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0월 18일 키이우 시두마 발코니에서 수천 명 앞에서 무장봉기를 호소했다. 이 연설로 그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98년 입당한 노볼셰비키. 혁명 직후 최초의 농업인민위원 대행과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곡물 독점, 무장 징발, 식량분견대 체제를 주도했다.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된 후 외교관으로 복귀, 1927년부터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을 맡아 리센코 학설을 초기 후원했다. 소련·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상세 이력 보기
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1917.12–1918.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1895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로, 10월 혁명 후 첫 식량인민위원을 지냈다. 소비에트 권력의 초기 식량 정책의 제도적 토대를 놓았고, 1920년대에는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 경로로 이론화한 대표적 농업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농업부인민위원과 국제농업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콘드라티예프를 후원했으나, '콘드라티예프주의' 분쇄 캠페인 속에서 정치적 공격을 받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937년 체포되어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 치는 목동에서 시작해 스스로 공부한 이 올드 볼셰비키는,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동시에 맡으며 집단화 직전까지 볼셰비키 농민정책의 얼굴이었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한 올드 볼셰비키로, 차르 치하에서 5년간 투옥과 유형을 겪었다. 1917년 보고로츠크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거쳐 내전기에는 식량인민위원부 차관으로 곡물 조달을 담당했고, 1923년부터 RSFSR 농업인민위원과 크레스틴테른 사무총장을 겸임하며 네프 시기 농업정책과 코민테른의 국제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중앙위 서기와 오르그뷰로 위원으로 승진해 당 지도부 핵심에 올랐으나, '스미르노프-에이스몬트-톨마초프' 반대파 그룹에 연루되어 1934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64년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며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리센코 동지를 더러운 중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농학자·육종학자로, 목화 품종 개량 연구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한 후 소비에트 농업과학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0년간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부총재로 재직하다가 1960년 말 흐루쇼프에 의해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농업 위기 속에서 물러나 VASKhNIL 총재로 복귀했다. 트로핌 리센코의 가장 충실한 동료 중 한 명으로, 1964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리센코 비판에 맞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리센코를 '위대한 과학자'로 옹호했다.
탐보프와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14년간 소련 곡물 조달을 총괄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농업 관료
흐루쇼프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탐보프 제1서기 졸로투힌을 두고 이렇게 조롱했다: "저 탐보프 서기 졸로투힌은 바지를 벗고 매를 맞아야 한다고 자꾸 우겼습니다. 이게 무슨 즐거움입니까!"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현장 농학자 출신으로, 전쟁 직후 탐보프주 당 기관에서 두각을 드러내 1955년부터 10년 넘게 제1서기로 탐보프를 이끌었다. 흐루쇼프 해임 직후인 1966년 크라스노다르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로 옮겨 소련 최대 곡창지대를 7년간 통치했고, 1973년 브레즈네프의 신임 속에 소련 조달장관으로 발탁되어 1987년까지 14년간 곡물·사료·제분을 포함한 식량조달 체계 전반을 관장했다. 이 시기는 소련이 대규모 곡물 수입국으로 전환된 때로, 국내 수매와 수입 물류를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무거운 자리였다. 197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5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으며, 22년간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낸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 지역 간부였다.
루돌프 누리예프의 망명 후 KGB가 그의 가족을 압박하자, 누리예프는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족을 내버려두시오, 그들이 무슨 반소비에트 분자란 말이오!” 그 후로 괴롭힘은 멈췄다.
바슈키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누리예프는 1957년부터 12년간 바슈키르 주당위 제1서기로 공화국을 이끌며 우파와 체르니콥스크를 통합하고 대규모 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69년 소련 조달장관으로 중앙에 진출한 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각료회의 부의장 겸 농공복합체위원회 의장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식량 정책의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25년간 중앙위원과 8회 연속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낸 그는 소수민족 간부가 연방 차원의 경제 관료로 자리 잡은 드문 사례였으며, 퇴임 후 회고록 『아울에서 크렘린까지』를 남겼다.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시베리아 튜멘주 출신의 빅토르 바클라노프는 1967년 열여덟 살에 우크라이나 콜호스 '기간트'의 기계화공이 되었고, 37년간 한 농장에서 일하며 노동영예훈장 3개 등급을 모두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다.
소련의 농업 노동자이자 국가·정치 인물로,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콜호스 '기간트'에서 기계화공으로 평생 일하며 전연방·공화국 차원의 수확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동영예훈장 3급(1975), 2급(1982), 1급(1987)을 차례로 받아 완전 수훈자가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콜호스 조합 대표로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에 선출되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