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인쿠부스』 — 우르닝 사랑과 피의 갈망

인물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슈바이처,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페르디난트 라살레, 요하네스 뢰징 용어독일 형법 제175조 사건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우르닝 사랑과 피의 갈망

병적 정서 장애와 책임 능력에 관한 논고. 베를린 폰 차스트로 형사 사건을 계기로.

비슷한 성격의 사례 15건을 덧붙임.

누마 누만티우스 저작의 속편: 여덟째 책.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지음. 재야 학자, 전 하노버 왕국 관구 배석 판사.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학술상에 값한다고 인정받은 논문 『de foro reconventionis』(반소의 재판적에 관하여)와 『de pace Westphalica』(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 관하여), 그리고 우르닝 사랑에 관한 저작 『인클루사』, 『포르마트릭스』, 『글라디우스 푸렌스』, 『멤논』의 저자.

라이프치히
A. 제르베 출판사

1869년

머리말

“Αὑται μἱν ϑηριώδιες· αἱ δἑ δεά τε νόσους γίνονται ϰαἱ μανίαν ἰνίοις· αἱ δἑ νοσηματώδεις.”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5장 3절. (“이러한” 욕망들은 “짐승과 같다. 또 어떤 것들은 몇몇 사람에게서 질병으로 말미암아 또는 정신 장애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또 어떤 것들은 그 자체가 병적이다.”) – “자유로운 의지 결정 능력이 비정상적인 심리 과정으로 방해받는 곳에서, 그 개인은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의학 박사 폰 크라프트에빙. (《법의학 회보》 1864년.)

머리말 1. 나는 이 책을 학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의 말로서 펴낸다. 이 책의 대상에 거슬려하는 사람은, 여기서 다루는 것이 참으로 진지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 하나 남김없이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소명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주관적 혐오 때문에 학문적 문제의 검토에서 물러나는 사람은 그것만으로(eo ipso) 의학자, 법학자, 또는 그 밖에 학문의 일꾼을 자처할 권리를 잃는다.

머리말 2. 타고난 본성에 따라 성애의 끌림으로 오로지 남성 개인에게만 끌리는 남자들을 나는 우르닝이라 부르고, 그들의 사랑을 우르닝의 사랑이라 부르며, 이 현상 전체를 우라니즘이라 부른다. 우르닝은 자연의 수수께끼다. 그는 몸의 생김새로만 남자일 뿐, 사랑의 충동으로는 남자가 아니다. 그의 사랑의 충동은 오히려 여성적 존재의 그것이다.

성인 우르닝의 수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의 독일 전체약2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약25,000~28,000명
프로이센약10,000~12,000명
빈약1,000명
베를린약600~900명

독일에서는 성인 남자 약 500명, 곧 전체 인구 약 2,000명 가운데 평균 1명꼴로 성인 우르닝이 있다. 따라서 인구 10만 명의 도시에는 평균 50명이 있다.

서론

I. 퇴역 향토방위군 중위 폰 차스트로가 1869년 1월 17일부터 베를린에서 혐의를 받고 있고 이미 일부는 입증된 듯한 그 행위는 참으로 악마 같은 짓이다. (성적 행위를 위한 남용, 신체 훼손, 살인 미수와 살인.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 두 명에게 저지른 것이다. 아래 III 참조.) 나는 그 행위를 어떤 식으로든 감쌀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혹시라도 “변호서”라고 부르는 데에는 처음부터 항의해 두어야겠다. 다만 나는 정의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다른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그에게도 온전히, 깎임 없이 주어져야 한다. 그가 우르닝이고 더구나 드러난 남색가라는 이유로 그 권리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법치 국가에서는 범죄로 기소된 남색가라 해도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II. 그의 인품에 관해 세상에 알려진 모든 소식으로 보건대, 폰 차스트로의 성적 본성이 내가 『멤논』에서 그려 보인 우르닝의 성적 본성과 같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신문들은 그의 “여성에 대한 무뚝뚝함”과 그가 “늘 여자들을 멀리했다”는 것을 보도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우르닝이 타고나는, 여성에 대한 그 혐오의 증상이다.

“그의 얼굴 표정의 부드러움”에 관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이는 『멤논』 제92절, 제21절과 맞아떨어진다.

그의 “그림자 같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는 거동”과 “불안정하고 섬뜩한 태도”에 관한 보도도 그렇다. 이는 다름 아닌 반쯤 여성적인 부드러운 기질로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거나 밖에서 겪은 굴욕의 무게에 깊이 짓눌린 나머지, 쫓기는 짐승처럼 새로운 모욕을 겁내며 피해 다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트리뷔네》는 1869년 1월 25일 무렵 – 이 점을 확인해 둔다 –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결코 더러운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마도 폰 차스트로는 순수한 남성형 우르닝도 순수한 여성형 우르닝도 아니고(『멤논』 제17~20절과 제15·16절), 혼합형에 속할 것이다(제21~23절). 그에게는 여성을 닮은 우르닝 유형의 증상과 남성을 닮은 우르닝 유형의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듯하다. 후자에 속하는 것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 곧 9~10세 소년에 대한 아마도 병적인(아래 참조) 성향인데, 이는 순수한 여성형 우르닝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다. (『멤논』 제2부 XVI~XIX쪽.)

틀림없이 그에게서는 여러 특이한 점이 드러날 것이고, 그것들은 그의 우르닝적 성적 본성에서 실마리를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가 교회 음악과 기도서·신앙 서적을 좋아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런 애호도 아주 많은 우르닝의 부드러운 정서, 특히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처지에서의 정서에 꼭 들어맞는다. 그것을 위선 탓으로 돌려서는 결코 안 된다. 독일에서 우르닝은 거의 늘 외톨이로 지낸다. 반쯤 여성적인 기질을 타고났기에, 젊음이 달아나고 나면 그에게는 외롭게 사는 노처녀의 특성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은 특성이 들러붙는 일이 아주 많다. 노처녀처럼 그도 고독 속에서 의지할 곳과 위안을 찾는다. 노처녀처럼 그도 그 둘을 즐겨 종교에서 구한다. 특히 깊이 사무친 모욕을 겪은 뒤에, 더구나 양심의 불안에 시달릴 때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억지로 성적 체념을 강요당할 때 여성적인 성정이 바로 종교에서 위안과 진정을 붙잡으려 한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쉽게 설명될 것이다. 위안과 의지와 진정을 떠나서도, 그런 성정은 앞서 그린 것과 같은 마음 상태에서는 아주 쉽게 초월적인 것의 환상적 영역에서 자기 터전을 찾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여성적인 성정에서는 진실한 신앙심이 격렬한 사랑의 갈구, 아니 음탕한 관능 바로 곁에 자리 잡는 일이 드물지 않다. 나는 바로 우르닝들에게서 그런 예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있는 사랑의 갈구나 관능이 종교적 열광과 경건한 수행으로 뿌리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III. 이것은 동시에, 베를린의 김나지움 교사 프로이스 박사의 열광적인 “경건함”을 얼마 전 그토록 반가운 조롱거리로 삼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의 경건함과 나란히, 그가 자기 김나지움의 아름다운 젊은 최상급반 학생들을 남달리 몹시 사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건함을 꾸며 내는 현대의 기술을 모르는 것이 우르닝뿐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정당들이 상대 당의 대열에 어쩌다 우르닝 하나가 불쑥 나타나기만 하면 그 상대 당을 창으로 꿰고 단검으로 찌르는 꼴을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곁길로 새어 보자.

《크로이츠차이퉁》과 《북독일 알게마이네》는 “벨프 왕가파”를 얼마나 헐뜯었던가! 나를 민덴으로 끌고 갈 때 – 내게 하노버 병합은 독일인이 독일인에게 저지른,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 행위다 – 프로이센 경찰이 내 집에서 노획물을 찾아냈을 때 말이다. 우르닝 사랑에 관한 엄청난 양의 서류였다! 그리고 이제 바로 그 두 신문의 동아리에서 경건한 프로이스가 불쑥 우르닝으로 정체를 드러내자, 자유주의 신문들은 또 얼마나 헐뜯고 있는가!

(나의 정치적 입장을 굳이 밝히는 것은 일부러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베를린에서 나의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내가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내놓았음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프랑크푸르터 저널》은 여러 해 전부터 “교황지상주의 성직자들” 가운데 우르닝 하나가 “정체를 드러낼” 때마다 그것을 가톨릭을 공격하는 밑천으로 삼아 왔다. 1864년 티롤의 호퍼 신부 때가 그랬고(『멤논』 제135절), 또 1862년 리에주의 한 신부 때도 그랬다. 그 신부는 보초를 서던 병사가 “도덕적 분노에 차서” 붙잡았고, 그 뒤 마스트리흐트로 달아났다. 거꾸로 쾰른의 교황지상주의 신문 《라이니셰 폴크스할레》는 1850년, “종교 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자유주의적인 나사우의 한 학교 교사가 우르닝적 성향을 지녔음이 드러났을 때 똑같이 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라살레파인 베를린의 폰 슈바이처 박사는 1862년 9월 5일 바덴의 만하임 구 법원에서 경범죄 처벌을 받았다(『인클루사』 35쪽 참조). 만하임 궁정 정원에서 한 젊은이와 하찮은 장난을 치다가 단순한 부주의로 “공연한 풍기 문란”을 일으켰다는 것, 곧 더는 젊지 않은 두 여자에게 엿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일로 그의 정적들은 얼마나 신이 나서 그에게 화살을 쏘아 댔던가! 1867년 9월 7일 엘버펠트바르멘의 민주파 유권자들이 그 일에도 불구하고 9,000표 대 6,800표로 그를 의회 의원으로 뽑을 만큼 성숙함을 보이자, 비스마르크 편에 선 부르주아지의 풍자 신문 《클라데라다치》는 1867년 10월 13일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민주주의란 말인가?
저런 자가 인민 권리의 대변자란 말인가?
살아생전 나는 그토록 붉었던 적이 없다,
그 일로 무덤 속에서 붉어지고 싶을 만큼은![1]

페르디난트 라살레.”

참 멋진 말이다! 그런데 폰 슈바이처가 비스마르크의 숨은 지지자로 통하는 지금, 《클라데라다치》는 그에게 입을 다물고 얌전하다. 그 대신 이제 비스마르크에 적대적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1869년 2월 21일 자)에서 다음과 같은 오자 정정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치히 2월 18일 … 나는 폰 슈바이처의 작센 선동원들을 ‘볼품없는’(formlose) 녀석들이라고 하지 않고 ‘악의 없는’(harmlose) 녀석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볼품’(Formen)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 – 폰 슈바이처 씨가 아니지 않은가!”

하기야 “작센 선동원”이 꼭 “formosus Alexis”(어여쁜 알렉시스)[2]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일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목소리들이 매번 – 덕스러운 《클라데라다치》의 얼굴을 앞세우고 – 순진무구하게 “도덕적으로” 눈을 치켜뜨는데, 그 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 우리 당이 여기 이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언론이 다른 이들보다 교황지상주의적이거나 “경건한” 또는 보수적인 우르닝을 더 많이 고발한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띌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정당은 1850년 《라이니셰 폴크스할레》가 나사우에서 그토록 운 좋게 찾아낸 그 교사 말고는 그 품 안에 우르닝을 하나도 품고 있지 않단 말인가? 사람들은 저쪽 편이 더 많은 “폭로꾼”의 감시를 받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민족자유주의 신문과 진짜 자유주의 신문의 통신원들은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다. 누가 그들에게 제 살붙이를 고발하라고 요구할 만큼 잔인하겠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저울의 바늘은 흔들린다. 교황지상주의자들도 앙갚음할 수 있다. 1869년 2월 21일 저녁 빈에서 한 포병이 한 신사를 경찰에 끌고 와서, 이 사람이 방금 8시 15분에 시립 공원에서 자기에게 말을 걸며 부도덕한 행위를 하자고 꾀었고, 그래서 자기가 곧바로 그를 억지로 경찰서까지 데려왔다고 신고했다. 그 신사는 머뭇거리다 신분을 밝혔다. (여기서 나는 오로지 빈의 《프레세》 1869년 2월 24일 자를 따른다.) 그는 겨우 스물다섯 살인 빈 “유니테리언”의 감독 카를 포르스트너 씨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고 성경에 “역사적 가치”를 두는 교파다.) 그는 풀려났지만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이런 종류의 거의 모든 사건에서처럼 고발자가 우르닝을 고발할 목적으로 음흉하게 덫을 놓은 것은 아닐까? 바로 그쪽에서 도발한 것은 아닐까? 베를린의 《추쿤프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프로이스, 차스트로 일당의 본보기가 오스트리아에 불을 붙이는 모양이다. 유니테리언 감독이 – – 포병 한 명에게 사랑을 고백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빈의 《키케리키》는 곧바로 이 사건에 달려들었다. 3월 11일 자에는 그림이 실렸다. 장면은 시립 공원, 벤치 하나. 그 오른쪽에는 포병 하나, 왼쪽에는 목에 개신교 성직자의 표장을 단 신사 하나가 허둥지둥 달아나고 있다. 그 신사가 외친다. “저기 저 포병이 나랑 부도덕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건 들을 수가 없다.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벌써 두 번째다!”

