 공공장소에서 성적 행위를 하여 (과실로) 물의를 일으킨 일 때문일 뿐이다. 과자점의 펀치 방이 당시 “공공장소”로 간주된 것이다.(“공공장소”와 과실에 의한 물의 야기에 대해서는 『글라디우스 푸렌스』 28·29쪽 참조.) 1869년 5월 5일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지방 법원에서 8일간의 요새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증인 다섯 명이 세부 사실을 진술했다. 과실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뮌헨의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4월 30일 자는 이렇게 비웃었다. “20년 전부터 소년들을 교육해 온 그리오트는 법정에서 자기의 교육 방법에 대해 해명하게 될 것이다!” 《아우크스부르거 안차이게블라트》 5월 6일 자는 가톨릭 성직자의 치욕스러운 유죄 판결을 고소해한다. “이런 위선자들은 언제나 가면이 벗겨지기를 바란다.” 이런 기사에는 특히 “가면을 벗기다”라는 말이 주는 양념이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빈의 한 신문은 대번에 경련을 일으켰다. 책임 무능력 상태에서 그 신문은 이미 숱한 수난을 겪은 우리말에 “인류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하나 보탰다. – 그리오트는 항소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노이부르크 항소 법원은 6월 28일 형을 30일 구류로 늘렸다. 주교는 그를 직무에서 해임했다.] – 덧붙여 말하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가 필요한, 미성숙하거나 겨우 반쯤 성숙한 소년을 유혹하는 일을 나는 결코, 결코! 가볍게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 바로 이 경우처럼 사소한 접촉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년의 순결은 모든 어른에게 성역이어야 한다. 무죄냐 유죄냐는 부차적인 일이고, 그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 행위를 한 그를, 그리고 그를 그 행위로 몰아간 충동을 안타깝게 여긴다.(제19절 참조.) 그러나 우르닝은 마땅히 자기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차스트로에게도, 그가 범인이라면, 고스란히 해당한다. *나는 단 하나의 전제만 둔다. 소년의 순결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인데, 반쯤 성숙한 나이에서는 이것을 결코 언제나 당연히 전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69절. * 모렐 사건. 1869년 6월 18일 저녁 뉘른베르크에서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47세의 영국인이 체포되었다. 성공회 성직자로, 본인이 밝힌 바로는 토머스 베이커 모렐, 에든버러 대주교의 보좌 주교였다. 6월 30일 뉘른베르크 지방 법원은 그에게 금고 4개월을 선고했다. 시 외곽의 사람이 많이 찾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휴식처인 할러비제에서 13세와 14세 두 소년을 “계속하여, 파렴치하고 수치를 모르게” 음란하게 더듬어 공공연히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였다. 판결은 이 사건의 “유례없는 물의”와 “청소년의 도덕적 순결에 대한 커다란 위험”을 강조한다. 이 순결을 존중할 의무를 나는 이미 앞에서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판결은 그 밖에, 그것도 미성숙한 소년과는 상관없이 아주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경험에 비추어 성직자 신분이 자연에 반하는 행위를 막는 수단으로 언제나 효과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시오, 판사 여러분. 우르닝으로 태어나 아무 서원도 하지 않은 공무원이나 성직자에게, 여러분의 것과 똑같이 자연인 성애를 평생 절대적으로 죽이는 거인의 싸움을 요구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그에게도 인간일 권리가 있지 않은가? – 모렐은 항소했다. 7월 13일 아이히슈테트 항소 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가 할러비제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장소라는 성질을 알고 있었다는 확고한 심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여기서도 우리는 우르닝의 무죄 판결에 대한 여론의 불만을 다시 만난다.(앞의 제44절 참조.) 뉘른베르크의 《프렝키셰 쿠리어》는 7월 22일 이렇게 쓴다. “그토록 심한 음행 사건에서 나온 이 무죄 판결에 대해 우리는 일체의 비평을 삼간다.” 그러나 이 신문 스스로 곧바로 밝히듯이, 문제는 결코 심한 음행이 아니라 오로지 공공장소에서의 물의 야기였다. 법적으로는 그리오트 사건과 똑같다. “그는 오후에 폭력을 써서, 온갖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음란하게 더듬었다. 그러나 폭행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다. 아버지들이 처벌을 신청하기는 했으나,” 하고 신문은 알쏭달쏭하게 덧붙인다, “다시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에서인지는 논할 수 없다.” 또 이렇게 쓴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증인 네 사람으로 유죄가 입증된 피고인은 주교의 보좌가 아니라 에든버러의 주교 본인이었다.” 최근 지시된 아이히슈테트 항소 법원의 뉘른베르크 이전을 두고 《뉘른베르거 안차이거》 8월 4일 자는 이런 농담을 한다. “이전하는 까닭은 아마 항소 법원 나리들에게 할러비제가 공공장소라는 성질을 현장에서 연구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리라.” 《노이에 뷔르츠부르거 차이퉁》 8월 9일 자는 영국 정부가 이미 이 사건에 주목했다고 전하며, 영국 정부에 의무를 다하라고, 곧 주교를 그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격렬하게 촉구한다. 뷔르츠부르크의 이 지역 신문은 그 일을 제발 영국 언론에 맡겨 두었으면 좋겠다.
