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1991

경제 운영

재정, 은행, 대외경제를 통해 계획경제의 현금흐름과 거래 조건을 관리한 지도부.

지도부 타임라인

  1. 1922–1926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소콜니코프 재무인민위원 · 네프 화폐 안정
  2. 1938–1960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즈베레프 재무인민위원 · 재무장관
  3. 1960–1985 바실리 표도로비치 가르부조프 재무장관
  4. 1963–1986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알히모프 국가은행 총재
  5. 1988–1991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국가은행 총재
  6. 1988–1991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대외경제관계 장관

소속 인물

레오니트 보리소비치 크라신

Леонид Борисович Крас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70–1926 ○ 백혈병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브류하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Брюх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기근의 그림자에서 네프의 재정으로 이행을 이끈 인민위원

1930년 4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브류하노프에게 쪽지를 보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해 브류하노프의 알을 묶어 매달아라. 만약 알이 버티면 법정에서 무죄로 간주하고, 버티지 못하면 강에 빠뜨려라." 옆자리의 메줄라우크는 매달린 브류하노프의 그림을 덧붙였다. 둘 다 1938년 총살된다.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차르 체제에서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으며 우파, 볼로그다, 우랄에서 지하 당 활동을 이어갔다. 내전 뒤 추루파의 후임으로 식량인민위원(1921–1924)이 되어 기근 이후의 식량 조달 체계를 재편했고, 1926년 소콜니코프의 뒤를 이어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취임해 네프 후기와 제1차 5개년계획 초기의 재정을 관장했다. 1930년 은화 부족 사태 속에서 니켈 합금 주화 도입을 주장했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사 해임되었고, 1938년 체포되어 9월 1일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899–1905학생운동으로 체포·제적, RSDLP 입당(1902), 카잔·볼로그다에서 지하 활동과 유형
  • 1906–1917우파에서 볼셰비키 신문 편집, V차 당대회 대의원, 우랄 지역위원, 반복적 체포와 행정구금
  • 1917–1921우파현 식량위원, RSFSR 식량부인민위원, 동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1–1924RSFSR 및 소련 식량인민위원, 붉은 군대 주식보급 총국장 겸임
  • 1924–1926소련 재무부인민위원, 소콜니코프의 네프 재정 안정화 보좌
  • 1926–1930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차 5개년계획 초기 재정·주화 정책 관장
  • 1930–1937모스크바주 부집행위원장·주계획위원장, 공급 부인민위원, 중앙수확량위원회 부의장 역임 후 1937년 연금
  • 19382월 3일 체포, 9월 1일 총살. 1956년 복권

모이세이 일리치 프룸킨

Моисей Ильич Фрумк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78–1938 ✕ 총살

'시골이 우리를 등졌다', 당에 직언한 재정 부인민위원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분트 가입, 이어 RSDLP 가입
  • 1909–1911모스크바 중앙노조사무국 의장
  • 1911–1917예니세이현 유형
  • 1918–1922식량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식량 부인민위원
  • 1922–1928대외무역 부인민위원
  • 1928–1929재정 부인민위원
  • 1928–1930'우편향' 참여자로 지목, 첫 공식 비판 대상
  • 1932–1935대외무역 부인민위원 (복귀)
  • 1935–1937소유즈플라스트마스 트레스트 관리자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경제 운영 소련 폴란드 1879–1937 ✕ 처형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0–1936 ✕ 자살

노동조합의 얼굴, 우편향의 세 번째 남자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 1922년 제11차 당대회,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확고한 지도자로, 정치국 내 유일한 진짜 노동자 출신이었다. 레닌 시대에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 의장과 정치국 위원을 지내며,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네프의 급진적 폐기에 맞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을 형성했으나 1929년 실각했고, 그 몰락은 독자적 노조 운동의 종말을 상징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 1929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аснощёко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80–1937 ✕ 처형 · 1956년 복권

극동공화국을 설계한 실용주의 볼셰비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 1923도브롤료트(Добролёт) 초대 이사회 의장
  • 1924–1925부패 혐의로 체포·6년형 선고, 이듬해 사면
  • 1926–1937농업인민위원회 신규인피작물 총국장, 섬유작물 연구소장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2–1938 ✕ 처형 · 대숙청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볼셰비키에 합류, 보로네시 당 위원회 군사조직 책임자
  • 1906–1908모스크바 당 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 지도
  • 1909–1914모스크바 시청 엔지니어, 도시 가스망 책임자
  • 1917고멜 소비에트 군사부문 의장, 시 두마 의장, 11월 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21VSNKh 화학공업 부문 위원, 우랄·북부 화학산업 국유화 전권대표
  • 1919–1925군수공업회의(국방공업 총국) 의장
  • 1921–1925VSNKh 의장 겸 RSFSR 인민위원회 위원, 주요 양허위원회 의장
  • 1926–1929북카프카스 지역집행위원회 의장
  • 1930–1934암토르그(소련 대미 무역회사) 사장
  • 1935–1937RSFSR 지방공업 제1부인민위원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야코블레바