《키케리키》는 차라리 “털이꾼” 사기단도 한번 그려 보는 것이 좋겠다. 이들은 아직도 폐지되지 않은 낡은 형법전의 비호를 받으며, 거짓 사랑을 미끼로 우르닝들을 갈취하려고 바로 빈 시립 공원을 제 구역으로 골라 잡았다. 그런데 1868년 2월 3일 빈 지방 법원은 한 녀석, 곧 웨이터 요제프 발리에게 갈취죄로 중금고 8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시립 공원에서 바로 이 포르스트너 씨에게 20굴덴을 내지 않으면 부도덕한 폭행으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그때 포르스트너의 요청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공판에서 그는 자기 동료 하나가 이미 여러 번, 특히 젊은 성직자들을 상대로 그런 시도를 해서 재미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프레세》 1869년 2월 24일 자. 빈의 《타크블라트》 1868년 2월 4일 자.)

[덧붙여 말하자면, 빈에서 털이꾼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한 것 – 비슷한 다른 사례들도 있다 – 과 뚜렷이 대조되는 것이 베를린의 이중적인 처사다. 한 우르닝이 어느 웨이터와 연애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연인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갔을 때, 사랑받는 쪽은 제삼자 하나를 옷장 속에 숨겨 엿듣게 했다가 미리 정한 순간에 뛰쳐나오게 하고는, 입막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당장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겁에 질린 그는 현금 300탈러와 금시계를 내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600탈러짜리 어음에 서명까지 해야 했다. 이것은 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그제야 그는 경찰을 찾아갔다. 그러자 경찰은 –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들이 점찍은 희생자인 그까지 체포했다! (1869년 2월과 3월.) 이것은 궁지에 몰린 희생자가 보호를 요청하는 일을 아예 단념하게 만들고, 닳고 닳은 털이꾼들에게는 오히려 용기를 북돋는 짓이 아닌가? 갈취를 처벌하는 법의 혈관을 묶어 버리는 짓이 아닌가? (『글라디우스 푸렌스』 부록 참조.) 사기꾼의 짓거리는 그렇게 해서는 막을 수 없다! 베를린 신문들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 물론 셋 다 체포되었다”! – 베를린의 다른 사건에서는, 우르닝의 눈앞에서 뻔뻔스럽게 그의 시계를 빼앗은 겨우 열여섯 살의 사기꾼(1869년 2월 20일)이 신속하게 처벌되었고 우르닝도 체포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우르닝은 형사 경찰의 가택 수색으로 시달렸으며, 그때 경찰은 『멤논』을 포함한 문서와 책 35점을 그에게서 압수했다.]

포르스트너는 3월 4일 장로회로부터 직무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3월 13일 그 정지는 다시 철회되었다. – 인간으로서, 국가 시민으로서 자기 의무를 다하고 자기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우르닝이라면, 악당 하나나 아무 멍청한 녀석 하나가 손바닥 뒤집듯 그의 명예와 삶의 행복을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삶의 행복도 이 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바라건대 그의 명예까지는 아니기를. 마침내 그런 일에 빗장을 지른 빈 장로회의 여러분, 장하다!

덧붙이자면 이미 1863년 무렵에도 다른 개신교 감독 한 사람이 병사와 벌인 우르닝적 장면으로 고발된 적이 있다. 괴팅겐 성 알바니 교회의 목사로, 나의 먼 사촌인 자르니히하우젠 씨다. 국왕 게오르크 5세의 직접 개입으로 교육·종무 장관은 그에게 사임하도록 했다. 그는 아메리카로 떠났다. – 그의 삶의 행복도 짓밟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 글을 적어 놓기가 무섭게 바늘은 다시 가톨릭 쪽으로 기운다.

《뉘른베르거 안차이거》는 《장크트갈렌 신문》의 보도를 전할 수 있게 되어 환호한다(1869년 3월 18일). 보덴 호숫가 로르샤흐 실업 학교 교장인 가톨릭 신부 뢰멜러가 “자연에 어긋나는 악덕”으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1869년 2월 17일 빈의 제국·왕립 고아원에서 가톨릭 수도회인 그리스도교 학교 수사회(frères ignorantins) 소속 교사 “마리누스 수사”가 아우크스부르크 근처의 고향으로 해임되어 돌아갔다. 9세와 12세의 고아 소년 둘, 곧 니콜라우스 폰 베르크호프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한 소년이 그를 “음란”으로 고발하면서 “어떤 일에서 그의 뜻을 받아 주는 것”을 자기들이 거부했다고 말했다. 고아원 학생들 가운데 여럿이 같은 처지에 있었다고 한다. (1698년 아우크스부르크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예수회원 모렐이 세 젊은 제자, 곧 루프레히트 푸거바벤하우젠 백작, 안톤 푸거키르히베르크바이센보른 백작, 크라프토 폰 외팅겐 백작과 맺은 우르닝적 연애 관계와 비교해 보라. 『포르마트릭스』 주 12.) 마리누스 수사는 파리로 갔다고 한다. (빈의 《타크블라트》 1869년 3월 11일 자 이하. 빈의 《포어슈타트차이퉁》 3월 13일 자 이하. 빈의 《폴크스프로인트》.) 《프렘덴블라트》와 《프레세》에 따르면 그는 소년들이 자기 “뜻을 받아 줄” 때에만 좋은 성적표를 주었다고 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방금 누가 내게 뮌헨의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1869년 3월 초 무렵의 한 호에서 오린 기사를 보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F. M …(현재 A… 거주)이 한 청년을 유혹하여 도덕적으로 죽인 일에 관해 추가 증거를 제공하는 분께 100굴덴을 드림. U L 99887로 발송부에 연락 바람.”

1869년 1월인가 2월에 뮌헨과 아우크스부르크의 신문들에서 이런 암시가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의 비서인 한 사제가 그곳 어느 과자점의 펀치 방에서 열두 살 소년과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들켜 검사에게 고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수사 청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을 남용하는 일을 내가 최고도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본다는 다짐은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위에서는 민주주의자 1명, 자유주의 학교 교사 1명, 개신교 감독 2명에 대해 오늘날의 가톨릭 성직자가 무려 5명이다.

나중에 나는 포르스트너 씨의 반박문을 읽었다. (《타크블라트》 2월 26일 자.)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포병은 꽤 오랫동안 내 뒤를 바싹 따라온 뒤에 시립 공원에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바로 내 앞의 벤치에 앉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은 공원에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자기가 11시까지 외출 허가를 받았는데(그때는 막 7시였다. 일요일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시립 공원에서 벌써 여러 번 재미난 모험을 겪었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고 했다. 여러모로 소문이 자자한 이 공원을 나도 공연히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했다, 등등. 그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그가 뻔뻔스럽게도 나를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 나는 그런 고발이라면 그의 중대장 앞에서나 경찰 앞에서 내 얼굴에 대고 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난폭해졌고 경찰로 가자는 데 응했다. … 그가 내게 오기 전에 민간인 하나가 그에게 나를 가리켜 주었다. 그러니 이것은 아마도 비열한 사주이거나 실패한 투기였을 것이다. … 나는 여러 해 전부터 날마다 시립 공원을 찾는데,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벌써 두 번째다.”

그 포병이 했다는 말은 속속들이 그럴듯함의 도장이 찍혀 있다. 그것은 영락없이 자기를 내놓는 자의 말이거나, 올가미를 놓는 자가 흉내 낸 말이다. 이 점에서 빈과 베를린은 달걀과 달걀처럼 서로 닮았다. 다른 쪽에서 전해 들은 바로는, 포병 포글러는 “털이꾼”의 일원이라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으며, 포르스트너는 이미 그를 명예 훼손으로 군법 재판에 고소했다고 한다. 끝으로, 포글러가 발리의 사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심에서 나온 사주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심 판사에게는 포르스트너에 대한 지독한 욕설로 가득 찬 익명의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 《키케리키》 1869년 4월 8일 자는 「정통 신앙의 가르침」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포르스트너 감독이 그리스도교 학교 수사회에 들어간다고 믿어라.”

《포어슈타트차이퉁》 3월 26일 자는 이렇게 전한다. “마리누스에 대한 법원 수사 결과, 그에게 씌워진 행위는 일부는 완전히 왜곡되었고 일부는 아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1869년 3월 23일 이곳(뷔르츠부르크)에서 스물다섯 살 난 녀석 하나가 구걸하다 체포되자, 이곳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예순 살 문지기 발렌틴이 수도원의 한 방에서 자기를 우르닝적으로 유혹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바이에른 법에 따라 법원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검사는 처벌 대상이 아닌 행위의 고발 따위는 무시했어야 할 텐데 – 이상하게도! – 상세한 조서를 작성해 수도원에 보냈다. 그러자 수도원은 곧바로 발렌틴을 내쫓았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 3월 31일 나는 수도원장 비어간스 신부를 찾아가, 어디서 굴러온 부랑자에게, 어차피 허공에서 지어낸 것일 수도 있는 입증되지 않은 주장 하나로 착실한 사람의 밥줄을 손바닥 뒤집듯 끊어 버릴 힘을 내어 주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말했다. “어떤 건달이 언젠가 성직자에 대해 그런 진술을 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도 일관되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또 비어간스 씨에게 그로서는 처음 듣는 포르스트너 사건과 마리누스 사건의 경과, 그리고 빈 장로회의 일을 알려 주었다. 내가 얻은 것은 어깨 한 번 으쓱하는 것과 발렌틴에게 내려진 칭찬 한마디였다. 해고는 그대로였다! – 하지만 어쩌면 자유주의적 교파의 장로회는 가톨릭 수도원보다 더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유주의를 자처하는 것은 모두 “자유주의” 언론의 파렴치한 공격을 면하지 않는가.

곁길에서 돌아와 우리의 실마리로 되돌아가자.

IV. 나는 폰 차스트로와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관계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다.

1867년 4월 프로이센의 장군 폰 포이크츠레츠가 내가 공공연히 밝힌 정치적 법률관을 이유로 재판도 없이 나를 국사범으로 만들어 민덴 요새로 끌고 가게 했을 때, 동시에(『멤논』 제2부 XXXIII쪽 참조) 부르크도르프의 내 집에서 내 서류가 모조리 경찰에 의해 실려 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내게 들어온 런던, 파리, 이탈리아, 베를린 우르닝들의 명단도 있었다. 베를린 명단에는 일부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약 150명의 이름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 폰 차스트로라는 이름도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나의 통신원 한 사람이 몇 달 전에 그를 직접 알게 되었으나,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를 “수다쟁이”로 여겨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에서 일부러 떼어 놓았다고 한다.

베를린의 《뵈르젠차이퉁》 1869년 2월 20일 자는 이렇게 쓴다. “그는 공공연히, 그리고 즐겨 남성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찬미하는데, 이 사랑은 전 하노버 관구 배석 판사 울리히스의 그 말 많은 저작들에서 ‘탈선’을 인정하지 않은 채 유기적 원인과 정신적 조건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는 이 저작들의 내용을 완전히 제 것으로 삼았다. 그 저작들, 특히 『멤논』은 그의 서재에서도 발견되었다.” (내 저작들은 남성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지 찬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애라는 것이 본디 찬미할 만한 것이 아닌 한에서는 그렇다.)

남성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공공연히 고백하는 그의 태도는 나의 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프리드리히슈타트의 한 카페에서 프로이스 박사를 편들어 공개적으로 나선 그의 참으로 대담한 행동(베를린의 《트리뷔네》 1869년 1월 25일 무렵 자가 전한다)도 마찬가지다. 그때 그는 “거칠게 말을 끊겼다”. (당연하다! 지금까지의 체제 아래서 거기서 무례함 말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불순한 목소리들은 틀림없이 위의 말에서, 내가 이미 겪어 본 그런 식으로 내 말을 난도질해 낼 것이다. “저자는 폰 Z.의 행위에 대한 공감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몇 해 전 베를린에서 우르닝인 한 젊은 장교가, 여느 우르닝들이 흔히 하는 것보다 더 대담하고 떳떳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다른 장교들에게 사임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을 꾸며 내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들 앞에서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정당하다고 끈질기게 변호했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은 그의 설명에, 더는 그와 함께 복무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대답했다. 대단한 영웅적 행위다! 그것으로 그는 반박된 셈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1865년이다. 그때 내게 폰 차스트로라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면 내가 크게 잘못 기억하는 것이리라.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친척 한 사람, 곧 베스트팔렌 군관구 사령관 폰 차스트로 각하가, 사람들이 나를 가두어 둔 민덴의 장교 영창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정치적 취지의 꽤 퉁명스러운, 아니 위협적인 훈시를 베풀어 주었는데, 거기에 “당신은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군요”라는 큰 친절을 섞어 넣었다. 그 전까지 내 매일의 산책에는 하사관 한 사람만 따라다녔다. 그는 여기에 병사 하나를 더 붙였다. 총검을 꽂은 총과 실탄 세 발로 무장한 병사였다.]

V. 베를린의 《뵈르젠차이퉁》 1869년 3월 5일 자는 내가 서명한 다음 성명을 실었다.

“… 사람들은 감히 내 저작들이 폰 차스트로가 기소된 것과 같은 범죄를 미화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넌지시 비쳤다. 또 우르닝 사랑이 그 자체로 그런 범죄로 이끌기 쉽다는 두려움도 나타났다. 그런 범죄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혐오한다. 우르닝 사랑은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똑같은 정도로 타고난 것이며, 그 본성상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범죄로 이끌지 않는다. 그와 비슷한 범죄는 본래적 남성들의 사랑에서도 일어난다.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든, 책임 능력이 장애된 상태에서든 말이다.”

