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991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원자폭탄, 미사일, 우주개발을 움직인 과학자, 설계자, 비밀 행정가.

지도부 타임라인

  1. 1943–1960 이고리 바실리예비치 쿠르차토프 원자력 과학지도자
  2. 1945–1953 보리스 리보비치 반니코프 제1총국 · 원자력 행정
  3. 1957–1966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수석설계자 · 우주개발
  4. 1961–1975 므스티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켈디시 과학아카데미 총재 · 우주과학 조정
  5. 1965–1983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아파나시예프 일반기계공업 장관
  6. 1957–1986 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중형기계공업 장관 · 핵산업
  7. 1966–1991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소속 인물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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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베흐테레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Бехтер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57–1927 ○ 자연사

스탈린을 진단한 뇌과학의 선구자

1927년 12월 23일, 스탈린을 진찰하고 돌아온 베흐테레프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방금 한쪽 팔이 마비된 편집증 환자를 진찰했다.' 다음날 그는 사망했다.

반사학(객관심리학) 창시자이자 강직성 척추염을 발견한 신경학자. 1907년 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연구기관인 정신신경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27년 스탈린을 편집증으로 진단한 직후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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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의과대학 졸업, 정신과 클리닉 근무
  • 1881–1884의학박사 학위 취득; 라이프치히·파리·베를린 연수 (분트, 샤르코, 플렉시히)
  • 1885–1893카잔대학 정신과 교수, 정신생리학 실험실 설립
  • 1892강직성 척추염(베흐테레프병) 최초 기술
  • 1893–1913군사의과대학 신경·정신질환 학과장, 『신경학회보』 창간
  • 1907세계 최초의 종합적 인간과학 센터, 정신신경학연구소 설립
  • 1907–1910『객관심리학』 3권 출간, 반사학(레플렉솔로지) 창시
  • 1923레닌 주치의로 두 차례 신경학적 진찰
  • 1927러시아 공화국 공훈과학자 칭호; 스탈린 진단 직후 급사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베르나츠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Вернад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생물권과 지식권 개념으로 지구를 재발견한 생지화학의 창시자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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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1모스크바대학 광물학 교수
  • 1906–1917카데트당 중앙위원 · 국가평의회 의원
  • 1917임시정부 교육부 차관
  • 1918–1921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 1922–1939소련 라듐연구소 소장
  • 1927–1945생지화학연구소 소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릴로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ры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소련 조선과학의 아버지,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옮긴 수학자

손자 안드레이 카피차가 "왜 혁명 때 장군인 할아버지는 총살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크릴로프는 짧게 답했다. "장군도 장군 나름이란다."

제정 말기부터 소련까지 활동한 수학자·조선공학자. 마카로프 제독과 선박 불침몰성 이론을 정립했고, 1915년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완역했다. 혁명 후 조선과학 토대를 닦고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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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 소위·나침반부 근무, 자차 이론 첫 연구
  • 1888–1890니콜라옙스크 해군사관학교 조선학과 수료
  • 1890–1908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 교수, 조선에 수학을 최초로 체계 응용
  • 1900–1908해군성 실험수조장 — 조선 연구 기초 마련
  • 1908–1911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수석 조선감독관
  • 1911–1917해군장관 특별임무 담당 대장, 세바스토폴급 전함 설계
  • 1915뉴턴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러시아어 최초 완역
  • 1916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수리물리학)
  • 1919–1920해군대학장
  • 1928–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 1938–1941나침반 편차·자이로콤파스 이론 출판, 스탈린상 1급
  • 1943사회주의노동영웅 — 조선과학 평생 공로

블라디미르 레온티예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Леонтьевич Кома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69–1945 ○ 자연사

스탈린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식물학자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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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식물학 학위
  • 1895–1897극동·만주·한반도 북부 탐사
  • 1899–1931제국 식물원(후일 식물연구소) 연구원
  • 192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0–193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6–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41–1945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 동원 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닐로비치 부르덴코

