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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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1903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슈먀츠키에게 물었다. "전국 모든 군 단위 중심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나?" 소련 전역의 음향 영사기는 겨우 4~5백 대뿐이었다.
볼셰비키 철도노동자로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지휘했고,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극동공화국 총리,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거쳐 1930년부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하며 《차파예프》《치르크》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 고전을 만들어냈다. 크림 반도에 연간 200편 제작을 목표로 한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구상했으나 1938년 숙청으로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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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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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그론스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정의했다: "렘브란트, 루벤스, 레핀을 노동계급에 봉사하게 하는 것."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해 소비에트 문학 통제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저널리스트이자 당 관료였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2대 신문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지냈고, 1932년 5월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 문학예술의 공식 교의로 정착시켰다. 같은 해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아 고리키와 함께 문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노비 미르》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문단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8년 체포되어 16년간 수용소와 유형 생활을 견뎠고, 1954년 복권된 뒤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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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나는 어제 레오니트 일리치와 점심을 함께 했네.” — 라핀이 부하와 동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기 전에 건네던 상투적인 첫마디로, 이 말이 나온 뒤에는 브레즈네프와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 국가방송위원회(고스텔레라디오) 의장을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대 방송을 총괄한 언론 관료다. 레닌그라드 신문기자로 출발해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에서 훈련받았고,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오스트리아·중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거쳐 TASS 사장을 지냈다. 고스텔레라디오 의장 재임 동안 올림픽 텔레비전센터 건설과 위성 방송망 확충으로 기술적 기반을 크게 넓혔으나, 동시에 생방송을 철폐하고 유대계 예술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엄격한 이념 검열을 시행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적 신임을 등에 업고 당 선전부의 지시조차 거부할 만큼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인 1985년 12월 해임되었다.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21년간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서 중앙위 문화부장으로 소련의 문학·영화·미술·음악 검열을 총괄한 인물이다. 비쳅스크 교사 출신으로 중앙위 선전선동국,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거쳐 1965년 모스크바로 발령되어 정체기 문화 정통성의 문지기가 되었다. 공개 석상에 전혀 나서지 않아 '위대한 무언가'라는 별명을 얻었고, 보수적 작가·학계의 지원을 받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1973년 중앙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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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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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100루블을 가지지 말고, 아주베이처럼 결혼하라” — 1950년대 모스크바를 떠돌던 이 말은 그의 출세가 흐루쇼프의 사위라는 지위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웅변한다.
알렉세이 아주베이는 흐루쇼프 해빙기 소련 저널리즘의 얼굴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으로서 관료적 기관지를 생동감 있는 일간지로 탈바꿈시켰고 발행부수를 160만 부에서 600만 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959년 소련 언론인 연맹 창설을 주도했고, 1960년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1963년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금지된 시 「저승의 묘르킨」을 이즈베스티야에 과감히 게재한 판단은 그가 단순한 흐루쇼프의 사위 이상의 언론인임을 증명했다.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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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