제70절. * 제크바흐의 자살. 『멤논』 제119절에서 든 여덟 건의 자살에 아홉째가 더해진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근교 제크바흐의 우르닝 Ch. 힌켈은 1868년 11월 1일, 그 전날 있었던 우르닝다운 일 때문에 털이꾼 세 명에게 자기 집까지 쫓겼다. 그들은 경찰관 행세를 하며 그를 체포한다고 선언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당국에 넘겨지도록 자기들이 끌고 온 마차에 타라고 요구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잠깐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절망에 빠져 면도칼로 기관과 목의 혈관을 끊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명이 터져 나오자 세 사람은 이제 허둥지둥 달아났는데, 서두르다가 우산 하나를 두고 갔고, 네메시스는 그 우산을 통해 그들을 진짜 경찰의 손에 넘겼다. 그들은 상인 마테지우스(22세), 웨이터 슈펭글러(31세), 웨이터 슐체(23세)였다. 슐체는 그날 저녁 자기 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큰돈을 벌 수 있었는데, 그 녀석이 제 목을 따 버렸지 뭐야.” 이런 거친 무리에게 우르닝은 법률에 의해 실제로 손발이 묶인 채 넘겨져 있는 것이다. 1869년 1월 26일 프랑크푸르트 형사부가 그들에게 금고 2년, 2년 반, 3년을 선고한 것이 희생된 이의 넋에게 얼마나 초라한 속죄였던가? 그리고 우르닝 사랑에 대한 처벌이 존속하고 그 존속 자체로 늘 새로이 갈취를 부추기는 한, 갈취에 대한 이런 드문드문한 처벌이 무슨 소용인가? 제71절. * 차르네츠키 사건. 법적 불안정. 지금 프로이센에서 우르닝의 삶의 행복이 법적 불안정의 온갖 우연에 얼마나 무방비로 내맡겨져 있는지는, 포젠 지방 흐발리셰보의 나이 든 기사령 소유주 카를 차르네츠키 백작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운명이 증명한다. 그는 지금 쇠창살 뒤에서 시들어 가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을 감추려 하지 않으며 감추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침묵으로 묻어 버리려는 이 사건을 나는 밝은 데로 끌어내려 하며 끌어내야 한다. 이것은 크라쿠프의 가르멜회 수녀원에 정신 이상의 수녀를 가두어 둔 일[11]보다도 더 충격적일 것이다. 백작은 (아마 근육이 약한 체질이었을 것이다. 『멤논』 제123절, 아래 5) 힘센 젊은이들을 사랑했다. 그는 그들을 여성적·수동적인 방식으로(수동적 계간이 아니다) 사랑했는데, 그것은 여성적·수동적인 욕구에 의심할 여지 없이 들어맞는다. 놀란 판사들에게 이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미 마르티알리스, 루키아노스의 『아포프라스』 등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결코 드물지 않은데도 말이다. 자연이 바로 그 방식을 그에게 요구했다면(이것은 어떤 디오닝도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자연의 권리에 따라 정당했다.(『멤논』 제54절 참조.) 그는 1861년 처음으로 이 일 때문에 슈빈 군 법원에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행위는 전혀 법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그것을 처벌받지 않는 일로 여겨야 하지 않았겠는가? 같은 사랑의 행위 때문에 그는 1867년 다시 같은 법원에 기소되었다. 그는 무엇을 겪어야 했는가? 판사 뮐러, 귀테, 슈미트가 서명한 1867년 2월 23일 자 판결문이 원문 그대로 내 앞에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법원은 법률 견해를 바꾼다. 법원은 이제 그 행위가 그래도 법률에 해당할 뿐 아니라, 즉시 제143조의 최고형을 선고해야 할 만큼 부도덕하고 자연에 반한다고 본다.” 우르닝에게서 무엇이 자연에 반하고 무엇이 자연스러운지,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부도덕한지 판결할 능력이 저 세 신사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우르닝의 본성 전체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나 자기들의 디오닝 잣대만 들이댈 줄 아는 디오닝들이다. 눈먼 사람이 빛깔을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1861년에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867년에는 금고 4년과 4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사법이 주사위 놀이가 되었는가? 게다가 북독일 초안에서는 이 처벌 전체를 이미 삭제했다!(프랑스에서는 이미 1810년에, 바이에른에서는 1813년에 그렇게 했고, 1861년에 재확인했다.) 이 무슨 형편인가! 그는 도둑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저녁에 불이나 난방을 자기 돈으로 마련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가을과 겨울에 끔찍한 저녁과 밤을 보낸다. 그는 일흔 살이다! 지난 10여 년 사이 베를린에서 말찬 남작을 그렇게 했듯이(『인클루사』 제67절), 그도 감옥에서 시들어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자연에 대한 박해가 이 희생자까지 요구할 것인가? – 그는 사면 청원을 내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너희 모욕하는 자들이여,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
*1869년 3월 4일 취임 선언에서 미합중국 대통령 그랜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해로운 법률을 폐지로 이끄는 데 엄격한 집행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아주 옳은 말이다! 그래야만 그 견딜 수 없음이 고스란히 벌거벗은 채 드러난다. 그러나 어떤 가혹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집행은 집행자를 남극과 북극 사이로 이리저리 몰아대고, 그로써 법적 불안정에 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또 죄 없는 사람들에게 범죄자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진짜 범죄, 곧 더없이 교묘한 갈취를 버섯처럼 땅에서 솟아나게 할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 자신은 자살로 내몰거나 희생된 순교자로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집행 그 자체가 이론적 논증보다 더 힘차게 “이 법률을 없애라!”는 외침을 재촉할 것이다.