Николай Нилович Бурд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876–1946 ○ 뇌졸중 사망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적군 주임외과의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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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 1923–1937모스크바 대학·제1모스크바 의학원 외과 교수, 외과 클리닉 원장, 신경외과 병동 개설
  • 1932세계 최초 중앙신경외과연구소 창설, 소장
  • 1937–1946적군 주임외과의, 소련-핀란드 전쟁·대조국전쟁 야전의료 지휘, 수천 건 수술, 페니실린 도입
  • 1944–1946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80–1960 ○ 자연사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뢴트겐이 뮌헨 교수직을 제안했을 때, 25세의 이오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정치가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오직 과학에서만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처한 지금 돌아가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다.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내고 반코스모폴리탄 공세로 해임, 스탈린 사후 반도체연구소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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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87–1943 ○ 옥사

세계 최대 종자은행을 세운 유전학자, 리센코의 반대자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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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사라토프 대학 교수, 식물면역 연구
  • 1920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 발견
  • 1920–1940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
  • 1926재배식물 기원중심지 이론 발표
  • 1929–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총재
  • 1930–1940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31–1940전연방지리학회 회장
  • 1935–1940VASKhNIL 부총재, 리센코 학설에 공개적 반대

비탈리 그리고리예비치 흘로핀

Вита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Хлоп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890–1950 ○ 사망 (60세)

라듐연구소를 이끌며 소련 핵물리학의 제도적 토대를 놓은 방사화학자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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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베르나츠키의 초청으로 과학아카데미 방사선연구소에서 연구 시작
  • 1921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 획득
  • 1922–1935라듐연구소 부소장 겸 화학부장
  • 1936–1950라듐연구소 소장
  • 1940과학아카데미 우라늄 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43, 1946, 1949스탈린상 3회 수상
  • 1945레닌그라드대학에 소련 최초의 방사화학 강좌 개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1–1951 ○ 심근경색

초기 원자력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물리학자-행정가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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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복무, 공병·기술 부대
  • 1918–1932모스크바대학·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 강사, 물리·생물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32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45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
  • 1934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 공동 발견
  • 1934–195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 1945–1951소련과학아카데미 총재,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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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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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게센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Гессе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3–1936 ✕ 처형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

1931년 런던, 게센은 연단에서 포프의 시를 인용했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프린키피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17세기 상업·산업·전쟁의 기술적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선언했고, 강당은 술렁였다.

소비에트 물리학자·과학사학자. 1931년 런던에서 뉴턴 역학이 17세기 기술·경제적 요구의 산물임을 논증, 과학사회학 외재주의 전통을 열었다.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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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에든버러대·페트로그라드대에서 물리학 수학, 폴리테크닉에서 경제학 병행
  • 1919–1921적군 복무, 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 근무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교원
  • 1924–1928붉은 교수직 연구소 수학, 졸업 후 강의
  • 1928《상대성이론의 기본 이념》 출간
  • 1931런던 국제과학사회의에서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 발표
  • 1931–1934MSU 물리학 교수, 물리학부 초대 학장, NIIF 소장
  • 193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35–1936FIAN 부소장, 《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대소비에트백과사전 편집위원

악셀 이바노비치 베르그

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핀란드 1893–1979 ○ 자연사

사이버네틱스를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에서 국가전략으로 되살린 소련 레이더의 아버지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의 통제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 1959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핀란드계 스웨덴인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제정 해군 장교에서 붉은 함대 잠수함 지휘관이 된 악셀 베르그는 소련에서 레이더 기술의 기초를 닦고 사이버네틱스를 국가 과학정책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과학자-행정가이다. 1937년 체포되어 NKVD 특별설계국에서 군 통신체계를 개발하다 1940년 석방되었으며, 독소전쟁 발발 후 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소련 최초의 조기경보 레이더 체계를 구축했다. 1953년 국방차관에 올라 군수 전자공학과 컴퓨터 센터를 주도했고, 1959년 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을 맡아 스탈린 시기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낙인찍혔던 사이버네틱스를 복권시키고 생체공학·구조언어학·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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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 1943–1944전기공업 부인민위원; 전연방 레이더 과학연구소 창설·초대 소장
  • 1943–1947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 (위원장: 말렌코프)
  • 1953–1957소련 국방차관
  • 1953–1955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연구소 초대 소장
  • 1959–1979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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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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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Пётр Леонидович Капиц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4–1984 ○ 자연사