논고

이 서론으로 독자에게 나의 주제를 겉으로나마 안내했다고 믿는다. 이제 나는 세 가지 물음을 내놓는다. 내가 그것들을 내놓는 것은 직접 대답하려는 것이라기보다, 그것들에 주목하고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야 대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다만 이 검토를 돕기 위해 나는 내 나름대로 얼마간의 자료를 모으고, 결론은 내리지 않은 채 내 자신의 논의도 덧붙이려 한다.

물음은 다음과 같다. 사건이 요구하는 대로 나는 이 가운데 셋째 물음에 무게를 둔다.

I. 폰 차스트로는 남성 개인에 대한 자기 성적 성향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가?

II. 그는 자기가 (그것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게) 저지른 우르닝적 성애의 행위에 책임이 있는가? 그는 그 행위를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저질렀는가?

III. 그는 이런 성적 행위를 하는 김에 사납게 날뛰는 욕구로 사랑하는 소년들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는가? 그는 그것을 책임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저질렀는가?

I. 우르닝적 성애 충동의 존재에 대한 책임

남성 개인에 대한 자기 성적 성향의 존재에 대해 폰 차스트로는 분명 어떤 의미에서도 책임이 없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가장 독살스럽게 헐뜯고 가장 뿌리 뽑고 싶어 하는 박해자들조차 얼마간 검토한 뒤에는 이렇게 숨김없이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향은 많은 사람에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타고난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 싹은 아주 어린 시절의 그토록 여린 나이에 심어지므로, 그 존재에 대한 책임은 말할 수 없다.”

앞의 말은 이름난 법의학 권위자 카스퍼가 『임상 단편집』(1863년, 34쪽. 그의 말은 『멤논』 제1부 32쪽에 옮겨 실었다)에서 한 것이다. 뒤의 말은 1869년 1월 말에 나온 책 『베누스 우라니아의 역설』(23쪽 아래)에 있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낸 광고가 자랑하듯이 내 저작들(특히 『인클루사』와 『멤논』)을 “분쇄하는 비판”에 부치는 책이지만, 그럼에도 우르닝 사랑이 타고난 것이라는 내 이론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양보는 사실상 내 이론에 절반 넘게 다가온다. 이 익명의 분쇄자는 의학 교수인 듯하다. (나는 그가 어쨌든 뷔르츠부르크의 가이겔이거나 베를린의 피르호일 것이라고 짐작할 근거가 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내가 방금 카스퍼에게서 읽은 대목이다(『법의학 편람』 제4판, 1864년, 제1권 164쪽).

“남색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성향은 타고난 것이며, 말하자면 정신적 양성 구유다. 이들은 여자와의 성적 접촉에 진정한 구역질을 느낀다. 그들의 상상은 아름다운 젊은 남자들에게서 즐거움을 얻는다.”

1868년 10월 31일 빈의 「정신 의학 및 법의학 협회」에서 그곳의 베어 교수는 앞서 말한 카스퍼의 말을 단호하게 지적하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제7권 5장의 말에 의거했다. (아래 제II절 참조.)

다음 발언도 들어 볼 만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점에서는 우르닝 사랑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적(그 견본은 아래에!)의 말인데, 그럼에도 그는 이 말에서, 카스퍼 한 사람을 빼면 비(非)우르닝 가운데서는 아직 비슷한 것을 만나 본 적이 없을 만큼의 혜안을 보여 준다. 1861년 아돌프 슈타르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번역의 부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타락을”(타락?) “너무 가혹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소년애는 오늘날 남녀 사이의 사랑과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기는 하지만, – 그것은 본디 근원적이고 영원한 사랑의 감정이었으며, 말하자면 정당한 자리에서 쫓겨나 그릇된 자리에서 인간 본성을 사로잡은 것이 아닌가.” (“그릇된 자리에서”에 관해서는 『멤논』 제5·8절과 『포르마트릭스』 제92~94절 참조.) 다만 이상한 것은, 영원한 사랑의 감정이 청년에 대한 사랑이라는 형태로 오늘날에도 수천, 또 수천 사람의 가슴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슈타르가 전혀 짐작조차 못 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II. 저지른 우르닝적 성애 행위에 대한 책임

그렇다면 타고난 우르닝은 자기 성적 행동에 관해서, 곧 그가 남성 개인에게 저지른 성적 행위에 관해서 책임 능력이 있는가, 또는 책임이 있는가?

여기서 나는 비우르닝들의 견해만을 끌어와 검토에 부치려 한다. 그 견해들은 완전한 책임 무능력을 지지하는데, 나 자신의 견해는 결코 그렇게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우르닝 사랑에 관한 나의 저작 일곱 권에서 나는 책임 능력을 어디서도 의심한 적이 없다. 물론 성생활 일반을 지배하는 격정의 맹렬함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따로다. 그 맹렬함은 개별 사례에서 실제로 억누를 수 없는, 또는 적어도 억누르기가 극히 어려운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저작 어디에서도 이 맹렬함으로부터 완전한 책임 무능력을 끌어내지 않았다. 『글라디우스 푸렌스』 28·29쪽 참조. 거기서 나는 격렬한 성적 격정의 결과로서 감경된 책임 능력, 그리고 그에 따라 해당하는 경우에는 형벌 감경 사유를 말할 뿐, 형벌 조각 사유는 조금도 말하지 않는다.

또 나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 대한 모든 성적 성향을 병적이라고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에 대한 책임, 또는 책임 능력이 없어진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멤논』 제2부 XIX쪽.

이 모든 점에서 나는 우르닝의 사랑을 디오닝, 곧 본래적 남성의 사랑과 같은 단계에 놓는다. 반면에 앞으로 인용할 목소리들은 바로 디오닝의 사랑과 대비하여 우르닝의 사랑에서 처음부터 책임 능력을 부정한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주 최근의 디오닝 목소리 셋인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모두 바로 나의 저작들을 근거로 그렇게 말한다.

1. 빈의 《메디치니셰 프레세》(1869년 1월 3일 자 제1호, 22단)에서 내 책 『멤논』을 몹시 격렬하게 비판하는 익명의 의학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별 사례에서 우르닝이 처해 있는 책임 무능력 상태인데, 울리히스는 자기도 모르는 채 그것을 변론하고 있다.”

2. 브롬베르크 근처 슈빈의 변호사 겸 공증인 율리우스 주스만은 “1868년 12월 26일 슈빈”에서 내게 이렇게 쓴다.

“당신의 책”(곧 『멤논』)“에서 나는 책임 능력에 관한 학설에 대한 매우 귀중한 기여를 봅니다. 학문의 이익을 위해 나로서는 새로운 진리가 진리로 여겨지는 일이 그토록 드물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여기서 나는 빈의 디오닝으로 쇼펜하우어의 추종자인 철학자 J. 호르눙이, 분쇄하는 『역설』과 《메디치니셰 프레세》의 격렬한 비판을 둘 다 읽고 나서 내게 써 보낸 글을 끼워 넣는다. 그는 두 곳의 공격 방식에서 거듭 마주친, 비학문적 무기를 마다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1869년 2월 23일 빈).

“《메디치니셰 프레세》에서 나는 당신의 『멤논』에 대한 진짜 비판을 기대했는데, 비판과는 이름 말고 아무것도 공통점이 없는 부끄러운 졸작을 발견했습니다. 『역설』을 읽다가는 결국 너무나 화가 치밀어 책을 구석에 내던졌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적들이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것도 비우르닝들 사이에서 이런 효과가 나리라고는 두 곳 모두 거의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두 정신적 산물의 학문적 내용뿐이다.

3. 1과 2보다 훨씬 단호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 『역설』의 저자다. 그는 29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우르닝의 정신적 성적 본성을) “… 고정 관념 또는 편집광으로 본다. 건강한 삶의 정상적 현상에서 그 정도로 벗어난 탈선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장애, 질병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르닝들은 정신 기능이 장애를 겪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부를 것이다.”

아니, 그는 더 나아간다. 나는 『멤논』에서 우르닝의 신체 형성에서조차 남자의 그것과 뚜렷이 다른 점이 자주 나타나며, 그것도 그 신체 형성이 아주 분명하게 바로 여자의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이 신체적 차이들까지 그 질병 속에 엮어 넣는다. (그 차이들은 속속들이 건강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는 거기서 “전체 인간의 병적 상태가 문제라는 새로운 증거”를 찾는다. 30쪽에서 그는 그런 정신 장애의 사례들을 다음으로부터 제외한다.

“인간의 행위에 지울 수 있는 한에서의 책임.” 그 반대는, “그 행위가 과도한 성적 활동이라는 명료한 의식과 윤리적 동기로 그것과 싸울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

내 저작들을 알지 못한 채, 의학 박사 라이히는 그의 소책자 『부도덕에 관하여』(1866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색을 하는 자는 정신이 나간 것이며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82쪽) – “그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소질 없이는 어떤 조건에서도 남색 충동이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질을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오늘날의 학문에 아직 기대할 수 없다.”(83쪽) – “누구나 되도록 빨리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해 주고, … 남색가들을 정신 병원에 보내거나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한다면, 이 악덕의 확산을 가장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93쪽)

한 번은 “정신이 나갔으며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한다”고 했다가, 또 한 번은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하라”고 한다. 또 신체적·정신적 소질이 충동의 원천이라고 했다가, 또 결혼을 가능하게 해 주면 충동을 없앨 수 있다는 어린애 같은 확신을 내보인다! 그러고 보면 어쨌든 어려운 물음은 이것이다. 정작 미친 사람 수용소에 가야 할 것은 남색가인가, 아니면 이런 미친 소리를 지어낸 사람인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이히도 특유한 소질을 충동의 원천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우르닝의 충동을 병적 정서 장애의 산물로 보는 사람은 이제 다음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a) 병적 정서 장애가 우르닝을 그의 성적 행위로 절대적으로 강제한다면, 그는 그 행위에 관해 분명히 완전한 책임 무능력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게 저지른 그의 성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는 전혀 없다.

b) 반면에 감경된 책임 능력의 상태라면, 곧 그 내적 강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감경된 형벌은 물론 선고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근대의 목소리 넷과 나 사이의 대략 한가운데에 고대의 존경할 만한 권위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다. 한편으로 그는 우르닝의 사랑 충동을 병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역시 우르닝이 남성 개인에게 저지르는 성적 행위 일반에 관해서 감경된 책임 능력만을 가정할 뿐, 결코 완전히 배제된 책임 능력을 가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소년에게 저지른 행위는 감경된 형벌만 받을 수는 있겠으나 결코 처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우 주목할 만한 말을 여기 옮기면서 나는 아돌프 슈타르의 처사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분명히 이 노대가를 근대의 박해욕 입맛에 맞추려고 애쓰며, 그래서 그의 번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자연에 반하는 음욕”과 “음행”이 득시글거리게 한다. 이 표현들은 원문이 한 음절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이런 본문 변조를, 내가 『멤논』 제1부 XIV쪽에서 언급한 그 경건한 위조들과 나란히 놓는 일은 독자에게 맡긴다.

(빈의 베어 교수가 앞서 말한 강연의 바탕으로 원문을 삼는 수고를 하지 않고, 슈타르식 가필을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며 청중에게 들려준 것을 나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제7권 4장·5장·7장.

제4장 제2절: “쾌락을 일으키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άναγχαία(필연적인 것, 강제하는 것)이다. ….. 강제하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뜻한다. τά τε περὶ τὴν τροφὴν καὶ 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χρείαν(영양 섭취에 속하는 것과 사랑의 향락에 대한 욕구에 속하는 것).”

제5장 제1절: “어떤 것들은 본성상 즐겁다. …. 그러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고, 일부는 διὰ πηρώσεις(신체 손상, 이를테면 유기적 신체 결함) 때문에, 일부는 습관 때문에, 일부는 διὰ μοχϑηρὰς φύσεις(뒤틀리고 결함 있는 천성 때문에) 즐거운 것이 된다.” [제2절은 그 예로 사람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갖가지 경우를 든다.] 제3절. “Αὖται μὲν ϑηριώδεις(그러니까 이것들, 곧 욕망과 성향은 짐승 같은 것, 짐승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Αί δὲ διά τε νόσους γίνονται καὶ μανίαν ἑνίοις.(또 다른 것들, 곧 욕망과 성향은 몇몇 사람에게서 질병 때문에 또는 정신 장애 때문에 생겨난다.) 이를테면 자기 어머니를 제물로 잡아 그 살을 먹은 자나, 동료 노예의 간을 먹은 그 노예의 경우가 그렇다. Αί δὲ νοσηματώδεις ἦ ἐξ ἔϑους.(또 다른 것들은 병적이거나[곧 위에서처럼 질병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병적인 성질이라는 뜻이다] 습관에서 생겨난 것이다.) 손톱이나 숯이나 흙을 먹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또 여기에 속하는 것이 ἡ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τοῖς ἄῤῥεσι. Τοῖς μὲν γὰρ φύσει, τοῖς δ΄ ἐξ ἔϑους συμβαίνουσιν οἲον τοῖς ἐϑιζομένοις ἐϰ παίδων. §. 4. Ὃσοις μὲν οὖν φύσις αἰτία, τούτους μὲν οὐδ' ἂν εἷς εἴποι ἀκρατεῖς· ὥσπερ οὐδὲ τὰς γυναῖκας, ὅτι οὐκ ὀπυίουσι, ἀλλ' ὀπυίονται· ὡσαύτως δὲ κὰι τοῖς νοσηματοδῶς ἔχουσι ιδ' ἔθος. (또 여기에 속하는 것이 남성 개인과의 사랑의 향락을 향한 [성향]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곧 흙 따위를 먹으려는 성향과 우르닝적 성향은] 어떤 이들에게는 본성에서[슈타르가 뜻으로는 아주 올바르게 옮긴 대로 “타고난 천성의 성향”으로서], 어떤 이들에게는 습관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습관이 든 사람들의 경우처럼. 제4절. 그러므로 본성이 그 원인인 사람들은 모두, 분명 아무도 무절제하다, 방탕하다, 음탕하다고 부를 수 없다. 이는 여자들이 사랑의 향락에서 능동적으로 굴지 않고 수동적으로 군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여자들을 [음탕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습관 때문에 병적으로 사로잡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본성을 끌어들인 것은, 내가 (『빈덱스』 제20절, 『멤논』 제58절에서) 암탉에게 살아 있는 새끼를 낳으라고 요구할 수 없고 암소에게 알을 낳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제7장 제6절: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쾌감에 굴복하는 사람은 분명 우리의 비난 대상이다. 다만 그 탓이 결함 있는 천성이나 질병에 있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다. 이를테면 … 또는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타고난 생김새와 같은 경우처럼.”