제72절. * 포르스트너 사건.(제10절과 제12절에서 이어짐.) 유니테리언의 총대리 베니슈 교수는 (6월 24일) 《타크블라트》와 《프레세》에 이런 “분명한 성명”을 냈다. “지금의 사정으로 보아, 이 특별한 경우에는 설령 포르스트너가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그의 면직을 신청하지 않겠다.” 이에 《포어슈타트차이퉁》은 (6월 30일) 교구에 어느 경우든 베니슈 씨를 해임하라고 권했다. – 《타크블라트》 7월 9일 자에 따르면, 포르스트너의 변호인이 막 신고한 바로는, 포병 포겔이 그사이 새로 두 번 갈취를 시도했다. 하나는 H.라는 지나가던 외지인에게, 또 하나는 7월 7일 50굴덴을 노리고, 역시 시립 공원에서, 모라비아에서 온 상인 Sp.에게였다. – 7월 12일 – 비공개로 – 빈 지방 법원에서 심리가 열렸다. 포겔은 이렇게 진술했다. “우리가 시립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그가 나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나중에는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더니,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genitalia mea manu tetigit, non tamen nudans ea(손으로 내 생식기를 만졌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잘생긴 젊은이군요. 이렇게 몸매가 아름다운 젊은이는 처음 봅니다.’ 그리고 ‘남자와 사랑하는 것이 여자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매력 있지요.’ 나는 마침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진작부터 그가 나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그 의심이 확신이 되었으므로 그를 데리고 경찰에 갔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이 일 전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처음에 빈 강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그가 나를 유난히 쳐다보며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나는 나무 한 그루로 갔습니다, ut urinam solverem(소변을 보려고).” 이 마지막 것은 우르닝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끌어내려는, 꾀어내는 자의 잘 알려진 수법이다. 그러니 포겔은 그저 비열한 배신자로 행동한 것이다. 우르닝에게 저지른 일이라면 더없이 파렴치한 악당 짓도 못 본 척하는 것이 물론 관례다. – 포르스트너는 위의 진술을 부인하면서, 빈 강변에서 한 민간인이 포병에게 반쯤 낮은 소리로 “저 사람이 포르스트너야” 하고 외쳤다고도 말했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 “18~20세의 젊은이 한 무리가 오늘 그의 면전에서 혐의를 들이댔다.” 완전히 틀렸다! “혐의”가 아니라 호감의 표현과 애무를 말했을 뿐이다. 어여쁜 시골 처녀 한 무리가 어느 디오닝의 면전에서, 그가 자기들 모두의 뺨을 귀엽다고 꼬집었다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무거운 혐의이겠는가! 《빈 모르겐포스트》: “오늘 그의 결백의 베일이 찢어졌다!” 그렇다, 그렇다.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자는 인류의 쓰레기이고, 여자를 사랑하는 자는 “결백”하다. 오, 너희 결백한 디오닝들이여!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그가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선수를 쳤다고 나무란다. 이것을 그 신문은 무고라고 부른다. 발리도 그의 무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한번 좀 되는대로 써 댄다. 누군가 시립 공원에서 내게 애무를 허락한다. 갑자기 그는 얼굴에 도덕적 분노의 주름을 잡고 벌떡 일어나 선언한다. “50굴덴을 내지 않으면 당신을 고발하겠소!” 나는 그를 갈취로 고발하며 법의 보호를 청한다. 나는 그에게 선수를 친다. 그것이 무고인가? 악당은 그와 별도로 자기 고발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두고 보면 된다. 그런데 모든 명예심을 잃어버린 듯한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가 이 배신자들을 감싼다! – 《모르겐포스트》는 이 사건마저 어떻게든 교황지상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데 써먹으려 든다. “사제들이 이끄는 교육 기관에서 가장 이른 정신적 인상을 받고, 그 뒤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운운. 바로 그거다! 사제와 예수회원이 그에게 성 충동을 접종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제73절. *이 일에는 티셔라는 젊은 미장이 직인 하나도 끌려 들어갔는데, 그는 진술을 이리저리 바꾸다가 끝내 포르스트너가 자기에게 외적인 성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제 법원은 포르스트너에게 “자연에 반하는 음행으로의 유혹 미수죄”, 곧 계간(鷄姦)으로의 유혹 미수(포겔 사건)와 “자연에 반하는 음행의 기수(旣遂)죄”(티셔 사건)로 중금고 1년을 선고하고, 14일마다 단식일 하루와 딱딱한 잠자리 한 번으로 형을 가중했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이 판결을 관대하다고 한다. 글쎄, 적어도 가중이 16세기처럼 달군 집게로 한 번 꼬집는 것이 아니라는 그 관대함만은 인정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계간으로의 유혹 미수라! 우르닝 성 충동의 목표에 대해 디오닝들은 그저 어둠 속을 더듬는다. 그들은 늘 계간을 노리는 의도를 냄새 맡는다.