Варвара Николаевна Яковлева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체카에서 좌익 반대파로 간 재정 인민위원

죄수열차 안에서 발렌티나 폴랴코바가 추궁했다. 「당신의 거짓 증언으로 내 남편이 총살당했다.」 야코블레바가 답했다. 「예조프의 명령이었다. 15일 밤낮 잠을 못 자게 하더니 결국 서명했다.」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체카를 이끌었던 옛 볼셰비키이자, 1924~26년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을 지낸 뒤 1937년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오룔 감옥의 집단 처형에서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6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29–1937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
  • 1937–1941체포, 수감과 오룔 감옥 처형

아론 리보비치 셰인만

Арон Львович Шейнма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5–1944 ○ 망명 중 자연사

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경제 운영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숙청 처형 · 복권 1957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영국 언론인 아서 랜섬이 1919년 슈미트의 인민위원부를 방문했을 때의 인상: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극도로 깨끗하고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독일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운동 조직가였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맡았고,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지원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소비에트 노동인민위원으로 재임하며 전시공산주의부터 네프까지 소련 노동 정책의 제도적 기틀을 수립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독립된 계급 조직에서 국가 기구로 편입시키는 국가화를 주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으나, 우익 편향에 가담했다가 곧 이탈하였고,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니콜라이 오신스키

Валериан Оболен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7–1938 ✕ 처형

최고경제회의(VSNKh)의 첫 의장, 브레스트 평화에 맞선 좌파 공산주의자

은행 금고 열쇠들을 특별한 섀미 가죽 주머니에 담아 스몰니로 가져와 레닌 앞 탁자 위에 엄숙히 쏟아냈다. 그러나 레닌은 우리의 첫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열쇠가 아니라 돈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경제학자이자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공산주의자 그룹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제도적 기초를 구축했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가까웠고 세계경제 위기론에 관한 실증적 저작을 남겼다. 대숙청기 처형 후 1957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5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경제 운영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스탈린의 대안으로 거론되었던 최고위 라트비아 볼셰비키, 법정에서 NKVD 조작을 고발하다

수사 방법은 피의자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거짓 자백을 꾸며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NKVD 기관 안에는 아직 도려내지 못한 곪은 상처가 있으며, 그곳에서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합니다.

라트비아 쿠를란트의 농업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 리가와 빈다바에서 지하운동을 이끌다 1909년 10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 1917년 석방 후 섬유노조 서기로 두각을 드러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과 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냈다.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의 강령을 지지하며 전연방적 위상을 얻었다. 1924년 교통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철도망을 재건했고, 1926년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31년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이 되어 당내 숙청의 도구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대숙청의 표적이 되었다. 1937년 5월 '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전면 부인하고 NKVD의 인위적 사건 조작을 법정에서 폭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레닌이 스탈린 대신 그를 총서기 후보로 검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모이세이 이오시포비치 칼마노비치

Моисей Иосифович Калманович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집단화 시기 국가은행을 이끈 혁명가 출신 금융행정가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18민스크 수비대장,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 서부지역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9–1920벨라루스·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 서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0–1923우크라이나 식량부인민위원, 시베리아 식량위원회 의장
  • 1923–1924러시아 SFSR 식량인민위원, 소련 식량부인민위원
  • 1924–1929사하로트레스트·프롬방크·제르노트레스트 이사, 노농감독부 간부
  • 1929–1930소련 농업부인민위원
  • 1930–1934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 신용개혁 주관
  • 1934–1937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

세묜 세묘노비치 로보프

Семён Семёнович Лоб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 총살

체카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고경제회의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산업행정가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로젠크란츠 공장 노동자
  • 1917–1918페트로그라드·비보르크 당위원, 공장위원장, 소비에트 대표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9–1920사라토프 체카 의장 → 바시키르 체카 의장 겸 내무인민위원
  • 1921–1923석유신디케이트 연료국장
  • 1923–1926북서공업국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6–1930ВСНХ РСФСР 의장 겸 글라브에네르고 책임자
  • 1930–1932소련 공급인민위원부 부위원
  • 1932–1936소련 임업인민위원
  • 1936–1937러시아 식품공업인민위원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소콜니코프

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Сокольни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8–1939 ✕ 옥중 살해

네프의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 소콜니코프는 1,300명의 대의원 앞에서 스탈린의 총서기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이 말을 연단에서 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 바자노프는 훗날 '그만이 감히 했다'고 기록했다.