이에 따라 우리는 물음을 이렇게 정식화한다.

“폰 차스트로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들과의 성적 교섭에 관해 책임 능력이 있는가? 또는 그의 책임 능력이 상당한 정도로 감경되어 있는가? 그것도 앞에서 소개한 네 목소리가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또는 내가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감경되어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 물음은 검토할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내가 나로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에 대한 모든 성적 성향을 병적인 것, μοχθηρὰ φύσις(결함 있는 천성), νοσημάτοδες(병적인 것)로 보는 쪽으로 기운다 해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개인에 대한 성향이 디오닝 쪽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것은 병적인 것이리라.

(사례 1.) 나는 1856년 마인츠에서 몽주아 출신의 젊은 디오닝 V. H.(22세)를 알았다. 그는 내게 거듭 털어놓기를, 아주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격렬한 충동을 느끼는 반면 다 자란 여자들에게는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아무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그렇게 흥분시키는 예닐곱 살 난 꼬마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 그렇게 느껴 왔다. 그 점을 빼면 나는 그에게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병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속속들이 명예로운 인품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 격정이 그를 대양 건너로 몰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는 형사 수사를 피해 달아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병적이라는 가정에 맞서, 물릴 대로 물린 늙은 디오닝 죄인에게는 아주 어린 여자아이가 아직도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나는 간과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도시의 매춘이 가장 어린 나이조차 결코 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로 여기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스티니아누스가 535년 12월 1일의 정결 칙령(“sancimus, omnes, secundum quod possunt, castitatem agere”(우리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만큼 정결을 지키도록 정하노라))에서 탄식한다. 그는 이 칙령을 향기로운 냄새로 주님께 바친다(“haec sacra nostra lex, domino Deo oblata pro alio quodam suavitatis odore”(주 하느님께 다른 어떤 향기로운 냄새 대신 바쳐진 이 우리의 거룩한 법)). 곧 그는 이렇게 말한다(신칙법 제14호). “Agnovimus enim, … aliquos sic scelestos existere, ut puellas nec decimum agentes annum ad periculosam deponerent corruptionem.”(우리는 알게 되었노라. … 어떤 자들은 어찌나 사악한지 열 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들을 위험한 타락에 내맡긴다.)

카스퍼는 그의 『법의학 편람』(제4판, 1864년)에서(제1권, 사례 95~100) 아이들에게 음란한 행위(아이들의 생식기를 문지르고 자극하는 행위)를 저지른 문지기와 교사 한 사람씩을 언급한다. 문지기는 소년 다섯 명에게, 교사는 소년 두 명(5세와 6세)과 소녀 세 명(6세, 7세, 9세)에게 그런 짓을 했다!

1869년 2월 바이에른 오버팔츠의 배심 법원은 노이마르크트의 교사 뵐러에게 네 살 난 아이(소년? 소녀?)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카스퍼는 강간과 음행을 당한 여성 218명을 검사했다.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았다(앞의 책 117쪽).

14세 이상겨우25명
14세 미만193명
10세 미만124명
7~10세83명
2세 반~3세6명

또 그는(앞의 책, 사례 94) 슐레하이더 사건(『멤논』 제2부 XVII쪽)과 짝을 이루는 사례를 이야기한다. 힘은 세지만 이제 겨우 성숙한 열네 살 반의 농사꾼 젊은이가 들일을 하다가 여덟 살 난 소년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카스퍼 자신이 강조하듯이 아주 하찮은 값으로, “버터 바른 빵 한 쪽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유혹했다. 정말이지, 프로페르티우스가 이 사건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Felix, qui viles pomis mercaris amores!”(과일 몇 알로 값싼 사랑을 사는 그대는 행복하여라!))

폰 Z.가 소년들과 나눈 성적 교섭에 관해서는 아무런 책임 무능력도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이 교섭 중에 사랑하는 소년들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한정 책임 능력이거나 완전한 책임 무능력일 수 있다.

III. 사랑하는 소년들에게 저지른 사나운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

폰 Z.가 소년 두 명에게 저질렀다는 다소간의 혐의를 받는 행위는 다음과 같다.

I. 소년 에밀 한케, 9세, 더 최근의 진술로는 겨우 6세. 범행 일시 1869년 1월 17일. 장소 베를린, 그뤼너 베크 45번지 집의 다락.

a. 성적 행위를 위한 남용.

b. 그는 소년의 얼굴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예심 판사인 시 법원 판사 욜은 물린 상처가 난 얼굴을 사진으로 찍게 하고, 폰 차스트로의 이는 밀랍으로 본뜨게 했다. 둘 다 감정 증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c. 신체 훼손. 소년의 고환을 잘라 냈다.

d. 목을 졸랐다. 소년에게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의도로?

소년이 소리치지 못하게 하려고? 소년을 죽이려고? 그렇다면 살인 미수인가? 아니면 일정한 의도 없이 그저 사나운 욕구에서?

e. 그는 소년의 머리를 난로 연통에 처박았다고 한다. 무슨 의도로? 소년을 질식시키려고?

소년은 신음하며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베타니엔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위중한 상태로 몇 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II. 소년 코르니, 15세. 1867년. 베를린 근처의 한 공터.

a. 성적 행위를 위한 남용.

b. 신체 훼손과 살인. 코르니의 시신은 근처 개울인 판케강에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익사로 죽은 것으로 드러났는지, 아니면 목에 칼에 베인 자국이나 단검에 찔린 상처 따위가, 또는 마찬가지로 목 졸린 흔적까지 발견되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대신 여기서는 생식기가 송두리째 잘려 나가 있었다. 잘려 나간 부분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곧 소문을 타고 동화처럼 부풀려졌다. 코르니의 몸이 – 옛날 콜키스에서 압시르토스의 몸이 그랬듯이[3]! – 작은 조각과 가닥으로 잘려 흩어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이 다른 방식으로 끔찍하게 다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직장이 “완전히 도려내져”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항문을 통해 몸 전체를 꿰뚫고 폐까지 나무 막대기가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악마 같은 잔학 행위가 그냥 형법에 해당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형법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 나로서는 학문의 이름으로 먼저 예비 검토를 요구한다. 이보다 더 끔찍한 행위도 행위자가 범행 순간에 책임 무능력 상태였다는 이유로 형법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인정된 바 있다. 예비 검토 없이 “폰 Z.는 책임 능력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짧고 편하다. 그러나 정당하지는 않다. 베를린 신문들은 “그가 완전히 책임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해 진행된 심문들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가? 책임 능력이 벌써 드러났다고? 그런데 어떤 책임 능력이? 현재의 책임 능력인가, 범행 순간의 책임 능력인가? 범행 순간의 책임 능력을 심문으로 알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 드러났는가? 지금까지 책임 능력 문제에 대한 답은 학문적으로 검토하는 법의(法醫)의 몫이었지, 예심 판사의 몫이 아니었다 – 하물며 신문 기자의 몫은 더더욱 아니었다. 1749년 1월 21일 이곳 뷔르츠부르크에서는 정식으로 진행된 형사 수사에 따라 히스테리에 걸린 수녀 레나타 젱어가 마녀죄로 참수되고, 참수된 뒤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마술과 저주를 고문 없이 자백했던 것이다. 형사 법정의 법률가들에게는 그녀도 “완전히 책임 능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사법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사례와, 법률가들이 지독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던 비슷한 사례들은 전혀 제쳐 두자. 다음의 사례들과, 검토하는 법의들의 아래와 같은 발언만 살펴보자. 거기서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심문에서 끌어낸, 그 “모든 의심을 넘어선” 책임 능력이라는 것은 빈 호두 한 알만 한 값어치도 없다는 것이.

내가 결코 나 자신을 권위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다른 학문 대표자들에게 발언권을 넘긴다. 그것도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우르닝 폰 Z.를 편든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발언 곁에서 나 자신의 견해는 뒤로 물러서기로 한다.

먼저 카스퍼는 이렇게 말한다. “단순히 격정적이지만 아직 책임 능력이 있는 정동과 실제 정신 장애 사이에 경계를 긋기란 극히 어렵다.” (『편람』 제1권 493쪽.)

나로서는 네 가지 점에 주의를 환기한다.

1. 성 충동과 긴밀하게, 아직 해명되지 않은 방식으로 얽혀서, 눈에 띄는 편집광, 곧 병적 정서 장애가 자주 나타난다. 이때 성 충동 자체는 결코 병적으로 손상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나로서는 이미 말했듯이 우르닝의 성 충동을 병적으로 손상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편집광은 디오닝, 여자, 우르닝 사이에서 두루 만난다.

2. 어떤 개인들에게는 때때로, 아무 목적 없이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목마르고 사나운 욕구, 곧 피의 갈망이 있다. 그것은 보기에 책임 능력이 있는 정동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그것이 엄습하는 순간에는 마치 어둠의 나라에서 솟아오른 인쿠부스[4]처럼 그 개인의 영혼을 짓누르는 듯하다.

3. 그런데 이 피의 갈망도 바로 성 충동과 얽힌 그 병적 정서 장애의 하나로 자주 나타난다. 이 형태에서 그것은 성적 신경 흥분이 정점에 이른 순간에, 또는 충족 직후 갑자기 맥이 풀린 순간에,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로 나타난다. 그것도 바로 격렬한 욕망을 불태웠던 그 존재 자체에게서 이 피의 도취를 채우려는 욕구로 나타난다.

4. 심리학적으로 보아 영혼이 흐려짐 없이 건강한 상태에서 이런 악마 같은 만행이 저질러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이것은 여기서 곧바로 책임 능력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 바로 그 신문 기자조차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폰 Z.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사나운 피의 갈망의 행위라면, 아무리 극단적인 것이라도 나는 나의 논의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그가 실제로 희생자를 죽였거나 죽이려 했다 하더라도 그렇다. 다만 이미 말했듯이 나는 계획 없고 목적 없는 피의 갈망의 행위만을 말하며, 따라서 폭행을 저지른 뒤 그 흔적을 지우고 두려운 증인의 입을 막으려는 의식적 목적으로 행한 살해(살해 미수), 곧 본래의 모살과 모살 미수는 제외한다. 그 경우라면 책임 능력에 대해 더는 논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나 살해 미수가 있는 경우, 폰 Z.가 의식적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는지 아니면 목적 없는 피의 갈망에서 행동했는지는, 나의 논의에 대해서는 선결 문제다. 그것은 예심 판사가 밝혀낸 증거 자료로 답해야 할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래의 사례들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저질러진 것은 잔인한 폭행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 사정을 우르닝 특유의 여성처럼 부드러운 기질과 모순된다고 보면서, 우르닝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contra naturam sui generis(자기 부류의 본성에 반하는 일)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그럼에도 폭행을 저질렀다면 바로 그것만으로 정신 장애를 추론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에 맞서 두 가지 사실을 내놓는다. 그것들은 아마 예외에 지나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르닝도 건강한 정신력을 지닌 채 폭행을 저지를 수 있음을 증언한다.

a. 코르노이부르크(니더외스터라이히) 근처 불체스호펜의 농부 요제프 크라프트는 자연을 거슬러 한 여자와 혼인했다. 그는 우르닝이며, 결코 남색가가 아니다. 독일에서 우르닝들은 단연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색가다. 그에게 우르닝 특유의 여성 닮음, 이를테면 여성적인 일과 취향 같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그의 변호인인 빈의 법학 박사 도스탈이 내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도 1868년 2월 8일 그는 그 아내를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였다. (이야기는 『멤논』 제2부 XII쪽에 있다.)