*외적인 접촉의 갖가지 행위는 그들에게 낯설다. 그 오류가 우르닝의 자유와 명예를 좌우하지 않는다면 웃어넘길 만할 것이다. 아름답고 한창 피어나는 젊은 남자의 tactus genitalium(생식기 접촉)은 우르닝에게 그 자체로 온전한 즐거움을 준다. 디오닝에게 처녀의 드러난 가슴을 만지는 것이 그러하듯이. [여기서는 만진 부분이 드러나 있지도 않았다.](앞의 제35절 끝부분, “디오닝들은 보통 모른다” 운운 참조. 『빈덱스』 제26절. 『포르마트릭스』 제8·9·13·16·18a·23절.)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우르닝들이 이런 무지에 무조건 내맡겨져 있다!
포르스트너는 판결에 항소했다. 빈 고등 법원은 8월 13일(17일?) 자 판결로 기수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유혹 미수에 대해서는 유죄를 확인하고, 이 가벼운 한 가지 죄에 대해 가중을 포함한 전체 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처벌해 온 끝에도 오스트리아 판사들은 그들이 이른바 자연에 반하는 음행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외적인 행위에 있는지(지방 법원), 아니면 계간에서야 비로소 성립하는지(고등 법원). 그리고 이런 법적 불안정에, 이런 주사위 놀이에 오스트리아 국민 약 2만 명이 내맡겨져 있다! 고등 법원도 tactus genitalium을 계간으로의 유혹 미수로 본다. 판사들의 악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에 대해 판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결과를 붙든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69년에, 자연의 충동을 따른 tactus genitalium을 중금고 1년의 범죄로 처벌했다. 이것은 19세기의 마녀 화형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우르닝의 tactus genitalium은 범죄로 처벌하면서, 그 곁에서 디오닝의 계간은 처벌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오점이다.
제74절. *뒤늦게 나는 앞서 말한 베니슈가 편집하는 빈의 《모르겐슈테른》 8월 1일 자 창간호를 받았다. 거기 실린 7월 12일 심리에 관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을 더 옮긴다. “증인 발리는 지난해의 고발을 철회했다. 새로운 고발을 내놓으면서 그는 모순에 빠져, 검사조차 그에게 그 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포르스트너의 탓으로, 곧 지난해 유죄 판결을 받은 뒤로 일자리를 더는 구할 수 없다며 포르스트너에게 손해 배상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발리 씨를 배려하여 우리가 공개하지 않으려는 이유로 이 요구를 물리쳤다.” 자,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는 어떤가? – 익명의 비방 편지들(제12절)은 낭독되지 않았다. 그 편지들을 받은 사람은 뫼들링의 주임 신부 그라츨과 《키르헨차이퉁》의 편집인 비징어였다. 이들이 편지를 법원에 제출했던 것이다. 《모르겐슈테른》은 또 심리에 관한 《프레세》의 두 단짜리 보도(나는 받아 보지 못했다)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포르스트너에 대한 비방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모르겐슈테른》은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런 보도에 손대지 않는다. 포르스트너의 외모에 대한 묘사, ‘깡마르고, 얼굴빛이 창백하고, 입이 넓고, 입술은 얇고 꽉 다물었다’에서부터 이미 노골적인 증오가 묻어난다. 끝으로 갈수록 그 증오는 광란에까지 치닫는다.”(앞의 제67절 참조.) 그 말을 기꺼이 믿는다! 그러나 놀랄 게 무엇인가? 16세기 다름슈타트에서 한 우르닝을 – 형사 재판 법령의 말대로 “일반 관습에 따라” – 산 채로 불태웠을 때, 형리는 그 수고의 대가로 정해진 요금대로 15굴덴을 벌었다. 그러니 《프레세》의 통신원 양반은 분명 자기 편집부에서 다름슈타트 형리의 보수를 벌고 싶었던 것이고, 한 우르닝을 산 채로, 적어도 명예만큼은 태워 없애려고 틀림없이 정직하게 제 몫을 다했다.