베리야를 거부하고 초유동성을 발견한 노벨상 물리학자

지난 20년을 보면,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에 기초한 세계 기술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향들은 모두 해외에서 발전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확실한 인정을 받은 후에야 받아들였다. —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46년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케임브리지에서 러더퍼드 밑에서 연구했고 1934년 소련에 억류되었다. 1937년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발견, 베리야의 원자탄 프로젝트 지휘를 거부했다.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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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4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자기연구 부소장·몬드 연구소장
  • 1934–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 1943–1946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산소총국(글라프키슬로로드) 국장
  • 1945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 — 베리야의 지휘 방식을 거부하고 사임
  • 1946–1955해임 및 사실상의 가택연금 — 자택 실험실 '물리문제의 오두막'에서 연구 지속
  • 1955–1984물리문제연구소(IFP) 소장 (복권)
  • 1957–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파파닌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Папан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4–1986 ○ 자연사

유빙 위에서 북극을 기록한 소련 극지 탐험의 얼굴

「우리는 균열과 거대한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눈보라 속에서 유빙이 붕괴하면 탈출은 어려울 것이다…」 — 1938년 1월 29일, 파파닌의 일기.

세계 최초의 유빙 과학기지 '북극점-1'(1937–1938)을 이끈 소련의 극지 탐험가. 네 명의 연구원이 274일 동안 유빙 위에서 생활하며 북극 고위도 지역의 해양·기상 데이터를 수집한 이 원정은 유빙 표류 관측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했다. 오토 슈미트의 후임으로 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1939–1946)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북극 해운을 총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위원회 대표로서 북극 해상 수송을 지휘했다. 세바스토폴의 선원 가정에서 태어나 내전기 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영웅 칭호를 두 차례, 레닌 훈장을 아홉 차례 받았다. 전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을 35년간 맡으며 소련 해양학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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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러시아 제국 해군 징집
  • 1918–1920크림에서 붉은 파르티잔 활동, 내전 참전
  • 1920–1922크림 체카 사령관, 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 군사령관
  • 1923–1932통신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2–1933프란츠요제프 제도 티하야만 극지기지장
  • 1934–1935첼류스킨곶 극지기지장
  • 1937–1938세계 최초 유빙기지 '북극점-1' 대장
  • 1939–1946북극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북부 해상수송 전권대표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학연구소 부소장
  • 195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해양탐험부장
  • 1952–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내수생물학연구소장 (겸임)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

Игорь Евгеньевич Тамм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5–1971 ○ 루게릭병 · 사망

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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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세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мё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6–1986 ○ 자연사

소련 유일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연쇄반응 이론의 창시자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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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1LFTI 전자현상연구실장, 부소장
  • 1931–1986화학물리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1–1945연소·폭발 연구, 원자폭탄 계획 기여
  • 1944–1986모스크바대학교 화학반응속도론 강좌 주임
  • 1957–1971과학아카데미 화학부문 아카데미-서기
  • 1963–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76 ○ 자연사

미추린 농생물학으로 소비에트 생물학을 30년간 지배한 농학자

「당 중앙위원회가 나의 보고를 검토했고 승인했다」 —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폐막사에서. 이 한마디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민가정 출신 소비에트 농학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기술로 주목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소비에트 생물학계를 장악했다. 멘델유전학을 부르주아 사이비과학으로 공격하고 후천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승리로 소련 전역에서 고전유전학이 금지되었다. 감자 여름심기·기장 재배법 등 실용적 농업기술도 제안했다. 3개 스탈린상·8개 레닌 훈장·사회주의노동영웅(1945) 수상. 흐루쇼프 실각 후 1965년 해임, 197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당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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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간자 육종시험장 연구원, 추파처리(야로비자치야) 개발
  • 1929–1938오데사 전연방육종유전연구소(VSGI) 선임전문원 → 소장
  • 1938–1956, 1961–1962VASKhNIL 총재
  • 1940–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 소장
  • 19488월 VASKhNIL 총회 — 멘델유전학 '패배' 선언, 전국 금지
  • 1965–1975'고르키 레닌스키예' 실험기지 실험실장