볼셰비키 경제학자이자 재무인민위원. 여섯 개 언어에 능통한 당내 최고 지식인 중 하나로, 10월 혁명 직후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 백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붕괴된 화폐체계를 금태환 체르보네츠로 안정시켜 네프 경제의 화폐 기반을 마련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서명자이기도 한 그는 긴축·균형예산·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에 반대했고, 1926년 당 대회에서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실각 후 주영 대사를 거쳐 1936년 모스크바 재판 유죄 판결, 1939년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917볼셰비키 활동과 망명, 혁명기 당 실무에 참여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대표단에서 활동
  • 1920–1921투르케스탄 전선과 중앙아시아 소비에트화에 관여
  • 1922–1926재무인민위원, 체르보네츠와 네프 화폐 안정 추진
  • 1926–1936반대파와 연루되어 외교·경제직을 거쳐 점차 실각
  • 1936–1939모스크바 재판 뒤 수감, 수용소에서 살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밀류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лютин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 1889–1942 ○ 위암 · 자연사

나르콤핀 건물을 발주하고 선형도시 『소츠고로드』를 쓴 RSFSR 재무인민위원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볼셰비키에 가입
  • 1912–1916사무직원노조 이사 · 푸틸로프 공장 병원기금 관리
  • 19172월 혁명 · 7월 봉기 · 겨울궁전 습격 참여
  • 1921–1924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 1924–1929RSFSR 재무인민위원
  • 1929–1930RSFSR 소인민위원회 의장
  • 1931–1934RSFSR 교육 부인민위원 ·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 편집장
  • 1939–1941소비에트 궁전 건설 예술감독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경제 운영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예피모비치 마랴신

Лев Ефимович Марьяс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스탈린이 '우리의 붉은 은행가'라 부르고서 일주일 만에 내친 고스방크 총재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18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
  • 1918–1920전러시아 총참모부 프세보부치 부서장
  • 1920–1921보로네시 시당위원장, 오룔 현당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23투르케스탄 ASSR 중앙경제회의 의장
  • 1923–1924최고경제회의(ВСНХ) 중앙경제관리국 무역·금융정책 부장
  •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정보통계부장, 중앙위원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
  • 1928–1930적색교수양성소 수학
  • 1934–1936국가은행 총재, 재정부인민위원, 노동국방평의회 위원

야코프 일리치 골레프

Яков Ильич Гол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94–1960 ○ 자연사

전후 재건기에 고스방크를 이끈 재정 기술관료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붉은 군대 복무
  •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 1937–1939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부 계획부 부장 · 재정 담당
  • 1939–1940소련 농업은행 총재
  • 1940–1941소련 재무 부인민위원
  • 1941–1945소련 재무 제1부인민위원
  • 1945–1948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
  • 1948–1952소련 재무부 차관 겸 농업은행 총재
  • 1953–1959소련 농업은행 총재

폴리나 세묘노브나 젬추지나

Полина Семёновна Жемчужина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장관: 크렘린 권력과 유대인 정체성 사이에서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볼셰비키 입당, 붉은군대 정치장교
  • 1930–32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
  • 1932–36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
  • 1937–39식품공업 부인민위원
  • 1939수산공업 인민위원 — 최초 여성 산업장관
  • 1939–48경공업부 방직·잡화 본부장
  • 1942–48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활동
  • 1949–53체포·출당·쿠스타나이 유배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카바노프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Каб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러시아SFSR 공공주택인민위원 → 러시아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8–1939소련 식품공업인민위원 (수개월 만에 강등)
  • 1940–1941'디나모'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모스크바)
  • 1941–1951소련 전기공업인민위원 → 전기공업장관 (1946년 개칭)
  • 1951–1953국가물자기술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제1부의장 → 의장
  • 1953소련 국내·대외무역부 제1차관
  • 1953–195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대외경제활동위원회 부의장 — 소련 장관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즈베레프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Звер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0–1969 ○ 자연사

전쟁과 전후 재정을 버틴 장기 재무장관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s–1930s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 스탈린기 재정관료로 부상
  • 1938–1941재무인민위원, 전쟁 전 재정동원 체계 정비
  • 1941–1945전쟁 재정, 국채, 배급경제의 재정 기반 관리
  • 1947전후 화폐개혁과 배급제 폐지 국면에 관여
  • 1950s–1960흐루쇼프와 재정 노선 충돌 뒤 퇴임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코발료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валё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 1901–1993 ○ 자연사

대군을 비밀리에 움직인 철도 장군, 귀걸이 하나로 실각하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1붉은 군대 정찰병, 보로네시 체카 대대 적군 병사
  • 1935군사수송대학 우등 졸업
  • 1937–1939서부철도 관리국장
  • 1939–1941교통인민위원부 중앙군사부장 · 위원회 위원
  • 1941–1944붉은 군대 군사수송국장 · 중앙군사수송국장
  • 1944–1948소비에트 연방 교통인민위원 · 교통장관
  • 1948–1950스탈린의 중공 대표 · 주중 소비에트 군사고문단장
  • 1951–1957소비에트 연방 석탄공업 차관
  • 1960–1969참모대학교 전략학과 선임강사
  • 1969–1985IMEMO 선임연구원 · 연구실장 · 수석연구원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바카예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Бака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2–1987 ○ 자연사