제75절. *교구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맹목적인 분노가 고삐 풀린 폭발로 터져 나온다. 포르스트너의 지난 삶이, 아주 작은 세부까지, 그가 찾았던 외지의 휴양지에 이르기까지 염탐당한다. 교회 당국은 교구의 20세 미만 젊은 남자 전원을 상대로 비슷한 “습격”이 있었는지 캐물었다. 모두 부인했다. 두 사람은 견진 교육 때 그가 이따금 자기들 뺨을 쓰다듬었다고 말했다. 신문들은 독에 담근 화살을 쏘아 댄다. 교구의 법률 고문 알폰스 후버 박사는 이렇게 선언했다. “포르스트너의 사랑의 충동은 분명 젊은 남자를 향해 있으므로, 그는 교구의 남자 청소년에게 위험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면직을 신청한다.” 그러나 유니테리언들이 자기들의 성직에 거세된 사람을 찾지 못하는 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충동을 타고난 사람들, 곧 디오닝이나 우르닝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디오닝인 성직자가 그의 성애가 본디 여성을 향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구의 여자 청소년에게 위험한 것이 결코 아니듯이, 우르닝인 성직자도 자연이 그의 사랑의 충동을 남성에게 향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 청소년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포르스트너는 간단히 이런 반대 신청으로 그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후버 박사의 사랑의 충동은 분명 젊은 여자를 향해 있으므로, 그는 교구의 여자 청소년에게 위험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면직을 신청한다.” 거세된 사람도 아니고 서원도 하지 않은 성직자가 교구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것은, 그가 교구에 속한 사람들을 자기의 성적 욕구에 이용할 때뿐이다. 그가 이 경계선을 지키는 한, 그는 교구가 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을 채우는 것이다. 거세된 사람도 아니고 서원도 하지 않은 성직자에게 무조건적인 무성(無性)을 강요할 권리는, 그가 디오닝이든 우르닝이든, 온 세상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우르닝에게 “결혼하라!”고 외치는 것은 빵 대신 돌을 주는 것이다. 결혼은 그에게 그저 자연에 반하는 일이다. 가톨릭은 자기 성직자에게 명시적인 권리에 따라, 곧 서원을 했다는 근거로 정신적인 자기 거세를 요구한다. 그런데 서원을 폭력 행위로 여기는 유니테리언들이 성직자에게 절대적인 정신적 자기 거세를 강요한다면, 그들은 바로 그 두 배를 저지르는 것이다. 폭력에다 권리 없음까지 더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 유니테리언의 자유주의인가? *국가의 비인간적인 법률이 교구에게 면직으로 그 비인간성을 더 날카롭게 할 의무를 지우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 누가 잔인하게 맞아 생긴 상처 위에 다시 채찍질을 하겠는가? 오히려 교구가 잔인한 법률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자기 성직자를 감싸는 것이 교구다운 일일 것이다.
제76절. * 빈의 새로운 박해. 26세의 도금공 조수 프란츠 W.(《타크블라트》 7월 1일 자, 「빌헬름 통신」에 따름)가 1869년 6월 27일 체포되었다. 그는 한 호텔에서 낯선 젊은 남자와 “자연에 반하는 음행”을 저질렀다. 마치 자기 짐을 덜려는 듯 그는 역시 남자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여럿 댔다. 예심 판사인 지방 법원 판사 체파로비치(세바라비츠?)는 정말로 곧바로 그들에 대해 조치를 취해 벌써 세 명을 체포하게 했다. 물론 빈의 우르닝 전원이 자발적으로 체파로비치 씨 앞에 나서서 이렇게 요구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그에게 명한 대로 사랑한 것이 그에게 처벌받을 일이었다면 우리도 처벌하라. 사람이 사람인 것이 범죄라면 우리도 처벌하라!”
*그 밖에도, 내게 전해 온 바로는, 그곳 당국은 근래 우르닝을 체계적으로 박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1868년 12월에는 무엇보다 “이 점에서 악명 높은” 장소들을 경찰이 엄중히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형편에서 털이꾼들은 손쉽게 일을 벌인다. 그들의 생업이 번창한다. 이 사기 행각은 사실상 손댈 수 없는 것이 되어 어느 때보다 대담하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든다. 끔찍한 사례들이 내게 전해진다. 당연한 일이다. 털이꾼은 길러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형사 수사가 새로 하나 열릴 때마다 악당 99명이 땅에서 솟아난다.
제77절. *자연에 대한 처벌의 폐지에는 이미 1867년 6월 26일, 의회 내각 이전의 법무 장관 폰 코메르스가 – 그의 이름에 영예를! – 착수했다. 그런데 의회 내각의 법무 장관은 이 일을 벌써 꼬박 2년 동안 괘씸하게 미루어 왔다. 환호하라, 너 자유로운 오스트리아여! 죄 없는 국민 수천 명의 명예와 삶의 행복이 맨 증오가 지어낸 사악한 법률 때문에 해마다 치욕스럽게 짓밟힌들 무슨 상관이랴? 성인들 사이에서는 그 처벌의 법적 근거를 털끝만큼도 찾을 수 없기에 학문이 이미 오래전에 그 처벌을 거부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너의 폭도는 당분간 계속 박해받는 이들의 고문을 즐기도록 두려무나. 너에게는 의회 출신 장관들이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랴?
How many scholars, wasting o'er their lamp,
How many jurists, versed in legal rules,
How many poets, honoured in the schools,
How many captains, famed for deeds of arms;
Have found their solace in a minion's arms!
등잔 아래 밤을 지새우는 학자 얼마나 많으며,
법규에 밝은 법률가 얼마나 많으며,
학당에서 기리는 시인 얼마나 많으며,
무훈으로 이름난 장수 얼마나 많았던가,
총애하는 소년의 품에서 위안을 찾은 이들이!
(바이런 경. 『멤논』 제1부 X쪽.)