이반 테렌티예비치 클레이묘노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Клеймё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899–1938 ✕ 총살, 1955년 복권

로켓 연구를 국가 기관으로 묶은 조직가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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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 1920–1921붉은군대 군수·보급 복무
  • 1928–1930공군과학연구소 공방장
  • 1930–1932베를린 소련 무역대표부 공학부 부책임자
  • 1932–1933기체역학연구소 소장
  • 1933–1937반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원장
  • 1937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 프로펠러·엔진 부문 부소장
  • 1938처형, 1955년 무혐의 복권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말렌코프가 과학아카데미 총재직을 제안하자, 네스메야노프는 채식주의 신념, 체포된 형제의 행방불명, 당원 자격을 이유로 사양하려 했다. 말렌코프는 모든 이유를 묵살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네스메야노프는 유기금속화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알려진 디아조법을 개발하고 원소유기화학이라는 새 학문 분야를 창시했다. 모스크바대학 총장(1948–1951) 시절 레닌 언덕의 상징적 캠퍼스 건설을 주도했고, 1951년 S. I. 바빌로프 사후 과학아카데미 총재가 되어 10년간 소련 기초과학의 방향을 총괄했다. 핵·우주 개발이 가속화되던 시기 연구기관 간 협력 체계를 정비했으며, 총재직 사임 후 인공식품 합성 연구에 전념해 블랙 캐비어 합성법을 확립했다. 생애 후반까지 학문 조직가로서 소련 과학제도의 중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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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돌레잘

Николай Антонович Доллежаль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체코 1899–2000 ○ 자연사

소련 원자로 설계의 총설계사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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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MVTU 졸업, 기계기사
  • 1930–1932프롬파르티야 사건으로 수감; OGPU OKB-8 부수석기사
  • 1933–1942볼셰비크 공장(키예프) 수석기사 · 우랄히마쉬 수석기사
  • 1943–1952NIIkhimmash 소장 (1946년부터 원자력 사업 참여)
  • 1952–1986NII-8 / NIKIET 소장
  • 1954오브닌스크 AM-1 원자로 수석설계자 (세계 최초 원전)
  • 1961–1986MVTU '원자력기계' 학과장

미하일 클라프디예비치 티혼라보프

Михаил Клавдиевич Тихонрав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0–1974 ○ 자연사

패킷 로켓으로 우주 가는 길을 연 이론적 개척자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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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 1956–1974OKB-1 제9설계국장,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 총괄
  • 1962–1974모스크바 항공대(MAI) 교수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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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예멜랴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Емелья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1–1988 ○ 자연사

전시 탱크 장갑에서 평화적 원자력 외교까지 이끈 핵행정가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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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조교·중앙기계제조기술연구소 연구실장
  • 1932–1934독일 에센·베를린 크루프 공장 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대표
  • 1935–1937첼랴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기술이사
  • 1937–1939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7총국장 (장갑강)
  • 1940–1946소련 인민위원회의 표준화위원회 부의장·의장
  • 1946–1953제1총국 과학기술부장·부국장 (원자력 프로젝트)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국장
  • 1955–1957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신기술 담당)
  • 1957–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 국장 · IAEA 소련 상임대표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부의장
  • 1966–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군축과학문제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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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2–1977 ○ 심근경색

신경심리학의 창시자,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이론을 임상신경과학과 연결한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그는 과학자를 '고전파'와 '낭만파'로 나누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 살아있는 현실의 풍요를 보존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이다.