소련 상선대를 세계적 해운 강국으로 키운 16년 장관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1915베르댠스크 항만 공장 견습공
  • 1919–1920적군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1929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 수운학부 수학
  • 1929–1937중앙해운관리국 기사 → 항만중앙관리국장
  • 1937–1942군사수송아카데미·레닌그라드 수운대학 교원
  • 1943–1945국방위원회 전권대표, 무르만스크 항 연합군 화물 하역 총괄
  • 1945–1952해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해운부 차관
  • 1952–1953해운부 제1차관
  • 1953–1954해운·하운부 제1차관 → 각료회의 운수·통신국 부의장
  • 1954–1970소련 해운부 장관
  • 1970–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 연구소 연구원

바실리 표도로비치 포포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Поп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3–1964 ○ 자연사

전후 화폐개혁을 집행한 10년의 국가은행 총재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 1934–1937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 수료
  • 1937–1938타타르 자치공화국 재무부인민위원,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38–1940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소련 재무부인민위원 → 제1부인민위원
  • 1940–1948소련 국가통제부인민위원(후에 장관), 협동조합 총국장, 각료회의 무역·경공업국 부의장
  • 1948–1958소련 국가은행 총재 (1954년까지 재무차관 겸임)
  • 1958–1960국가은행 제1부총재로 강등, 1960년 6월 병으로 연금 퇴직

보리스 파블로비치 베셰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ещ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3–1981 ○ 자연사

29년간 소련 철도를 이끈 최장수 장관

1930년대 후반, 젊은 엔지니어의 열차 편성 시간 단축 제안을 검토한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적었다: '베셰프 동지의 재능과 연구 자질을 키워줘야겠다.'

철도 전문 엔지니어 출신 최초의 소련 철도장관으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28년 7개월간 재임하며 소련 장관 중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세웠다. 전후 복구를 진두지휘하여 1950년까지 철도 화물 회전율을 전쟁 전보다 45% 끌어올렸고, 이후 증기기관차에서 디젤·전기 견인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주도해 철도 수송 비용을 약 3분의 1 절감했다. 재임 기간 소련 철도 화물 회전율은 8배 증가했고 2만 3,500km의 신규 간선이 건설되었으며, 56개로 분산된 철도국을 26개 대간선으로 통합했다. 바이칼-아무르 간선(BAM)의 설계·측량 작업을 재개시키고 철도 전산화와 고속 운행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레닌그라드 철도운수기사 연구소 졸업, 모스크바 호브리노 역 선임기사
  • 1937–1940오르조니키제 철도국장
  • 1940–1941옥탸브리스카야 철도국장
  • 1941–1942교통인민위원부 특별전권대표, 레닌그라드 전선 군수수송 및 대피 총괄
  • 1942–1944쿠이비셰프 철도국장
  • 1944–1946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운수관리국장
  • 1946–1948교통부 제1차관
  • 1948–1977소련 교통부 장관 (28년 7개월)

레오니트 가톱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Гатов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3–1997 ○ 자연사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한 편집자

1949년 여름, 보즈네센스키의 『소련 전시경제』를 '중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이라 평했다는 이유로 당 중앙위 결정에 따라 《볼셰비키》 잡지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경제학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1957–1965)로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학문으로 정초했다. 1929년 곡물 시장 연구로 집단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민스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 (유대계)
  • 1924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8–1931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가격 부문 책임자, 제1·2차 5개년 계획 작성 참여
  • 1931–1936공산주의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비에트 무역 부문 주임
  • 1933–1937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무역회전·국민경제균형 부서장
  • 1939–1949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볼셰비키》 잡지 편집위원
  • 1949보즈네센스키 저서 호평으로 《볼셰비키》·고등당학교에서 해임
  • 1957–1965《보프로시 예코노미키》 주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정치경제학)
  • 1965–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71–1997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
  • 1997모스크바에서 사망, 바간코보 묘지에 안장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포스코노프

Алексей Андреевич Поско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4–1969 ○ 재임 중 자연사

코시긴 개혁기 고스방크를 이끈 바시키르 출신 재정 엘리트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 1966–1969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아키모비치 이시코프

Александр Акимович Иш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5–1988 ○ 자연사

소련 원양어선단의 설계자, '어류 마피아'로 퇴장하다

1978년 '어류 마피아' 사건으로 부하 리토프가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가 직접 개입했다. 이시코프는 그저 연금으로 보내졌다.