b. (사례 2) 다음은 분명 지극히 드문 사례인데, 믿을 만한 경로로 보증받은 것이다. 1849년 어느 저녁, 베르가모(롬바르디아) 근처의 숲에서 이탈리아인 우르닝 둘이 마침 그 길을 지나던 말쑥한 오스트리아 병사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다가갔다. 그 병사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으로, 기마 포병대 소속이었고 군도를 차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몸에 숨겨 지니고 있던, 실탄을 잰 권총을 갑자기 들이대고는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그를 강제로(그야말로 흔한 강간 그대로!) 두 사람 각자의 능동적 충동에 쾌락을 내주게 했다. 그 병사의 이름은 나에게 알려졌다. 1864년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한다. 그는 디오닝이었다. 내 출처는 그의 옛 전우가 나에게 직접 써 보낸 편지다. 이 전우는 우르닝인데, 그 사실을 병사는 꿈에도 몰랐고, 그래서 언젠가 이 전우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사례 3) 기묘한 우연의 장난으로, 베를린에서는 이미 예전에도 하필 한케라는 이름의 사랑받던 소년이 습격당한 일이 있었다(물론 사정은 다르다). 그것은 신체 훼손 없는 직접적 살해였고, 범인은 그 전에 소년을 거듭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자백한 사람이었으며(그는 매우 자세히 진술한 그 자백을 나중에 철회했지만), 끝내 책임 무능력으로 판정받았다. 요한 그니저는 52세로, 허약하고 몸이 마비되었으며 지력이 모자랐고, 때때로 “얼빠진 생각”에 사로잡혔으며, 마음이 여렸고(“누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18..년(대략 1840~50년) 2월 11일 어느 지하실에서 12세 소년 한케를 도끼로 너댓 번 내리쳐 머리를 박살 내 죽였다. 그는 장작 지하실의 나무 받침대 둘레에 도미노 패를 흩어 놓았는데, 자기의 작은 살림을 돕던 한케가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히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되자 그는 첫 일격을 가했고, 한케는 쓰러져 그르렁거리며 신음했다. 그는 곧장 경찰에 가서 말했다. “내가 소년 하나를 때려죽였으니 이제 되도록 빨리 처형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체와 도끼가 놓인 지하실의 열쇠를 내놓았다. 그의 말로는, 마지막으로 한케를 학대했을 때, “범행 직전”에[몇 시간 전인가? 며칠 전인가?]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의붓아버지에게 이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 위협이 실현될까 두려워 그를 때려죽였다는 것이다. 자백을 철회한 뒤에는, 오로지 삶이 지긋지긋해서, 곧 단두대에서 빠르고 손쉽게 죽으려고 그를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실제로 그는 전에 이미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그 흉터가 아직 목에 남아 있었다.) 범행 11일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어떤 때는 ‘연금 생활자’라고, 어떤 때는 ‘가구상’이라고 적는단 말이야. 내가 직함을 두 가지나 쓴다는 걸 경찰 고문관 D.가 알게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랬다간 나를 잡아가라고 할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서 “알아들을 수 없는 횡설수설”을 들은 적도 없고, 그가 “머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도 없었다. 카스퍼는 말한다. “이 사례는, 명백히 존재하는 광기를 가장 가까운 지인들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정신병자가 얼마나 능란한 사전 계획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범행을 준비할 줄 아는지를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니저는 이성의 사용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고의 방향에서 얽매이고 사로잡혀 있었다 해도, 계획적인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니저는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죽었다.(카스퍼, 『법의학 편람』 제4판, 1864, 제1권, 487쪽. 카스퍼, 『임상 단편집』, 1863, 299~304쪽.)

이제 성 충동과 한데 얽혀 자라난 저 잔혹성의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자. 여기저기 흩어져 전해지는 낮은 정도의 잔혹 행위에서 출발해 보자. 그러면 점점 심해지는 양상이 뚜렷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옛 자료들을 바탕으로 엮은 작은 모음집 『가톨릭 성직자의 교리와 생활에 관한 폭로』(존더스하우젠, G. 노이제 출판, 1862, 73쪽)는 1713년의 일로 이렇게 전한다.

“란츠베르크의 마기스터 율리우스 펠란다는 소년들을 어찌나 걷잡을 수 없이 사랑했던지, 음욕에 겨워 미친 사람처럼 그들의 뺨을 깨물었다.”

마르티알리스(11권 71편)도 우르닝 투카에 대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투카가 사랑했던 소년을 두고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Nil te dente movent saucia colla tuo”(네 이에 상처 입은 목도 너를 움직이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투카는 깨물 자리로 뺨 대신 목을 골랐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깨문 일을 말한다는 것은 dente saucia(이에 상처 입은)라는 말이 증언한다.

정말로 깨물고 싶은 갈망은 건강한 상태의 인간 본성에는,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라도, 낯선 것이리라.

(사례 4)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어느 남색가의 다음과 같은 잔혹 행위를 전해 들었다. 북독일의 매우 지체 높은 인물인 이 사람은 몸을 결합하는 행위를 할 때 상대를 일부러 난폭하고 가차 없이 다루려는, 억누를 수 없는 갈망에 휘둘렸다. 그렇게 해야만 그는 진정한 쾌락을 느꼈고, 그래서 환희에 겨워 환성을 질렀는데, 상대가 그의 밑에서 고통으로 몸을 비틀수록, 더 크게 비명을 지를수록 그 환희는 더 컸다.(이보다 훨씬 더 나아간 현상으로는 아래 사례 8, 드 라발 드 레를 참조.) 덧붙여 말하면, 여기서(사례 4에서) 희생자는 소년이 아니라 병사들이었다.

이 두 가지, 곧 이런 가차 없음과 저 깨물기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기이한 인상을 줄 것이다. 둘 다 건강한 상태의 사랑 충동의 본성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건에 더 가까운 잔혹 행위로 넘어가자.

전혀 목적 없는 잔혹 행위는 보통의 사랑에서도 일어난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로 성적 폭행, 곧 강간의 경우에 그러한데, 강간은 그 자체가 주로 성적 광란에 가까운 성적 흥분 상태에서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사건에서는 강간범이 강간한 여자의 생식기에 나중에 나무 막대기를 세차게 찔러 넣었는데, 피가 흐르는 것을, 그것도 바로 이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은 목마른 갈망에 이끌려서였다. 이것을 코르니 사건의 아주 비슷한 만행과 견주어 보라. – 1868년 헤센다름슈타트에서 오버묄슈타트의 페터 포이어바흐가 12세 소녀를 욕보이고 살해했을 때의 “끔찍한 정황”(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도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피에 굶주린다는 영예를 하필 우르닝에게, 그것도 우르닝 전부에게 돌리는 어느 니더외스터라이히 법의의 순진함에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1868년 6월 19일 코르노이부르크에서 앞서 말한 아내 살해범 크라프트에 대한 공판 중에 알렉산더 퀴힐러 박사는 “젊은 남자들과 성적 교제를 하는” 자들에 대해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잔혹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 수준의 학문이라면 사모예드인이나 피푸호하인도 이미 올라섰을 것이다.

차스트로의 두 사건, 곧 코르니 사건과 한케 사건에서 신체 훼손의 대상은 바로 생식기였다. 코르니의 시체의 경우 잘려 나간 부분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훼손한 자가 그것을 가져가기라도 한 것처럼! 심리학적 비교를 위해 이에 대응하는 사례 두 가지를 들겠다. 사례 a가 지금의 책임 능력 문제에도 어쩌면 멀게나마 의미가 있을지는 열어 두겠다.

a. (사례 5) 15세쯤 된 어느 우르닝에게 사춘기가 깨어나면서 성욕의 첫 불길이 타올랐으나 채워지지 못했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상상이 그를 몰아쳐 가장 거친 환상에 몸을 맡기게 했다. 상상은 그를 어느 싸움터로 데려갔다. In quo campo militi alicui juveni interfecto, formositate ceteros superanti, humi jacenti, membra genitalia abscindere sibi visus est(그 싸움터에서 그는, 죽임을 당해 땅에 쓰러져 있는, 아름다움이 다른 이들보다 빼어난 어느 젊은 병사의 생식기를 잘라 내는 자신을 보는 듯했다). 이 환상은 그를 지배하던 막연한 음욕의 갈망에 어느 정도 포만감을 주었다. 2년쯤 뒤에 그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충동에 쫓겨, 한집에 사는 사람의 소유인 죽은 수사슴에게서 밤에 몰래 membri virilis partem(남근의 일부)을 잘라 내어 그 조각을 가지고 가고 싶어졌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무모한 짓을 실제로 해치울 때 나는 그야말로 광란 상태였습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몰아댔어요. 전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떨림과 전율이 나를 덮쳤습니다.”

b. (사례 6) 다음의 기이한 사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범인이 우르닝인지, 또 어떤 심리적 원인이 범행으로 몰아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질투에 사로잡힌 디오닝의 복수라면, 이 사례는 애초에 여기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훼손당한 사람 자신이 틀림없이 더 자세한 진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복수의 달콤함은 복수한 자가 승리의 순간에 앙갚음의 동기를 말없이 삼키도록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빈의 《프레세》 1869년 2월 24일 자에 운터크라인에서 2월 18일에 보낸 기사가 실렸다.

“(1869년) 2월 11일 정오 무렵, 전역병 N.이 클라인코렌 마을 근처의 깔짚 채취 구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짜 턱수염으로 얼굴을 가린 낯선 남자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왔고, 그중 하나가 큰 칼을 그의 목에 대고 위협했다. ‘소리 한 번만 내면 넌 죽는다.’ 그러고는 그를 몇 길 떨어진 덤불 속으로 끌고 가서 옷을 찢어 벗기고 그를 부분적으로 거세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노획물을 가지고 사라졌다. 이 범죄의 동기는 훼손당한 사람 자신조차 모른다. 범인들을 수사 중이다. 훼손당한 사람은 아직 생명이 위태롭다. 짐작대로 미신이 작용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농촌 주민의 교양 수준을 보여 주는 개탄스러운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르닝이 저지르는 거세의 경우에는, 동시에 나란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류의 동기들을 서로 구별해야 한다.

a) 단순한 잔혹성,

b) 이미 있는 성적 흥분을 생식기에서 채우려는 갈망,

α) 바로 그곳에 가하는 잔혹 행위로써이든,

β) 또는 그것을 제 것으로 삼아 그 소유로 포만감을 얻으려는 것이든.

디오닝들은 대개 모르지만, 젊은 남자가 우르닝에게 미치는 성적 매력은 모두 바로 이 부위에 집중되어 있다.(『포르마트릭스』 제8·9절)

이제 우리는 한케와 코르니에게 저질러진 것과 같은 부류의 잔혹 행위라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영역을 내게 주목할 만해 보이는 한 언명으로 열지 않을 수 없다. 거기 나오는 귀신론적 개념을 빼면 이 견해는 나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저자가 나와는 전혀 다른 길로, 곧 나는 자연과학적 심리학의 길로, 그는 신비주의적 귀신론의 길로 거기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J. 폰 괴레스(『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제4권 제2부, 1842, 460쪽)는 「악마적 피의 갈망」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말한다. “생식의 쾌락과 친족 관계에 있으면서 그 이면을 이루는 것이 살인의 쾌락이다. 둘 다 피의 도취를 일깨운다.” 그에게(같은 책 421쪽) 생식 충동과 피의 갈망은 똑같이 “악마적 교감의 접점”, 곧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 광란과 맞닿을 수 있는 성향이다. 그는 말한다(461·462쪽). “자라나는 충동은 점점 더 의지의 지배에 맞서 싸울 것이다. 끝내 그것은 의지의 힘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그 저항할 수 없음 속에서 충동은 이제 제 농노를 끔찍한 짓에서 끔찍한 짓으로 몰아가고, 마침내 오브세시오”(일종의 신들림) “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 거기서 생겨나는 행위는 악마적 성질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행위는 단계적으로 악마의 세계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 들이기도 한다. 처음에는 격정에 의한 압도였던 것이 마침내 악마에 의한 압도가 된다.”

(사례 7) 실제로 성욕과 피에 대한 갈증과 광기가 서로 한데 얽혀 자란 듯한 기질들이 있다. 괴물 같은 쥘 드 사드 후작(1740년 출생, 1814년 사망)이 여기에 속한다.[5] 그는 그 긴 생애 가운데 띄엄띄엄 29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는데, 믿기 어려운 성적 방종 때문에 그곳에 갇혔던 것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음란한 관능으로 여자 사랑과 남자 사랑을 그야말로 뒤섞어 행했고, 성숙하지 않은 소녀와 소년을 욕보였다. 모든 것이 극단에 이르렀고, 희생자들에게 가장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는 그들을 채찍질하고, 깨물고, 베었으며, 몇몇 경우에는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는 비세트르 정신병원에서 죽었는데, 그곳에서 정신이 흐려진 채로, 그러나 광증 속에서도 여전히 음란하고 방종하게 마지막 몇 해를 보냈다. 언젠가 그가 감옥인지 정신병원인지로 끌려간 뒤, 사람들이 그의 성의 정원에서 공기를 더럽히던 늪이 된 연못의 물을 뺐다. 그 안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채 서로 묶인 소년과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에는 분홍 비단 리본이 살갗을 꿰어 지나가 있어, 토끼 고기에 비계를 꿰어 넣듯이 이를테면 꿰어 박혀 있었다. 후작이 그들을 욕보이고 산 채로 그렇게 고문한 다음 물에 빠뜨려 죽였으리라고 짐작되었다. 적어도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 외딴 작은 집을 하나 두고 사람들을 꾀어 들여 살가죽 한 조각을 벗겨 냈다. 크레키 후작 부인이 『회상록』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그가 어떤 여자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무릎 아래 살가죽을 째서 일부를 벗겨 냈다고 한다. 여자의 비명을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와 보니 현관문이 잠겨 있었으나 이를 부수고 들어갔고, 그러자 그는 서둘러 달아났다. 사람들은 살가죽 한 조각이 아직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크레키 후작 부인은 비세트르에서 그를 직접 보았는데, 그는 다른 미치광이들과 함께, 겉으로는 멀쩡한 정신으로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다. – 그는 널리 알려진 소설 세 편을 썼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1794), 『쥘리에트』(1798), 『카르투지오회 수도원 문지기 동 부그르 이야기, 또는 사튀르냉의 회상』(1777)이다. 이 소설들은 여자, 남자, 소녀, 소년에게 가해지는 피에 굶주린 음욕의 가장 미친 산물들을 담고 있으며, 읽는 이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참으로 전대미문의 괴롭힘과 고문, 채찍질, 살인을 그린다.(미쇼의 『세계 인명 사전』, 브로크하우스·피러·마이어의 백과사전, 쥘 자냉의 「사드 후작」, 앞서 말한 『회상록』.)