우르닝에게 끌림을 줄 수 있는 것은 어차피 남성의 몸의 아름다움뿐이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원한 바이며, 이 법칙은 어떤 증오와 광분도 결코 흔들지 못할 것이고, 지난 세기들의 화형대조차 없애지 못했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디서 처벌하며 끼어들 권리를 얻는가? 우르닝이 한 젊은 남자의 매력에 압도될 때, 그 자신도 그 법칙 아래 있는 자연의 이끌림을 따를 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공중의 수치심을 해치지 않고 애무와 접촉과 지상의 지복의 향유에 휩쓸릴 때, 그것이 그에게도 자연법칙이요 자연의 목적이요 자연의 욕구인데도? 젊은이의 몸이 온 창조물 가운데 가장 찬란한 작품이라는 것이 그의 탓인가? 모든 사람이, 우리 둘레의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 사랑의 충동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랑의 충동은 모든 충동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의 하나가 아닌가? 자연이 우르닝에게서는 공물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너희는 생각하는가? 누가 너희에게, 하필 그에게 자연에 맞선 거인의 싸움을 절대적으로 평생 요구할 권리를 주었는가? 하필 그에게 서원을 지울 권리를? 그가 하지도 않은 서원을! 형사 처벌과 파렴치 선고로 위협하고 그것을 집행하면서, 자연에 반하는 강제와 거친 공포 정치로 그것을 그에게 억지로 지울 권리를? 이것이 너희의 도덕인가? 이것이 너희의 정의감인가? 이것이 너희의 자유주의인가? 나는 이 자연에 대한 박해에 항의한다! 도덕과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나는 그것에 멈추라고 명한다! 그리고 너 오스트리아여, 마침내, 머지않아 자연을 자유에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너에게 치욕이 있으리라!
나는 아르고호 원정대원이 되어 바다를 건너 먼 신비의 해안으로 간다. 그곳 야자나무와 도금양 아래 나의 황금 양털이 빛난다. 무엇을 머뭇거리느냐, 나의 아르고호여? 목표를 확신하며 용골에 날개를 달아라. 나는 구원의 땅, 내 그리움의 땅을 보고 싶어 목마르다. 정의의 숲에서 나의 콜키스를, 자유의 황금 양털을 붙잡고 싶어 목마르다.
뷔르츠부르크, 1869년 9월 25일.
K. H. 울리히스
알림
1) 나에게 연락하고자 하는 분은 뷔르츠부르크로 나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14일이 지나도 내 답장이 오지 않으면 출판사의 중개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서명 없는 편지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정당해 보이면 (지정해 주시는 우편 유치 주소로) 답장하겠습니다. 나에게 전해진 것 가운데 자연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엄격히 신중한 형태로, 그러나 진실 그대로, 꾸미지도 빼지도 않고 공개할 권리를 나는 요구합니다. 다만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에게 전해진 것은 예외입니다.
2) 나는 부당하게 박해받거나 생계를 빼앗긴 우르닝들을 위한 지원 기금을 만들고, 되도록 그들에게 피난처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기부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위협받거나 이미 짓밟힌 삶의 행복이, 그토록 많은 불안과 곤궁이, 그토록 많은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나를 찔끔찔끔 뒷받침해 주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자주 나는 고통을 덜어 주고, 아니 보호해 주며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게으른 이들이여, 안일에서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은 명예의 의무를 모릅니까? 3) 북독일 초안 제152조가 정말로 시행된다면(아래 참조), 나는 북독일의 우르닝 1만 2000명에게, 우리의 사랑을 새삼 엄숙하게 범죄로 낙인찍는 나라를 떠나라고 촉구합니다. 더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는 것이 이제 참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 됩니다.
– 제64절 c에 대한 보유. 그는 “펠제크 남작” 말고도 여러 다른 이름을 쓴다. 1868년 여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오텔 뒤 노르에 페셰라는 이름으로 묵었다. 기센의 짓은 1867년 10월 무렵에 벌였다.
– 베를린의 어느 프로이센 하사관에게. M–au에서 하는 털이꾼 짓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머지않아 당신의 이름과 인상착의가 인쇄된 것을 읽게 될 것이오. 우선 제64절 c를 참조하시기 바라오.
부탁. 우르닝 두 사람을 각각 쾰른과 함부르크의 우르닝 사회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소를 부탁드립니다.
제78절. 북독일 형법 초안에서는 (프로이센의) 제143조가 결국 제152조로 그대로 유지된다! 이유서는 이렇게 말한다. “의학의 관점에서도, 형법 이론의 여러 근거에서도 폐지가 정당화되기는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민중의 법의식에서 이 행위들이 처벌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고려였다.”
그러나 군중의 맹목적인 외침 “우르닝을 처벌하라!”를 “법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완곡어법일 뿐이다. 240년 전에는 “마법사를 불태워라!” 하고 외쳤고, 옛날 로마에서는 “Christianum ad bestias!”(그리스도교도를 맹수에게!) 하고 외쳤다. 이것도 “법의식”이라 부를 것인가? 런던에서는 옛날에 “to burn heretics”(이단자를 불태우기 위한) 화형대 장작을 대려고 유증 기금을 세웠다. 그때는 민중의 “법의식”에서 이단이 처벌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법의식에 입법자는 굴복해서는 안 된다. 민중의 목소리가 순수할 때에만 입법자는 그것을 따라도 된다. 그것이 그릇된 관념에 기초할 때, 부당할 때, 전제적일 때에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경우 입법자는 자연의 권리를, 수천 명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그리고 정의의 최고 원리, 곧 법 앞의 평등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처벌에 실질적인 법적 근거는 없다고 꽤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결함을 이제 우르닝의 사랑의 행위가 민중 사이에서 처벌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한 시도인가! 그러니까 처벌받아 마땅함은 민중의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입법자는 그것을 의제(擬制)할 뿐이다. 그런데 민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의제된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민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사법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법무 장관이지 민중 정념의 장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민중 정념의 입법에도 항의한다. 국민 1만 2000명을, 그들이 자연법칙을 따르기만 하면, 법적 근거 없이 펜 한 번 놀려 범죄자로 선언한다면 전대미문의 일이 아니겠는가? 참된 자유주의는 민중을 위한 자유만이 아니라, 자유를 얻으려 싸우는 억압받는 소수자를 위한 자유도 요구한다. 바로 민중이 전제 군주일 때에도.