비고츠키와 문화역사심리학을 창립하고, 뇌 손상 병사 치료로 신경심리학의 토대를 세웠다. 독특한 기억력을 지닌 인물들의 사례를 과학과 문학으로 엮어낸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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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카잔대학 졸업, 카잔 정신분석학회 설립
  • 1924–193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비고츠키·레온티예프와 '트로이카' 형성
  • 1931–1934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정신신경학아카데미 심리학 부문장, 중앙아시아 비교문화 원정
  • 1937제1모스크바의대 졸업, 교육학 박사 — 『인간 갈등의 본성』
  • 1941–1944키세가치 신경외과 후송병원장, 뇌 손상 병사 치료 및 재활 체계 구축
  • 1945–1966모스크바대학 교수, 부르덴코 신경외과연구소 연구원
  • 1966–1977모스크바대학 심리학부 신경·병리심리학 주임교수
  • 1967–1977소비에트 교육학아카데미 정회원,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이고리 바실리예비치 쿠르차토프

Игорь Васильевич Курчат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3–1960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의 과학 책임자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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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60원자력 과학지도자

세묜 아리예비치 코스베르크

Семён Ариевич Косберг

3단 로켓엔진으로 루나와 가가린을 우주로 밀어올린 OKB-154 수석설계자

1941년 겨울, 베르츠크의 텅 빈 엘리베이터 건물. 밤새 기초공사를 파던 지친 직원들 앞에 갑자기 오케스트라가 나타났다. 수석설계자의 목소리: "노래는 우리가 건설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네!"

슬루츠크의 유대인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야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했다. 전시에는 직접분사장치를 개발해 La-5·La-7 전투기에 독일기를 압도할 상승력과 기동성을 부여했고, 이 공로로 붉은별훈장과 조국전쟁훈장을 받았다. 전후 OKB-154(현 KБХА)를 보로네시로 옮겨 액체로켓엔진으로 전환했고, 1958년 코롤료프와 만난 지 9개월 만에 세계 최초로 우주공간에서 점화되는 3단 엔진 RD-0105를 완성해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했다. 이후 RD-0109로 가가린의 보스토크 상단을 추진했고,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전체의 상단 엔진을 공급하는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동력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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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직접분사장치 연구
  • 1940제33공장 OKB 부수석설계자, 직접분사 설계국장
  • 1941–46OKB-154(베르츠크) 수석설계자: ASh-82FN용 NV-3U 직접분사장치, La-5·La-7·Tu-2에 탑재
  • 1946–54OKB-154 보로네시 이전, 터보제트·터보프롭 연료장치 및 액체로켓엔진 전환
  • 1958–59RD-0105 개발(9개월): 루나 1·2·3호 3단 엔진, 세계 최초 우주 점화
  • 1960레닌상 수상, 기술과학 박사학위
  • 1961RD-0109: 보스토크 3단, 가가린 궤도 진입.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2–65소유즈·몰니야·프로톤 상단 엔진 개발 주도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лмого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3–1987 ○ 자연사

현대 확률론의 공리적 기초를 세운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증언했다: "30년 동안 나는 콜모고로프의 논문을 읽을 때면 이것이 내 생각이라고 느낀다.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로 그 내용이다."

1933년 『확률론의 기초개념』에서 측도론 기반 공리계를 제시해 확률론을 엄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소련 수학자다. 위상수학의 코호몰로지, 고전역학의 KAM 이론, 난류 이론, 알고리즘 복잡도, 힐베르트 제13문제 해결 등 수학 전 분야에서 근본적 성과를 남겼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1935년 확률론 학과를 창설해 30년간 이끌었고, 1939년 35세로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소련 수학 올림피아드 체계와 콜모고로프 기숙학교를 설계한 영재 교육의 설계자였으며, 1964~1985년 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확률론을 포격 통계에 적용해 모스크바 방어에 기여했고, 전후 중등 수학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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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87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35–1965모스크바 국립대학 확률론 학과장
  • 1939–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39–1942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64–1966, 1974–1985모스크바 수학 협회 회장
  • 1963–1987콜모고로프 기숙학교 (제18학교) 창립자

아나톨리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Анатолий Пет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3–1994 ○ 자연사

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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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즈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예르쇼바

Зинаида Васильевна Ершов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03–1995 ○ 자연사