비고. 여기서도 폰 차스트로의 경우처럼 베기와 그 밖의 잔혹 행위에 깨물기가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 이렇게 결합되어 있을 때 깨물기는 펠란다와 투카의 경우처럼 따로 떨어져 나타날 때보다 분명 더 급성의 성격을 띤다. 오히려 이렇게 결합되어 있을 때 깨물기는 정신 장애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무게를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례 8) 사드와 짝을 이루는 놀라운 사례를 우리는 질 드 라발, 일명 드 레에게서 만난다. 프랑스 원수였던 그는 아이들을 살해하고 남색과 마술을 행한 죄로 1440년 낭트에서 처형되었다. 19세기였다면 아마 그도 정신병원에 보내졌을 것이다. 레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돈에 쪼들리게 되자, 처음에는 연금술에서, 다음에는 악마에게서 도움을 구했다. 그의 하수인 프렐라티에게 악마는 스무 살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숲에서 금괴 더미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누런 모래 더미로 드러났다. 프렐라티는 감옥에서 그렇게 진술했다. 레는 – 정작 그에게는 악마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 첫 제물로 악마에게 바쳤다고 한다 – – 죽인 아이의 손과 심장과 눈과 피를.(재판관들은 마술 혐의로 심문했다. 고문하겠다는 위협으로 숱한 자백을 받아 냈던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히 입증되었고 동시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는 늙은 여자를 시켜 아이들, 곧 양치기 소년, 거지 아이 등을 자기의 마슈쿨 성으로 꾀어 오게 했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언제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상상력이 지어낼 수 있는 가장 파렴치한 쾌락에 빠졌다. 이 쾌락에는 피의 갈망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의 야수성의 희생자들이 오직 죽어 가는 순간에만 그에게 진정한 자극을 줄 정도였다! 그는 제 손으로 그들을 죽였다. 그들의 비명, 그들의 그르렁거림, 그들의 경련과 몸부림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사나운 갈망에 차서 그들의 고통을 더 늘리고 더 끌려고 애썼다. 이 쾌락을 마음껏 누리려고 그는 죽어 가는 아이들 위에 걸터앉곤 했다.”(내가 괴레스에게서 찾은 이 대목은 아마 로비노에게서 따온 것이리라. 아래를 보라.) 샹토세 탑에서는 그가 도살한 희생자들의 뼈가 가득 든 통이 하나 나왔다. 그가 죽인 아이들의 총수는 150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고소한 것은 아이를 빼앗긴 아버지 여섯 명뿐이었다. 당시에는 어디서나 재판관들이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면 언제나 마술을 의심하는 것이 관례였다. 재판관들 앞에서 그는 분명 유도에 따라, 아이들을 악한 세력, 특히 벨제붑, 벨리알 등의 귀신과 저 젊은이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자백”했다.(그가 소녀들에게도 그 끔찍한 짓과 능욕을 저질렀는지는 괴레스의 글로는 알 수 없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괴레스뿐이다.) 1440년 10월 25일 그는 낭트 근처의 막달레나 풀밭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다. 그는 뉘우치며, 저 프렐라티를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확신 속에 죽었다. 이 뉘우침 때문에 그의 유해는 축성된 땅에 묻히기까지 했다.(소송 기록은 오늘날에도 낭트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발췌본은 파리 제국 도서관에 493번으로 있다. – 로비노, 『브르타뉴사』 제1권, 1707, 614~617쪽. – J. 폰 괴레스, 같은 책 462~466쪽.) – 그 시대에도 고전은 있었다. 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Πᾶσα γὰρ ὑπερβάλλουσα ἀκολασία καὶ χαλεπότης αἱ μὲν θηριώδεις αἱ δὲ νοσηματώδεις εἰσίν.”(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5장 5절) “모든 도를 넘는 방종과 사나움(잔혹, 탐욕)은 짐승 같은 것이거나 병적인 것이다.”

실제의 피의 갈망과 대비되는 것으로, 병적인 상상 속에만 있는 피의 갈망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여기서 세 가지 예를 들겠다.

(사례 9) 라발 드 레보다도 더 놀라운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 1613년 이셀 수녀원의 네덜란드 수녀 마리 드 생스다. 그녀는 잔혹의 망상이 빚어낸 상(像)의 한 예인데, 당시에는 그것을 실제로 저지른 잔혹 행위로 다루었고, 성적 관능은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마술에 대한 믿음과 마술 박해열에 흠뻑 젖어 있던 그 시대에는, 광기가 아주 자주 마술사, 마녀, 늑대인간 따위라는 망상의 형태를 띤 것 같다. 우리 시대에 “왕자”, “국왕”, “메시아” 따위라는 형태를 띠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당시에는 그 망상에 정신 의학이 아니라 형사 수사로 대처했다는 슬픈 차이가 있을 뿐이다. 1611년쯤 마리 드 생스는 자기 자신을 마녀라고 고발하여 체포되었다. 1613년 그녀는 포괄적인 자백을 했다. “나는 많은 아이를 죽였습니다. 몇몇은 산 채로 배를 갈랐습니다.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을 이로 짓씹어 먹었습니다. 몇몇은 산 채로 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솥에 삶았고, 몇몇은 압착기로 눌러 죽였고, 몇몇은 사자와 뱀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고, 몇몇은 벽에 머리를 부딪쳐 깨뜨리고 가죽을 벗겨 소금에 절이려는 듯 토막 냈으며, 몇몇은 목이나 팔이나 다리나 남자 생식기에 매달았습니다. 모두 악마에게 바쳤습니다. 몇몇은 구세주를 욕보이려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내가 목 졸라 죽여 사람들이 묻은 아이들을 밤에 다시 파내어 우리의 밤 모임에 가져갔습니다.”(마녀들의 집회, 곧 마녀의 안식일을 말한다.) 그 수녀원은 봉쇄 수녀원이어서 그녀는 담장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녀원에 사자와 뱀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일흔 살의 메헬렌 대주교는 이 자백을 듣고 엄숙히 선언했다. “나는 이 수녀에게서 본 것과 같은 죄와 악덕과 범죄와 끔찍한 짓의 심연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틀림없이 산 채로 화형당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뒤에도 같은 값어치의 자백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예컨대 1634년 뷔르츠부르크의 “마녀 화형” 때처럼. 개신교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틀림없이 그녀도 “뉘우치며” 죽었을 것이다. 화형당한 마녀들이 거의 모두 그랬다고 전해지듯이.(Historia de tribus energumenis in partibus Belgic.(벨기에 지방의 세 귀신 들린 자 이야기) – 괴레스, 같은 책 468~470쪽.)

(사례 10) 편집광의 상상이 빚어낸 상 속의 잔혹성을 보여 주는 예로는 또, 한때 독일 등지에서, 그러나 특히 프랑스에서 늑대인간이라 하여 처형한 남자들이 있다. 이것도 여기저기서 성적 광란과 얽혀 있었던 듯하다. 그들은 대개 역시 산 채로 화형당했고, 아주 드물게 종신 수도원에 갇히거나 아예 사면되기도 했다.(독일에서는 후스 시대에 콘스탄츠에서 늑대인간 하나가 화형당했고, 마지막은 1603년 그르노블에서였다.) 그런데 아주 젊은 청년이나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 고문도 없이 자기의 상상 속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백했다. 이 기묘한 정신병자들은 옷을 벗었다고 생각한 뒤 갑자기 늑대의 모습이 되어 늑대 털과 늑대 이빨이 온몸에 곤두서고, 네 발로 걷고, 울부짖으며 들과 숲을 헤매고, 생각처럼 빠르게 휙휙 아득히 먼 거리를 내달리고, 공중으로 질주하며 강과 큰 강을 건넌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늘 피의 갈망에 쫓긴다고 느꼈고, 소와 양을 찢어 죽이고, 심지어 사람, 특히 아이와 젊은 처녀를 덮쳐 갈기갈기 찢고, 목 졸라 죽인 아이의 뇌를 파먹는다고 믿었으며, 그러다가 다시 진짜 늑대들 틈에 섞여 진짜 암늑대와 교미한다고 믿었다. 같은 무렵에 실제로 사람과 가축이 늑대에게 습격당한 일이 드물지 않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면 이 사실은 당연히 자백을 확증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늑대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암늑대인간으로 형사 수사를 받던 한 여자가 법정이 보는 앞에서 기절했다. 두 시간 뒤 깨어나서 그녀는, 방금 늑대의 모습으로 (두 시간 길 떨어진) 도시 옆 목초지에서 소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찢어 죽였다고 밝혔다. 법정은 부랴부랴 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목초지에서 실제로 늑대가 소와 양을 찢어 죽였던 것이다! 이 늑대인간들은 자기가 늑대라고 믿지 않는 시기에도 실제로 네 발로 걷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구, 아니 보기 드문 재주를 자주 보였다. 어떤 젊은 늑대인간은 물고기의 날 내장을 몰래 삼키다가 들켰다. 그는 13세 청년으로, 법원 판결로 종신 수도원에 갇혀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서도 여전히 사람 고기, 특히 젊은 처녀의 고기가 먹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는 열일곱 살도 되지 못해 죽었다. 언젠가 늑대 한 마리가 어떤 처녀를 덮쳤다가 제3자가 휘두른 몽둥이에 쫓겨난 일이 있었다. 저 13세 청년은 “그 늑대는 나였다!”라고 밝혔다. 그는 사건 현장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 일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말했고, 그 가운데는 제3자가 그때 어떤 소리를 질렀는지도 있었다. 그 진술은 들어맞았다. 그러나 범행 당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 기절해 있었는지 따위는 확인되지 않았다.(괴레스, 같은 책 472~484쪽.) 당시 독일과 프랑스에 아직 늑대가 없었다면, 그때 늑대인간도 좀처럼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피의 갈망의 상상은 틀림없이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이른바 늑대인간들은 실제로는 어떤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은, 더없이 무해한 존재였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 리옹의 질 가르니에에 대해서만은 실제로도 아이들을 덮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앞의 49쪽 2항에서 말한 종류의 기질이었음이 틀림없다. 3항이 아니라.[6] 그는 1573년 돌에서 처형되었다.(괴레스, 484쪽.)

진짜 늑대인간이 있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되었고, 아마 모든 인도게르만 민족의 공유 재산일 것이다. 로마인은 틀림없이 그 믿음을 게르만인의 신화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신 에다』에서는 아스 신들이 로키의 아들 발리에게 늑대의 모습을 주고, 그러자 발리는 제 형제 나르비를 찢어 죽인다.(짐로크 역 『에다』, 1851, 284쪽.) 『고 에다』의 「훈딩 살해자 헬기의 노래 1」에서는 구드뮌드가 신피외틀리에게 아주 수상한 일들을 들이댄다.

“너는 숲에서 늑대들과 어울려 흥청거렸다. 얼음 같은 숨결로 자주 상처를 빨았고, 덤불 속에 숨었다. 너는 펜리르의 늑대들보다 더 고약했다. 늑대 울음에 익숙해져 숲속 덤불 아래 누워 있었다. 너는 그라니의”(아마 어느 늑대의) “신부였다. 달리도록 길들여지고 고삐가 채워졌다. 나는 너를 타고 여러 길을 달렸다.”

(같은 책 132·133·401쪽.) 신피외틀리가 늑대로 변한 일은 『뵐숭 사가』 12·13장이 분명히 이야기한다.

페트로니우스는 트리말키오의 잔치에서 니케로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게 한다.

“밤에 우리는 공동묘지를 지나갔다. 내 길동무가 옷을 벗어 길가에 놓았다. 갑자기 그는 늑대가 되었다. 울부짖으며 숲으로 달려갔다. 그의 옷은 돌이 되어 있었다. 죽을 만큼 놀란 채 나는 아침에 멜리사의 집에 닿았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늑대 한 마리가 우리 마을에 와서 가축을 물어 죽였어요. 그런데 우리 하인이 그놈 목에 창을 던져 꽂았지요.’ 돌아오는 길에, 돌이 된 옷이 놓여 있던 자리 땅바닥에서 나는 많은 피를 보았다.”(곧 피를 많이 흘리는 누군가가 거기서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그런데 집에 와 보니 내 길동무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례 11) 인정 많고 마음씨 착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던 우리 집안의 한 부인은 여러 해 동안 기이한 불안에 시달렸고, 그 불안은 해마다 심해졌다. 이 불안은 예컨대 아이가 물가에서 노는 것을 볼 때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말했다. “마치 내 안에 무엇인가가 있어서, 나더러 저 아이를 물에 던지라고 몰아대는 것 같아.” 언젠가 딸의 젖먹이 가까이에 칼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같은 불안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다급하게 딸에게 말했다. “그 칼 치워라! 꼭 내가 그걸로 네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해야만 할 것 같구나.” 한번은 딸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그 칼에 피가 묻지 않았는지 좀 봐라. 꼭 내가 그걸로 네 아이를 해치기라도 한 것 같구나.” 딸은 기겁하여 제 어머니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주목할 만한 것은, 어머니가 그 칼에 손도 대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불안하게 했던 그 행동의 유령을 실행하려는 시도는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다른 종류의 망상은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책임 능력과 정신 장애에 관해 여기서 몇 가지 법의학적 언명을 들겠다.