뷔르츠부르크, 1869년 9월 27일.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전 하노버 왕국 배석 판사
우르닝 사랑에 관한 저작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지음
(누마 누만티우스)
『인클루사』(Inclusa) 1864년. 자연과학편 A. 우르닝 사랑의 선천성. 72쪽. 12½노이그로셴 = 46크로이처. (압수되었다가 법원 결정으로 해제됨.)
『포르마트릭스』(Formatrix) 1865년. 자연과학편 B. XVIII + 66쪽. 15노이그로셴 = 54크로이처.
『빈덱스』(Vindex) 1864년. 법학편. 법정 변론을 위한 자료.(이에 대한 보충은 『빈딕타』와 『아라 스페이』 머리말에 있음.) 40쪽. 5노이그로셴 = 18크로이처. (압수되었다가 법원 결정으로 해제됨.)
『빈딕타』(Vindicta) 1865년. 현행 형법의 개정 요구. XXIV + 28쪽. 7½노이그로셴 = 27크로이처.
『아라 스페이』(Ara spei) 1865년. 우르닝 사랑과 도덕, 그리스도교, 도덕적 세계 질서의 관계. 우르닝의 사랑의 맹약. 어떤 전제 아래에서 향유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시 「안티노우스」. XXIV + 94쪽. 20노이그로셴 = 1굴덴 12크로이처.
『글라디우스 푸렌스』(Gladius furens) 1868년. 독일 법률가 대회에 보내는 도전장. 1867년 8월 29일 뮌헨 법률가 대회에서 한 저자의 구두 발표를 함께 실음. 37쪽. 5노이그로셴 = 18크로이처. (10개월 동안 법원에 압수되었다가 2심에서 해제됨.)
『멤논』(Memnon) 1868년. 남자를 사랑하는 우르닝의 성적 본성. 몸과 마음의 자웅동체성. Anima muliebris virili in corpore inclusa(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의 영혼). 자연과학적 서술. “Introite! nam et hoc templum naturae est.”(들어오라! 이곳도 자연의 신전이니.) 제1부 XX + 50쪽, 15노이그로셴 = 50크로이처. 제2부 XXXVI + 85쪽, 20노이그로셴 = 70크로이처. (10개월 동안 압수되었다가 해제됨.)
『인쿠부스』(Incubus) 1869년. 우르닝 사랑과 피의 갈망. 라이프치히, A. 제르베. 93쪽. 15노이그로셴.
각 저작과 각 부는 따로따로도 판매한다.
위의 저작들은 라이프치히의 A. 제르베 서점에서도 해당 금액을 보내면 직접, 우송료 없이 보내 드린다.
우르닝 사랑에 관한 그 밖의 저작
I. 그리스
1. 플라톤, 『향연』(Gastmahl)과 『파이드로스』(Phaedrus).(프란틀의 독일어 번역. 『향연』 5노이그로셴 = 15크로이처, 『파이드로스』 5노이그로셴 = 15크로이처.)
2. 테오크리토스, 목가 제12편 「사랑받는 이」, 제13편 「헤라클레스와 힐라스」, 제23편 「불행하게 사랑하는 이」.(뫼리케와 노터의 독일어 번역. 15노이그로셴 = 45크로이처.)
II. 로마
3. 티불루스, 엘레게이아 제1권 제4편: 우르닝의 “ars amandi”(사랑의 기술). 제1권 제9편: “ad puerum suum perfidum”(배신한 자기 소년에게).
4. 베르길리우스, 목가 제4편 「알렉시스에게」.[12]
5. 칼푸르니우스 시쿨루스, 목가 제11편.
III. 이탈리아
6. 『학교에 간 소년 알키비아데스』(Alcibiáde fanciullo a scola), 1652년. 바세조의 막연한 추측으로는 페란테 팔라비치노의 작품. 프랑스어 번역 『학교에 간 아이 알키비아데스』(Alcibiàde enfant à l'école), 1866년.(『멤논』 제107절, 제134절 11, 제2부 서론, 제137절, 제140절 참조.) 이 책은 자연과학적으로 중요한 대목 말고도 음란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 자세히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분은 나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IV. 알바니아(튀르키예)
7. 『알바니아 연구』(Albanesische Studien), 법학 박사 J. G. 폰 한 지음. 해당 대목: 「알바니아인의 소년애」 제1권 166쪽 이하, 「게그족의 시」 제2권 141쪽 이하.(『멤논』 제31·32절.)
V. 프랑스
8. 앙브루아즈 타르디외, 『풍속 침해에 관한 법의학적 연구』(études médico-légales sur les attentats aux moeurs). 바이마르의 의무 고문관 타일레의 독일어 번역, 1860년, 제목은 『풍기에 반하는 범죄』(Die Vergehen gegen die Sittlichkeit).(터무니없이 악의적이고 오류투성이지만 많은 자료를 담고 있으며, 모두 파리의 것이다.(『멤논』 제134절 6 c.))