소련 수산업을 거의 40년간 이끈 정치인으로, 1940–1950년과 1954–1979년 수산장관을 지내며 소련 수산업 역사상 최장수 수장을 기록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련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전 해역을 누비는 원양 어선단을 구축했고 연간 어획량을 130만 톤에서 930만 톤으로 끌어올려 세계 최대 수산국이 되었다. 대형 냉동 트롤 어선(BMRT) 도입, 오케안(Okean) 전문 판매망, 수산업자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말년에 부하 블라디미르 리토프가 '어류 마피아' 스캔들로 처형됐지만 브레즈네프의 비호로 무사히 은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9아조프-흑해·볼가-카스피 국영어업트러스트 관리직
  • 1939–1940소련 수산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6소련 수산공업 인민위원 → 수산공업장관
  • 1946–1948소련 서부지역 수산공업장관
  • 1948–1950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0–1954수산공업 차관·유역관리국장
  • 1954–1957소련 수산공업장관
  • 1957–1965국가계획위원회 수산부문 책임자 (장관급)
  • 1965–1979소련 수산장관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코제브니코프

Евгений Фёдорович Кожевни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운송건설부를 창설해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이끈 초대 장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 1936–1940니켈스트로이·오르메디스트로이·유주랄탸시스트로이 주임기사 (남우랄)
  • 1941–1943유주랄탸시스트로이 트러스트 주임기사 → 관리자 — 방산공장 건설
  • 1943–1944주미 소련 정부구매위원회 전문위원
  • 1944–1945소련 건설인민위원부 특수건설총국장
  • 1945–1949국가계획위원회 건설산업 계획국장 → 국가계획위 부의장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연료·운수 담당 부의장 보좌관 → 각료회의 건설부장
  • 1954소련 건설부 제1차관
  • 1954–1963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초대)
  • 1963–1965소련 국가운송건설생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재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그리슈마노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шм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6–1979 ○ 자연사

소련 건축자재 산업을 14년간 이끈 공사판 출신 장관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6–1949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공사감독·기사장·트러스트 관리자
  • 1944–1949프스코프스트로이 등 전후 복구 트러스트 책임자
  • 1949–1955레닌그라드 키로프 구집행위원장 → 시집행위 제1부위원장
  • 1956–1961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61–1962고스스트로이 소련 의장
  • 1963–1965고스플란 산하 건설자재공업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79소련 건설자재공업 장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스트루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Стру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인 1906–1991 ○ 자연사

18년간 소비에트 상업을 총괄한 무역장관

“일은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과 경험이 생겨난다.”

소련의 국내 상업 유통 체계를 18년간 총괄한 무역장관이다. 도네츠크(스탈리노) 지역당 제1서기와 페름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내며 전후 재건과 공업화를 진두지휘했고,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무역부 장관으로서 브레즈네프 시기 소비재 유통 정책 전반을 관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부전선·북캅카스전선·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으로 복무하며 전시 보급 체계를 책임졌다. 1976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6~1961년과 1966~1986년 두 차례에 걸쳐 CPSU 중앙위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9–1941도네츠크주 소비자협동조합연합 회장
  • 1941스탈리노(도네츠크)주 집행위 부위원장
  • 1942–1943남부·북캅카스·제4우크라이나전선 군무역국장
  • 1944–1947스탈리노주 집행위원장
  • 1947–1953스탈리노주 당위원회 제1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 1954–1958페름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8–1962러시아SFSR 각료회의 부의장 (무역 담당)
  • 1962–1965소련 국가무역위원회 의장
  • 1965–1983소련 무역장관

파벨 바실리예비치 코바노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Кован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7–1986 ○ 자연사

인민통제 초대 의장, 셸레핀의 대리인에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감사관으로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41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인민교육위원회 산하 교육학 실험실·연구소 소장
  • 1941–1942러시아 인민교육위원회 초등·중등학교 관리국장
  • 1942–1944칼리닌 전선·북카프카스 전선·제2우크라이나 전선 종군기자
  • 1944–1956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지도원, 부문장, 부부장으로 승진
  • 1956–196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62–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의장 (셸레핀의 보좌)
  • 1965–1971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71–1986연금 생활, 석유·가스 산업 건설부 산하 연구소 과학 고문

세묜 안드레예비치 스카치코프

Семён Андреевич Скач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7–1996 ○ 자연사

25년간 소련 대외경제원조를 총괄한 공업 관료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41하리코프 증기기관차 공장(제183호) 기술자·주임야금기사
  • 1941–1945우랄바곤자보드 당 조직자(파르토르크), 전차 생산 총괄 지원
  • 1945–1949레닌그라드 디젤 공장장 → 우랄바곤자보드 공장장
  • 1949–1954첼랴빈스크 트랙터 공장(ChTZ) 공장장
  • 1954–1957운수기계제조부 제1차관
  • 1957–1958하리코프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8–1983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1978년부터 장관급)

이반 바실리예비치 아르히포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Архип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7–1998 ○ 자연사

중소 경제협력의 얼굴, 4대 서기장을 보좌한 소련 경제 최고 실무자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29칼루가 철도 공장 선반공
  • 1938–1939크리보이로크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3전연방당 중앙위 간부국 비철금속부장
  • 1943–1950비철금속·금속공업 부인민위원·부장관
  • 1950–1958중국 주재 수석경제고문
  • 1958–1974대외경제관계 국가위 제1부의장
  • 1974–1980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6각료회의 제1부의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파톨리체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Патолич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8–1989 ○ 자연사

27년간 소련 대외무역을 지휘한, 열한 개 레닌 훈장의 보유자

1940년, 소련-핀란드 전쟁 실패 직후 소집된 중앙위원회 임시 전원회의에서 흐룰료프 장군이 31세의 파톌리체프를 스탈린에게 소개했다. 스탈린은 콤소몰 지휘를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 만남은 이후 말렌코프와의 대립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전시 탱코그라드를 조직하고 전후 벨라루스 공산당을 이끌었다. 1958년부터 27년간 대외무역장관으로 소련 석유·가스 수출과 서방 경제 데탕트를 지휘했으며, 11개 레닌 훈장의 유일한 보유자다.