1) 카스퍼는 어떤 사람이 책임 능력을 갖추려면, a) 자기 행위의 결과와 그것이 형법과 맺는 관련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하고, b) 동시에 위법한 욕망이 밀려들 때 이에 저항할 힘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임상 단편집』, 1863, 267쪽.) 그는 말한다. “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이 멈춘 정신병자는 바로 그 때문에 타고난 정념을 이성과 도덕률로 더는 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둘에게서 풀려난 정념이 그에게서 터져 나온다.”(같은 책 249쪽.)[이성의 자유로운 사용은 잠깐 동안만 가로막힐 수도 있지 않은가?] “정신 장애가 지성의 전 영역을 늘 어둡게 하여 환자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명료하게, 아니 능란하고 날카롭게 말하고, 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등, 그리고 자기에게 도덕적 강제를 가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망상을 숨길 줄 아는 정신병자들이 있다.”(같은 책 273쪽.) “심리학의 경험은 천 가지 사례를 보여 준다”(부분적 광기의), “이것들은 정신 전반의 반응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다. 경험은 또 다른 사례들도 보여 주는데, 거기서는 사람이 부분적 망상 때문에 분명히 광기의 낙인이 찍힌 행위로 내몰린다.”(앞에서 본 질 가르니에를 다른 “늑대인간들”과 대비하고, 상상 속 피의 갈망을 실제의 피의 갈망과 대비해 보라.) “… 고정관념이 … 어떤 정념의 토양 위에서 자라났고 …, 마침내 그것이 환자를 위법 행위로 휩쓸어 가서 환자가 그 고정관념의 관점에서 그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때는 그가 그 고정관념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다.”(『편람』 제1권 503쪽.) 그런데 지속하는 부분적 광기만 있는 것일까? 사드나 라발 드 레 같은 자의 정서를 사슬로 묶는, 순간적으로 일깨워졌다가 금세 다시 지나가 버리는 광기, 곧 순간적 광란의 광기는 없는 것일까?

2) 의학 박사 폰 크라프트에빙은 이렇게 말한다(프리드라이히의 《법의학 회보》, 1864, 244쪽).

“사법은 자연 연구의 성과에 문을 닫아걸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에서 인간이 느끼고 의욕하는 법칙을 규명하려고 애써야 한다. 거기서 얻은 결과를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아야 한다. … 자유로운 의지 결정 능력이 비정상적인 심리 과정으로 방해받는 곳에서, 그 개인은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책임 능력 문제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곳에서는 아무리 신중하게 검토해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방향은 다르지만) 구스타프 코린스키 백작 사건이 입증한다. 1868년 뮌헨의 배심원들은 그를 책임 능력이 있다고 인정했다. 몇몇 의사가 그를 이미 부분적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선언하고, 머지않아 그에게서 전반적 광기도 터져 나올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불과 몇 달 뒤 그사이에 광란증이 터지는 바람에 그를 로젠베르크 요새에서 에를랑겐의 정신병원으로 이송해야 했고, 그 이송 길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자기의 모직 담요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쥐어뜯고 씹어 놓았다. 이 일은, 폰 차스트로에게 그런 식의 나중의 발병이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사건에서 신중하라고 촉구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차스트로 사건은 남자를 사랑하는 우르닝의 성적 본성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판결하는 재판관들에게 특별히 세 번 거듭 당부하고 경고하는 바이다. 불거지는 심리학적 문제를 보통의 법의들에게 맡기지 말라. 그들은 이 성적 본성의 특이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연구해 본 적도 없으며, 그래서 이를테면 물려받은, 그토록 위험한 “자연에 반한다”는 개념을 아직도 그것에 갖다 붙인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정말이지 피고인의 자유와 생명을 알렉산더 퀴힐러 식 지식의 지평 속에 가둘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서 책임 능력 문제가 검토 대상이 된 근래의 형사 사건 네 가지를 더 들겠다. 이 사건들은 차스트로 사건을 곁눈으로 비추어 보게 해 준다.

(사례 12) 테로르(가명)는 디오닝으로,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아무 동기 없이 장전한 소형 권총을 어느 순경의 가슴에 대고 쏘아 살인 미수를 저질렀다. 그 행위는 사나운 분노 폭발의 성격을 띠었다. 그는 7년 전에 잠시 정신병자로 요양원에 있었으나, 그 뒤로는 아무도 그를 정신병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를 진찰한 카스퍼 자신이 이렇게 밝혔다. “그의 생각은 논리적이고, 이해는 명료하며, 대답은 일관된다. 그는 혐의를 능란하게 물리칠 줄 안다.” 예심 판사는 그를 완전히 책임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카스퍼 자신도 첫 진찰에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카스퍼의 새 감정은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이었다. 그사이에 그가 손수 쓴 몇 장에 걸친 긴 운문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극비에 부쳐 두었는데, 지체 높은 부인들에게 바친 것으로, “더없이 조잡한 헛소리와 더없이 더럽고 역겨운 외설”로 가득 차 있었다. “분통 터지게 관능적이고 천박한 문체의 미친 시, 정신병 든 머리의 토로”였다.(카스퍼, 『편람』 제1권, 1864, 사례 184.) 그러니 여기서도, 섞인 방식은 다르지만, 정신 장애와 사납게 상처를 입히려는 충동과 성적 관능이 함께 있다.

(사례 13) 기계공 포크트는 한 저녁에 여러 번 여자들에게 강간 행위를 저질렀다. A의 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목을 졸랐고, B의 목을 손으로 조르려 했으며, C의 목구멍을 손으로 눌렀는데, 그때 C의 왼손을 할퀴어 피를 내면서 내뱉었다. “빌어먹을 개 같은 년, 소리 한 번만 더 내면 고양이처럼 목 졸라 죽여 버린다.” 샤리테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그가 사방을 할퀴고 물어뜯어서 묶어 두어야 했다. 카스퍼는 말한다. “그가 그런 흥분 속에서 노골적인 살해 협박을 내뱉고, 심지어 그것을 실행하려는 행동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성적 흥분은 더욱더 병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감정은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포크트는 그 뒤 때때로 밤에 속옷 바람으로 계단을 두 층 내려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더 나중에는 인형과 헝겊 조각을 가지고 놀았다.(『임상 단편집』 267~271쪽.)

(사례 14) 슐레지엔의 시골 귀족 아가씨 울리케 폰 라이니켄도르프(가명)의 정신 건강을 두고 1858년 의사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러나 극도로 신중한 카스퍼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판정했다. 한편으로는 어느 중위에게, 그리고 차례로 부모의 하인 세 명에게 기묘하게 반했다는 점 때문이었고(그녀는 언젠가 밤에 남장을 하고 몰래 중위를 찾아갔다. 군대에 징집된 하인 율리우스와 알베르트와 헤어졌을 때는 “미친 여자처럼”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 일기의 괴상한 내용 때문이었다. 일기는 “메모와 문구의 어지럽고 거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몇 대목을 예로 든다. 1847년 율리우스와 헤어진 뒤(여러 날에 걸쳐 적은 것): “왜 내 입이 이렇게 부르텄을까? 새끼 고양이는 아는 것 같다. 내일 군대가 지나간다. 그러면 나도 따라가련다. 그러니까 너는 군인이 되고 싶은 거지? … 그는 내가 웃는 것을 보았다. … 너 얼굴이 참 창백하구나! 그러자 그는 얼굴이 빨개졌다. 나이트캡? 나는 달이 비치니까 함께 타고 간다. 그리고 북 밑에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 나는 오늘 카이저 프란츠 연대에 지원했다.” 그녀는 그를 “mes uniques amours, honneur et charme de ma vie”(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 내 삶의 명예이자 매력)라고 부른다. 1849년: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지는 해가 두 사람을, 서로 무척 사랑하는 두 사람을 비추는 것이 이 거울 속에 보인다. 거울 뒷면에는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사랑하는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그러나 그를 더는 보지 못했다.” 1855년: “내 가엾은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이었다.”(『임상 단편집』 사례 34, 음란광(Aidoiomanie).) 그러니 여기서도 우리는, 아마 오랫동안 억지로 억눌려 왔을 성적 사랑과 망상이 한데 얽혀 자란 것을 본다. 그런데 그것이 만성으로, 곧 넓고 길게 늘어진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면, 분명 급성으로, 곧 강렬하고 응축된 형태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 충동이 흥분하고 피의 도취가 깨어난 순간에는, 사드나 라발 드 레 같은 부류의 기질에게서도 틀림없이 “내 머릿속의 끔찍한 혼돈”을 짐작해도 될 것이다.

(사례 15) 1868년 다름슈타트 근처 뷔텔보른 마을에서 한 형사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이 사건을 드는 것은 차스트로 사건과 세 가지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a) 성 충동과 얽혀 자란 편집광(물론 이 점은 여기서 완전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b) 책임 능력 문제의 검토와 판단, c) – 새로운 점! – 대중이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편을 들고 법의들의 감정에 끼어든 것이다. – 그 마을에 재산 있는 양배추 농부 페터 루스티쿠스(가명)가 살았다. 그는 “무뚝뚝”하고 폐쇄적이라고 묘사되었고, “음흉하다”고 여겨졌으며, 개신교 경건파 광신자였다. 그는 우르닝이었으나 남색가는 아니었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우르닝들에게 흔한 방식으로, 곧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껴안는 방식으로 한 젊은 청년의 몸에서 사랑 충동을 채웠다. 그런데 그는 믿기 어려운, 물론 완전히 확인된 것 같지는 않은 욕망에 이끌렸다. 사랑의 쾌락을 누리려면 자기 연인이 nudato corpore(맨몸으로) 펼쳐 놓은 제단 책 위에 누워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제단 책(미사 경본, 성경 등)은 교회나 제의실에서 훔친 것이어야 했고, 그것도 한 번 쓰고 마는 것이어야 했다. 얼마나 기막힌 관념의 결합인가! 그는 이런 성경 절도를 무려 20건, 다른 소식으로는 32건이나 저질렀다고 유죄가 입증되었는데, 거의 모두 폭력적으로 침입해 저지른 것이었다. 체포되어 1868년 다름슈타트에서 배심 법원에 회부된 그는 무죄 방면되었다. “자연에 반하는 음행”은 증거 불충분으로, 교회 절도는 책임 능력 결여로 무죄였다. 그는 석방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교회에서 성경 따위를 여러 권 가져갔다는 혐의를 짙게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869년 1월 다시 체포되었으나 곧 다시 완전히 풀려났다. 그를 정신병원에 넘기는 것이 아마 더 옳았을 텐데도 말이다. – 배심 법원은 그가 자기 행위의 처벌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군(郡) 의사의 감정서에 근거했는데, 감정서는 그가 이전에도 저지른 여러 가지 “엉뚱한 짓”을 확인했다. 그의 도벽이 저 책들처럼 생활에 아무 쓸모없는 대상을 향한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전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기술되었다. 감정서는 이에 따라 “그러한 행위를 향한, 의지로는 억누를 수 없었던 불행한 성향”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대중은 이 감정서에 몹시 불만이었다. 무죄 방면은 악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이건 범죄 전반에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분노는 감정서의 결함이라고 내세운 것보다는, 남자를 사랑했던 자가 무죄 방면되어 생긴 실망을 향한 것이었으리라! Hinc illae irae!(그래서 저 분노가 나온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우르닝을 위해, 남색가를 위해서도 굽히지 않는 법을 더욱 소리 높여 요구한다. 나는 “민중”이 “‘피고인은 남색가다. 그러므로 sans phrase(군말 없이) 유죄!’”라는 평결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 여론의 거친 폭력 때문에 법이 굽혀진 일은 역사에서 처음이 아닐 것이다. 특히 폰 차스트로에 대해 베를린의 민중 여론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신문들이 보도한 대로 그의 감옥 앞에 모여든 폭도들이 보여 준다. 그들은 “수사를 마치면 정신병원에 보내려 한다는” 그를 민중의 손으로 가장 가까운 가로등 기둥에 매달겠다는 목적을 공공연히 내걸고 모였다. 또 베를린 언론도 그것을 보여 준다. 언론은 기왕의 맹목적 분노를 오늘날까지 억제하기보다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이니, 법이 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참으로 때에 맞을 것이다. 남색가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려고 목말라하는 폭도의 아우성 앞에서도, 법원이 침해할 수 없는 독립성으로 “그런 인간에 대해!” 뜻밖의 판결을 내린다면 “분개”할 이른바 교양 계층의 아우성 앞에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 위험은 눈앞에 있다!

그러니 테미스여,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여,
단단히 조심하라.
오늘 너의 화관이 위태로우리니!

폰 차스트로는 베를린에서는 편견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브란덴부르크의 배심 법원에 회부해 달라고 신청했다고 한다. 도덕적 정의에 비추어 근거 있는 신청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보고도, 베를린 배심원들이 법정 문턱을 넘을 때 저마다 그를 위해 이미 꼬아 둔 밧줄을 주머니에 넣고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판단하겠는가? 그러나 브란덴부르크로 간다 해도 그는 낙숫물을 피하다 장대비를 만나는 격일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법정의 배심석 절반을 피고인 개인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심리에 끌고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증을 주는 배심원들이 차지할 때, 곧 절반을 우르닝이 차지할 때에만 그에게 참된 정의가 주어진다. 근거 있는 요구는 어떤 “실행 불가능성”으로도 근거 없는 요구가 되지 않는다.