9. 『오귀스트 씨』(Monsieur Auguste), 미발표 소설, 메리 지음. 파리, (대략) 1860년.(『멤논』 주 65.)
10. 『‘소년 알키비아데스’론』(Dissertation sur l'Alcibiade fanciullo), 바세조의 이탈리아어에서 번역하고 주 등을 붙임. 파리, J. 게, 1861년. 번호를 매겨 254부 인쇄.(귀스타브 브뤼네 지음.)(『멤논』 제134절 9. 내용이 중요하나 이제는 한 부 구하기도 어렵다.)
VI. 영국
11. 바이런 경, 『돈 레온』(Don Leon, a poem, forming part of the private Journal of his lordship).[13] 런던, 서적상들을 위해 인쇄, 1866년. 10실링 6펜스.(우르닝 사랑에 대한 불타는 변호. 『멤논』 제134절 10. 견본은 『멤논』 제1부 서론에 있음. 최근 서적상을 통해 주문해 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위치가와 홀리웰가의 작은 가게들에서 틀림없이 구할 수 있다.)
VII. 스위스
12. 하인리히 회슬리, 『에로스. 남자의 사랑』(Eros; die Männerliebe) 등, 전 2권. 장크트갈렌, 샤이틀린 & 촐리코퍼. 제2판(표제만 새로 바꿈) 1859년. 2탈러, 3굴덴 12크로이처, 6프랑 75상팀.(『멤논』 제134절 8, 제109절. 『글라디우스 푸렌스』 2쪽.)
VIII. 독일
13. 플라텐할러뮌데 백작, 『시집』(Gedichte).
14. 카스퍼, 『법의학 편람』, 제4판, 1864년, 16..쪽 이하.(『아르고나우티쿠스』 제17절.)
15. 카스퍼, 『임상 단편집』(Clinische Novellen zur gerichtlichen Medicin), 1863년, …쪽 이하.(『아르고나우티쿠스』 제17절.) 16. 『베누스 우라니아의 역설』, 9노이그로셴 = 30크로이처.(타르디외에게나 어울릴 법한 “페스트”, “치욕의 기둥”, “파렴치한 원숭이” 같은 욕설이 이 책의 특징이다. 『아르고나우티쿠스』 제17·20·3·49·50절.)
17. 《옴니부스》(Omnibus), 삽화 주간지(함부르크와 라이프치히), 1868년 제28호, 6크로이처.(「쥐잡이」라는 그림 때문에 여기 올린다.)
18. 『세 가지 기이한 추억』(Drei seltsame Erinnerungen), 에메리히 폰 슈타디온 백작 지음. 보흐니아, W. 피시, 1858년.(『멤논』 제100절 c.)
19. 『하드리아누스』(Hadrian), 파울 하이제의 비극. 25노이그로셴.(디오닝의 펜에서 나온 – 매혹적인 만큼 이해도 깊은 –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라는 소재의 시적 형상화.)
위의 저작들은 라이프치히의 A. 제르베 서점에서도 해당 금액을 보내면 직접, 우송료 없이 보내 드린다.
쿠어푸르트의 W. 슈나이더 인쇄.
주석
- 프로페르티우스 『엘레기』 제2권 34편.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에서 목동들이 사과 따위의 하찮은 선물로 사랑을 얻는 것을 빗댄 구절이다. ↩
- 그리스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콜키스를 탈출할 때 추격을 늦추려고 동생 압시르토스를 토막 내 바다에 흩뿌렸다고 한다. ↩
- 로마 전설에서 루크레티아는 왕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에게 겁탈당한 뒤 자결한 정숙한 여인이다. ↩
- 사드 후작의 실제 이름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Donatien Alphonse François)다. 아래에 사드의 소설로 든 『동 부그르 이야기』는 오늘날 장샤를 제르베즈 드 라투슈의 작품으로 본다. ↩
- 실러 『빌헬름 텔』 제1막 1장의 “호수가 미쳐 날뛰며 제물을 원한다”(Es rast der See und will sein Opfer haben)를 바꾼 구절이다. ↩
- 「고린도전서」 13장 1절 “내가 …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를 비튼 말이다. ↩
- 카를로스 마르포리는 이사벨 2세의 총신으로, 1868년 9월 혁명 때 여왕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
- 남슬라브인 사이에서 교회 의식을 갖추어 피를 섞으며 맺던 남자끼리의 결의형제(포브라팀스트보) 관습을 가리킨다. ↩
- 1869년 8월 아이제나흐에서 열린 대회. 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슈바이처의 전독일노동자협회에 맞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했다. ↩
- 카이사르가 암살될 때 브루투스에게 했다고 전하는 말(수에토니우스). ↩
- 1869년 7월 크라쿠프의 가르멜회 수녀원에서 20년 넘게 독방에 갇혀 있던 수녀 바르바라 우브리크가 발견되어 유럽 전역에서 물의를 빚은 사건. ↩
- 알렉시스를 노래한 것은 베르길리우스 『목가』 제2편이다. ↩
- 바이런의 이름을 달고 나왔으나 오늘날에는 바이런이 아닌 익명 작자의 시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