상세 이력 보기
  • 1939–41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1942–46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탱코그라드' 조직
  • 1946–47볼셰비키당 중앙위 서기
  • 1950–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6–58외무부 차관 · 제1차관
  • 1958–85대외무역장관 — 27년간 소련 수출입 총괄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코로부슈킨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оровушк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09–1976 ○ 자연사

10:1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흐루쇼프에게 모자를 던진 은행가

흐루쇼프가 욕설을 퍼붓자, 코로부슈킨은 조용히 모자를 벗더니 땅에 침을 뱉고는 그것을 당 제1서기의 어깨를 향해 집어던졌다.

볼로그다 농민 가정 출신으로, 회계원과 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소련 금융계에 진입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53년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으며, 1959년 은행체계를 개편하고 1961년 10:1 디노미네이션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63년 현금 부족 해소를 위한 초과 발권을 놓고 흐루쇼프와 직접 충돌해 해임되었으나,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산업금융을 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 1936–1940레닌그라드 시·주 공동은행 관리자, 시 재정과장
  •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 1950–1955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 1953–1958소련 재무차관
  • 1958–1963국가은행 총재 — 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단행
  • 1963–1976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장(국가수입·산업금융), 콜레기움 위원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0–1999 ○ 자연사

소련 교육을 18년간 이끈 과학자-장관

1941년 10월 자원입대한 화학자 프로코피예프는 해군 소방국에서 적의 소이무기에 대응하는 화학방어 및 독가스 제독 교재를 직접 집필해 전선의 소방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모스크바대학에 천연화합물화학과를 창설하고 12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핵산화학의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1966년 신설된 연방 교육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1984년까지 18년간 소련 교육을 총괄한 국가행정가다. 그의 재임기는 전면 중등교육으로의 이행기로, 차별화된 과학교육 도입과 교육과정 개혁을 진두지휘했으며,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1948~1952)를 거쳐 고등·중등전문교육 차관으로 행정 경력을 쌓았고, 장관 퇴임 후에도 모스크바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며 소련 과학계와 교육계를 잇는 독특한 경력을 완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5모스크바대학 화학부 학사
  • 1937–1940모스크바대학 화학연구소 대학원, 화학후보학위 취득
  • 1940–1941모스크바대학 화학연구소 부소장
  • 1941–1946해군 소방국 복무, 적십자훈장·조국전쟁훈장 수훈
  • 1948–1952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
  • 1959–1966소련 고등·중등전문교육부 제1차관
  • 1966러시아공화국 교육장관 (5~12월)
  • 1966–1984소련 교육장관 (초대 연방 교육장관)
  • 1966–1999모스크바대학 천연화합물화학과 교수·주임

메포디 나우모비치 스베시니코프

Мефодий Наумович Свешнико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 1911–1981 ○ 자연사

농민 출신으로 소비에트 단일은행 체제 정점에 오른 경력 은행가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오른 직후 부하를 불러 말했다: "자, 그동안 자네를 충분히 굴렸으니, 이제 은행을 굴려 보세."

니주니노브고로드 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기업 부기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9년 은행에 들어가 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들의 수석회계사와 지배인을 거쳤다. 중앙기구로 발탁된 후 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과 고스방크 부총재를 역임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고, 1960년부터 대외무역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대외결제를 관장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올라 코시긴 개혁 후반기부터 브레주네프 체제 초기까지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으며, 재임기는 1965년 개혁의 신용 레버리지 실험이 퇴조하고 중앙집권적 재정 규율로 복귀한 전환기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1929기업 근태계원·부기계원
  • 1929–1930우랄 변경주 프세콤방크 부기계원
  • 1930–1937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 수석회계사·지배인
  • 1937–1939체르누신스키 구 콤소몰 서기
  • 1938–1939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화폐유통 부문장
  • 1940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
  • 1946고스방크 이사·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
  • 1948–1957고스방크 부총재
  • 1957–1960고스방크 이사·해외업무국장
  • 1960–1969대외무역은행 총재·고스방크 부총재
  • 1969–1976고스방크 총재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그리신

Иван Тимофеевич Гриш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1–1985 ○ 자연사

26년간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브레즈네프 시대 산업 수입 협상을 주도한 인물