– 앞에서 말한, 법의의 감정으로 책임 무능력 판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 명에게서, 모두는 아니지만, 그들의 평온한 일상생활에서 보인 여러 가지 괴벽을 만난다. 그니저에게는 얼빠진 수다가, 루스티쿠스에게는 엉뚱한 짓이, 테로르에게는 더없이 조잡한 헛소리로 된 운문이, 울리케 폰 라이니켄도르프에게는 적어 놓은 메모와 문구의 어지럽고 거친 혼돈이 있었다. 예컨대 포크트에게는 없었고, 사드 후작에게도 없었다. 포크트의 경우 인형과 헝겊 조각을 가지고 노는 일은 감정 뒤에야 나타났다. 구스타프 폰 코린스키 백작의 경우에도 괴벽은 몇몇 의사가 그를 이미 부분적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선언한 뮌헨 공판에서 꽤 오래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사드의 경우 광인 판정은 오로지 그의 피에 굶주린 잔혹성의 광기와 무목적성에 근거했고, 포크트의 경우는 살인욕과 얽힌 그의 조야하게 관능적인 행동 방식의 광기에 근거했다. 곧 독자적인 하나의 계기에 근거했던 것인데, 이 계기는 예컨대 루스티쿠스의 경우 그의 성경에 대한 욕망의 광기와 무목적성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떠오른다.

폰 차스트로 역시 오로지 그의 피에 굶주리고 사납고 잔혹한 행동 방식의 광기와 무목적성을 근거로 범행 당시 책임 무능력으로 판정해야 하지 않는가?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그와 아울러 폰 차스트로의 일상생활에서도 괴벽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를 아는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곧 오로지 나에게 이 글을 발표하지 말라고 말리려고 쓴 것이다). “파리, 1869년 3월 4일. … 책임 능력 문제는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제기될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이유에서 말입니다. 그를 아는 사람은, 아니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가 반쯤 실성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앞에서 든 사례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더 끌어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몇몇 개인에게는 병적 정서 장애가 가능한 것 같다.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든 잠깐 동안만 계속되는 것이든, 또 그와 아울러 본격적인 망상이 그들에게 있든 없든 마찬가지인데, 이 장애 속에서 개인은 억누를 수 없는 내적 충동에 의해 사나운 잔혹과 피의 갈망의 행위로 내몰린다.[다른 경우에 그렇게 내몰린다고 망상할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는 미친개에게 물린 사람이 처하는 저 소름 끼치는 병적 상태와 비슷한 것 같다. 특히 의식도, 물린 사람의 광견병이 터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장애 때문에 없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든 말든, 그것에서 나오는 행위에 대한 책임은, 물린 사람이 사방을 물어뜯는 데 대한 책임과 똑같은 정도로 배제되는 것 같다. 설령 그 개인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두 상태 모두에서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내적 자유는 똑같은 정도로 없어지는 것 같다.

한케와 코르니에게 저질러진 만행 가운데 깨물기와 막대기로 꿰뚫기는 완전히 무목적적인 잔혹 행위로, 특히 바로 이 살아 있는 몸에서 생식기를 잘라 낸 것은 성적 광란의 미친 짓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검토가 절실히 요구될 것이다.

폰 차스트로 역시 저 광란과 비슷한 정서 장애의 억누를 수 없는 내적 강제 아래 행동한 것이 아닌가?

이로써 내가 스스로 맡은 과제는 다 다루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었던 자료로 풀 수 있는 데까지 그것을 풀었다.

뷔르츠부르크,
1869년 2월, 3월, 4월.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부록

1. 차스트로 사건이 베를린 주민에게 준 인상은 압도적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관해 입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다. 민중의 말에는 벌써 새로운 표현 두 가지가 자리 잡았다. 하나는 “차스트로 같은 놈”인데, 곧 우르닝을 뜻하되 모든 우르닝이 악마 같은 피의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다른 하나는 “차스트리렌하다”(우르닝식으로 겁탈하다)이다.[7] 이를테면 “너를 차스트리렌해 주마”는 아예 병영 은어가 되었다고 한다. “차스트로 같은 놈들”에 대한 증오는 건전한 상식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져서, 벌써 디오닝들 자신에게까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카페나 연주회장에서 누구 귀에 대고 “저기 저 신사는 차스트로 같은 놈이야”라고 나지막이 속삭이기만 하면 몇 분 안에 소동이 일어나고, 지목당한 사람은 우르닝이든 디오닝이든 거기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프라이엔발데의 한 시 참사회원은 디오닝인데 기차로 도착했다. 아마 그에게 구걸했다가 퇴짜를 맞은 듯한 부랑자 하나가 그의 뒤에 대고 “저놈이 차스트로 같은 놈이다!” 하고 외치자, 몇 분 만에 베를린 폭도가 떼 지어 그를 둘러싸고 모욕했다. 달려온 경찰관들을 맞이한 것은 그사이에 군중의 창조적인 집단 상상력이 지어낸 완벽한 이야기 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 보호받았느냐고? 천만에! – “차스트로식” 습격의 혐의자로 일단 체포되었다! 그러자 베를린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제 인신의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아우성쳤다. 오! 오! 제 자신과 경찰을 속인 그 민중의 분노를 부추기는 데 그들 자신이 톡톡히 한몫하지 않았던가!

2. 베를린 경찰이 베를린에 사는 우르닝 2000명 넘게에 대해 비밀 명부와 계속 갱신하는 신상 기록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내가 베를린에 대해 든 수치(머리말 2)는 물론 너무 낮게 잡은 셈이다. 양쪽의 목적이 조금 다르지 않다면, 내가 나대로 암호로 적어 두는 신상 기록으로 저 명부를 여기저기 보충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내가 청할 유일한 사례는 작은 호기심 하나를 채워 주는 것이다. 저 명부가 이 기록만큼 높은 데까지 올라가 있느냐는 것이다.

3. 앞서 말한 아우크스부르크 사제는 53세의 주교좌성당 보좌 신부 막스 그리오트로,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의 전례 담당 사제다. 결국 그에 대해 수사가 개시되기는 했다. 물론 12~16세 아이들을 유혹한 일 때문이 아니라 – 그러려면 아버지의 고소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 공공장소에서 성적 행위를 하여 (과실로) 물의를 일으킨 일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과자점의 펀치 방이 당시 “공공장소”로 간주된 것이다.(“공공장소”와 단순 과실에 의한 물의 야기에 대해서는 『글라디우스 푸렌스』 28·29쪽 참조.) 1869년 5월 5일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지방 법원에서 8일간의 요새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감경 사유로 “펀치를 마셔서 생긴 흥분”이 인정되었다. 증인 다섯 명이 세부 사실을 입증했다. 과실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뮌헨의 《노이에스테 나흐리히텐》 1869년 4월 30일 자: “20년 전부터 소년들을 교육해 온 그리오트는 법정에서 자기의 교육 방법에 대해 해명하게 될 것이다!” 역시 자유주의 신문인 《아우크스부르거 안차이게블라트》 5월 6일 자는 가톨릭 성직자의 치욕스러운 유죄 판결을 고소해하며 이렇게 쓴다. “이런 위선자들은 언제나 가면이 벗겨지기를 바란다.” 이런 기사에는 “가면을 벗기다”라는 말이 주는 양념이 결코 빠지지 않으리라는 데 100 대 1로 내기를 걸어도 좋다! [덧붙여 말하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가 필요한 성숙하지 않은 소년들과의 성적 행위를 나는 결코, 결코! 가볍게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 바로 이 경우처럼 사소한 접촉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년의 순결은 모든 어른에게 성역이어야 한다. 유죄 판결은 부차적인 일이고, 그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 행위를 한 그를, 그리고 그를 그 행위로 몰아간 충동을 안타깝게 여긴다. 위의 신문들과 다른 신문들이 그토록 거리낌 없이 이름을 싣지 않았더라면, 변호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나는 밝히기를 삼갔을 것이다. – 우르닝은 마땅히 자기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4. 그 한가운데에 우르닝을 품고 있는 자유주의 정당들 가운데에는 1848~50년의 브레멘 민주파도 있었다. 유서 깊은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의 우르닝 요하네스 뢰징은 그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 반대편으로는, “가면이 벗겨져” 1868년 2월 11일 그곳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민덴의 저 경건파 상인도 이 대열에 든다. 『멤논』 109쪽.

5. 페트로니우스에게서도 이미 우르닝의 겁탈이 나온다.(앞의 베르가모 참조.) 아스킬토스가 젊은 기톤에게 칼을 뽑아 들고 외친다. “네가 루크레티아 노릇을 하겠다면, 내가 너의 타르퀴니우스가 되어 주마!”

6. 내가 『멤논』에서 가장 자세히 밝혀 놓은 나의 자연과학적 이론은 이러하다.

우르닝의 영혼의 성은 여성이다. 그것은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의 영혼)다. 다만 그 여성성은 바로 그 영혼이 속한 남자의 몸의 영향을 받아 몇몇 부분에서 남성과 비슷해져 있다. 영혼은 그 본질에서는 여성으로 남아 있으면서, 여기저기 이를테면 남성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가이겔 교수는 “불가능하다! 몸과 영혼은 함께 하나의 통일된 존재를 이룰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반박했다고 믿는다. 베를린의 철학자 프라우엔슈테트도 최근 그곳에 있는 내 통신원 한 사람에게 내 이론에 대해 본질적으로 똑같은 의견을 말로 밝혔다. 물론 그는 그로써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통일성에 맞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인간의 통일성으로 내 이론은 털끝만큼도 건드려지지 않는다. 통일된 인간의 어떤 구성 요소들은 길이 자로도, 제곱인치로도, 세제곱피트로도 잴 수 없고, 파운드와 로트로도 달 수 없다. 사고력, 기억력, 의지력, 결단하는 능력, 정념, 성향, 기질, 감정과 감각의 생활, 성적인 사랑의 동경과 성적인 관능의 욕구가 그렇다. 잴 수 없고 달 수 없기에 같은 종류인 이것들의 총체를 나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들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있지만, 이쪽과 저쪽에서 그 성질이 여러모로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특히 눈에 띄게 다른 것은 기질, 성향, 사랑 충동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 충동은, 특히 끌어당기는 대상(저쪽은 오직 여자, 이쪽은 오직 남자)과 관능적 욕구의 방식(저쪽은 능동적, 이쪽은 수동적)에서 정반대로 맞선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 영혼과 여자 영혼의 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르닝의 몸은 남성인 반면, 그의 영혼의 성은, 아무리 수수께끼처럼 보일지라도, 여자의 영혼의 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다. 다만 앞서 말한 영향에서 비롯한 차이, 예컨대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능적 욕구에서 벗어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을 나는 사실의 현실 세계에서 남김없이 입증했다고 믿는다(일부는 이미 『인클루사』와 『포르마트릭스』에서). 이 논증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우르닝에게서는 남성의 몸과 여성의 영혼이[우르닝긴에게서는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과 남성의 영혼이] 하나의 통일된 인간으로 떼어 놓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우르닝[과 우르닝긴]의 본질은 개인의 통일성 안에서의 성적 이원론,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의 자웅동체성이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있는 이상,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반론은 속 빈 호두만큼의 값어치밖에 없다. – 게다가 실재하는 이 사실은 모든 태아가 갖추고 있는 저 싹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멤논』 제3~12절, 제73~80절.

7. 베를린 《뵈르젠차이퉁》 1869년 2월 20일 자는 이렇게 쓴다. “… 울리히스가 아주 끈질기게, 특히 법률가 대회에서도 주장해 온 요구, 곧 우리 프로이센 형법 제143조를 삭제하라는 요구가 북독일 연방 형법 초안의 기초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 제143조에 해당하는 규정은 초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뵈르젠차이퉁》 3월 5일 자에는 내가 서명한 성명이 실려 있다. “… 저 기초자들이 우르닝의 성애(성인들 사이의)를 앞으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라는 나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나에게 큰 만족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나의 두 번째 요구가 채워진 것은 아니다. 곧 지금 성애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수많은 우르닝을 자유의 몸으로 돌려보내라는 요구다. 앞의 요구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 이 요구도 근거 있는 것이어야 한다.”

뷔르츠부르크, 1869년 5월.

K. H. 울리히스

알림

나에게 연락하고자 하는 분은 나에게 직접 (뷔르츠부르크로) 편지를 보내거나 출판사의 중개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서명 없는 편지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정당해 보이면 (지정해 주시는 우편 유치 주소로) 답장하겠습니다.

뷔르츠부르크, 1869년 5월 11일.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전 하노버 왕국 배석 판사

주석

  1. 「붉다」에 사회주의의 붉은빛과 부끄러워 낯붉힘을 함께 건 말장난이다. 라살레는 1864년에 죽었다. ↩
  2. 베르길리우스 『목가』 제2가에서 목자 코리돈이 애태우며 사랑하는 미소년. ↩
  3. 그리스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함께 콜키스를 달아나며 아버지의 추격을 늦추려고 동생 압시르토스를 토막 내어 흩뿌렸다. ↩
  4. 잠든 사람을 덮쳐 가슴을 짓누른다고 믿어진 몽마(夢魔). 이 책의 제목이다. ↩
  5. 사드 후작의 실제 이름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Donatien Alphonse François)다. 아래에 사드의 소설로 든 『동 부그르 이야기』는 오늘날 장샤를 제르베즈 드 라투슈의 작품으로 본다. ↩
  6. 앞의 III절에서 든 네 가지 요점 가운데 2(목적 없이 잔혹 행위를 하고 피를 보려는 갈망)를 가리킨다. 3은 성 충동과 얽힌 피의 갈망이다. ↩
  7. 원어 zastriren은 차스트로의 이름을 kastriren(거세하다)에 맞춘 말장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