볼가-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제1서기 그리신은 수감자 노동력으로 공사를 서두르라는 모스크바의 압박 속에서도 둑 높이를 둘러싼 기술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반 티모페예비치 그리신은 1911년 랴잔현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당에 입당한 후 콤소몰과 당 통제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2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전후에는 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5)로서 볼가-돈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로 외교 무대에 진출한 뒤, 1959년부터 사망하는 1985년까지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방 산업 설비와 기술 도입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6년간 차관직을 지키며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네 명의 지도부를 거친 그는 소련 대외경제 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한 관료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1ВКП(б) 입당
  • 1939–1940당 중앙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2노보시비르스크주 당 중앙통제위원회 전권대표
  • 1942–1945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
  • 1948–1949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49–1955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5–1960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9–1985소련 대외무역성 차관

바실리 표도로비치 가르부조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Гарбуз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1–1985 ○ 자연사

정체기의 장기 재무장관

25년간 소련 예산을 쥐고 흔든 그가 남긴 말: "예산이란 국가경제계획이라는 엉덩이에 난 뾰루지다. 불편해도 앉을 수는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공으로 일하다 하리코프 재정경제대학을 졸업했다. 키예프 재정경제대학 학장과 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소련 재무장관을 지냈다, 소련 역사상 최장 재임이다. 1965년 코시긴 경제개혁의 구상에 참여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보수적 예산 운용으로 재정 안정을 유지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s–1950s재정기관과 우크라이나 재정 행정에서 성장
  • 1960–1985재무장관, 정체기 예산·가격·국가재정 운용 담당
  • 1965코시긴 개혁 이후 기업 인센티브와 예산통제의 균형을 관리
  • 1970s군비와 사회지출이 커지는 구조 속에서 보수적 재정 지속성 유지
  • 1985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사망, 장기 재무행정의 시대가 끝남

보리스 키드리치

Boris Kidrič
경제 운영 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인 1912–1953 ○ 백혈병으로 사망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글루시코프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Глушк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8–1999 ○ 자연사

11년간 소련의 모든 가격을 관리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수석 가격 행정관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2화학임업 생산협동조합 회계사
  • 1936–1940소비자협동조합 체계 수석 회계사 → 주임 회계사
  • 1940–1944세베로니켈 콤비나트 수석 감사관, 노릴스크 콤비나트 부주임 회계사
  • 1944–1949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 주임 회계사 → 재무부장
  • 1949–1952예니세이스트로이 총국 재무부장
  • 1952–1957소련 비철금속부 광산관리국장
  • 1957–1963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부서장 → 재무경제관리국장 → 부의장
  • 1963–1965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 제1부의장
  • 1966–1973소련 비철금속부 계획경제총국장
  • 1973–1975소련 비철금속부 차관
  • 1975–1986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

티모페이 보리소비치 구젠코

Тимофей Борисович Гуженко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8–2008 ○ 자연사

원자력 쇄빙선대로 북극을 정복한 해운장관

1977년 8월 9일, 해운장관은 무르만스크 부두에서 아르크티카호에 직접 올랐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8일 뒤 인류 최초로 수상 선박이 북극점에 닿았다.

오룔 현의 농촌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전시 무르만스크 항에서 북극 호송선단 하역을 책임지며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사할린 해운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37세에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이 되었고, 1970년 해운장관에 올랐다. 16년 재임 동안 적자 부문이던 해운부를 80여 개 부처 중 외화 수입 5위의 핵심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레닌호 1척에 불과하던 원자력 쇄빙선대를 8척 체제로 확장했다. 1977년 직접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에 승선해 세계 최초로 수상 선박의 북극점 도달을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되었다. 1986년 여객선 아드미랄 나히모프호 침몰 참사로 경질되었으나, 그가 구축한 북극 항로와 쇄빙선대는 오늘날 러시아 북극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9무르만스크 항에서 교대 기사로 시작, 기계화 부서장·항만 주임기사로 승진하며 전시 북극 호송선단 하역 복구 책임
  • 1951–1955홀름스크 항만장 → 코르사코프 항만장 → 사할린 해운회사장,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
  • 1955–196037세,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으로 사할린 해운회사 경영 정상화
  • 1960–1962해운부 인사국장
  • 1962–1966CPSU 중앙위원회 교통·통신부 부장
  • 1966–1970해운부 제1차관
  • 1970–1986해운장관: 적자 부문을 외화 수입 5위로 전환, 원자력 쇄빙선대 1척→8척으로 확장, 연중 북극 항로 개설
  • 1977아르크티카호 북극점 원정 직접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 수훈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알히모프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Алхим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19–1993 ○ 자연사

국가은행을 오래 이끈 통화 관료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1950전연방 대외무역아카데미 수료, 영국 은행 연구로 경제학 박사 취득
  • 1950–1967대외무역부 산하 연구소·통화관리국에서 성장, 주미 무역고문 역임
  • 1967–1976대외무역부 차관, 소련의 대외결제 및 통화정책 조정
  • 1976–1986국가은행 총재, 계획경제의 결제·신용·발권 관리
  • 1986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과 가족 망명 여파 속 퇴임

보리스 파블로비치 부가예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угаев
경제 운영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에서 항공원수가 된 민간항공 수장

1961년 지중해 상공, 납치된 프랑스 전투기가 브레즈네프의 Il-18기에 발포했을 때 조종간을 잡은 부가예프는 급선회로 공격을 회피했다. 착륙 후 브레즈네프는 "네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로 발탁되어 1970년부터 17년간 민간항공부 장관을 지내며 아에로플로트를 제트기 중심의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1977년 항공원수로 진급하여 모든 병종을 통틀어 소련 최후의 원수 계급 보유자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3항공훈련대대 생도, 악튜빈스크 항공학교 교관
  • 1943–1947215항공대 조종사·편대장, 당파운동 중앙참모부 임무 수행
  • 1948–1957브누코보 공항 기장·교관 조종사, 아에로플로트 최초 장거리 노선 개척
  • 1957–1966제235특별항공대대장, 브레즈네프 전용기 조종사
  • 1966–1970민간항공부 차관, 제1차관
  • 1970–1987민간항공부 장관, 아에로플로트 제트화·세계적 확장 주도
  • 1987–1992국방부 감찰총감

보리스 이바노비치 아리스토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Аристо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인 1925–2018 ○ 자연사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2야로슬라블주 집단농장 회계사
  • 1942–1943야로슬라블주 보병학교 사관생도
  • 1943–1946공병여단 분대장 → 모스크바 공병대대 서기
  • 1947–1952레닌그라드 '스베틀라나' 공장 기술자 → 조립구역장
  • 1952–1963비보르크 구당 산업운수부 지도원 → 부장 → 레닌그라드 주당 산업운수부 차장
  • 1963–1969레닌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제1서기
  • 1969–1971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1–1978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1978–1983주폴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85소련 외무차관
  • 1985–198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88–1992주핀란드 소련·러시아연방 대사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샴신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амш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6–2009 ○ 자연사

소련 통신 인프라의 현대화를 이끈 엔지니어 출신 통신장관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1965년부터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에크란으로 1981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하고 전국 간선 케이블망을 확장했으며, 디지털 교환기 도입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소련 인구의 98%가 TV 1채널, 95%가 2채널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에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 1968소련 통신부 차관
  • 1976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80–1989소련 통신장관
  • 1992–1997모스크바 시외·국제전화(OJSC) 이사회 의장
  • 1997–2009로스텔레콤(Rostelecom) 이사회 의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코나레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онар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07 ○ 자연사

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Катуш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10 ○ 자연사

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0s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보리스 이바노비치 고스테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Гост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15 ○ 자연사

시장개혁을 거부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마지막 정통파 재무장관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1959신발 공장 기사, 경공업부, 칼리닌 소브나르호스 노동임금 부장
  • 1959–1966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경제위원회 부문 부장
  • 1966–1975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 제1부장
  • 1975–1982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장
  • 1982–1985당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장 → 경제부장
  • 1985.12–1989.6소련 재무장관
  • 1989–2002재정실무자 연수원 교수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카멘체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аменц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인 1928–2003 ○ 자연사

소련 수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기술관료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4모스크바강 선박회사 화부·선반공·기관사
  • 1950–1957무르만스크 트롤어선단 기술자·국장·공장 수석기사
  • 1957–1962무르만스크 국민경제회의 수산공업 총국장·부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수산위원회 부위원장·제1부위원장
  • 1965–1979소련 수산부 제1차관
  • 1979–1986소련 수산장관
  • 1986–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 1993–2003전러시아 수산기업협회 회장·러시아 산업가연맹 부회장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비류코바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Бирюкова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9–2008 ↓ 실각 1990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9제1모스크바 날염직물 공장 기술자, 직장, 작업반장
  • 1959–1963모스크바 시 소브나르호스 섬유·니트 산업관리국
  • 1963–1968트료흐고르나야 마누팍투라 면직 콤비나트 수석기사
  • 1968–1985전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평의회(VTsSPS) 서기
  • 1985–1986VTsSPS 부의장
  • 1986–1988CPSU 중앙위원회 서기 (경공업·소비재 담당)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각료회의 사회발전국 의장

스테판 알렉세예비치 샬라예프

Степан Алексеевич Шала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9–2022 ○ 자연사

소비에트 노동조합 체제의 마지막 지도자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 1963–1968임업·제지·목재가공 노동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 1968–1980VTsSPS 서기, 국가사회보험 예산 관장
  • 1980–1982소련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
  • 1982–1990VTsSPS 의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90자발적 사임, 연방급 개인연금자로 퇴임
  • 1991–2002노동조합 과학센터 소장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Геращенко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의 중앙은행가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60s–1970s소련 대외은행과 국제금융 부문에서 성장
  • 1980s브네슈토르그방크 등 대외금융기관을 거쳐 국가은행 지도부로 진입
  • 1988–1991국가은행 총재, 말기 소련 통화체계와 공화국 금융분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중앙은행에서 전환기 금융위기를 다룸
  • 1998 이후러시아 금융위기 뒤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경제 운영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으로 사망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경제 운영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로 사망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