소련 원자력 계획을 개척한 방사화학자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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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학생, 방사화학 연구
  • 1930–1937모스크바 희소원소 공장 방사늄 부문, 물리实验실장
  • 1936–1937파리 라듐연구소 연수, 이렌 졸리오퀴리 지도
  • 1938–1945기레드메트 라듐 연구실장, 우라늄 카바이드·금속 우라늄 생산
  • 1946–1948특수금속연구소 NII-9 제1방사화학연구실장
  • 1947–1954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생산 기술 연구, 스탈린상 수상
  • 1960년대–1989전러시아 무기재료연구소에서 폴로늄 화학과 동위원소 전원 연구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마흐뇨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Махн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04–1965 ○ 자연사

비밀 원자력 행정의 조직자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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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4노동자·농민 감독기관에서 근무
  • 1934–1940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지역 전권대표
  • 1940–1941소비에트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 1941–1945군수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GKO 위원 대리
  • 1945–1953소련 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위원·서기
  • 1953–1956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국장
  • 1956–1965원자력 이용 국가위원회 과학기술정보·전시국장

스테판 아파나시예비치 발레진

Степан Афанасьевич Балез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04–1982 ○ 자연사

카프타노프 밑에서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린 GKO 과학실 선임보좌관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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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초등학교 교사·고아원장, 비르스크 현 콤소몰 지도자
  • 1925–1932게르첸 사범대학 졸업, 적색교수대학원 이수, 카르포프 연구소 연구원
  • 1936–1938쿠이비셰프 의과대학 물리·콜로이드 화학 주임
  • 1938–1941레닌 사범대 화학과장, 고등교육위원회 대학부장
  • 1941–1943GKO 과학 전권위원 선임보좌관: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 1944–1948볼셰비키당 중앙위 간부국 대학·과학기관 부부장
  • 1948–1967레닌 사범대 일반·분석화학 주임, 금속 부식 억제제 연구실 창설
  • 1967–1982유네스코 인도 교육 개혁 고문, 『학교에서의 화학』 편집위원장

율리 보리소비치 하리톤

Юлий Борисович Харито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4–1996 ○ 자연사

46년간 소련 핵무기 설계국을 이끈 수석설계자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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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세묘노프 지도)
  • 1926–1928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수 (러더퍼드·채드윅)
  • 1931–1946화학물리연구소 폭발물 연구실장
  • 1939–1941젤도비치와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계산
  • 1946–1992KB-11(아르자마스-16)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
  • 1953–199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92–1996VNIIEF 명예 과학책임자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카프타노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Кафта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05–1978 ○ 자연사, 모스크바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스탈린에게 건의한 GKO 과학 전권위원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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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돈소다 공장 노동자, 콤소몰 조직원
  • 1931–1937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연구원·강사, 카르포프 연구소 당비서
  • 1937–1946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VKVSh) 의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
  • 1946–1951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3–1959소련 문화부 제1차관
  • 1959–1962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
  • 1962–1973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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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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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1961스푸트니크, 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뱌체슬라프 페트로비치 옐류틴

Вячеслав Петрович Елют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7–1993 ○ 자연사

31년간 소련 고등교육을 총괄한 최장수 각료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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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졸업, 동 대학원 진학
  • 1933–194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도센트,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부원장
  • 1941–1943레닌그라드 포병기술학교 수료 후 포병기술장교 복무
  • 1945–1951모스크바 제강연구소 소장(총장)
  • 1951–1954소련 고등교육부 제1차관
  • 1954–1959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9–1985소련 고등·중등전문교육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콘스탄틴 안토노비치 페트르자크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Петржа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폴란드 1907–1998 ○ 자연사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하고 소련 원자폭탄의 토대를 놓은 물리학자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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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8마로비셰르스키 유리공장 도자기·유리 화공
  • 1931–1936레닌그라드대학교 물리학부, 쿠르차토프 지도하 졸업
  • 1936–1941흘로핀 라듐연구소(RIAN) 대학원생, 쿠르차토프·흘로핀 지도
  • 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자발핵분열 공동 발견 (국가발견등록 제33호)
  • 1941–1942붉은 군대 복무, 중위; 카잔으로 소환되어 원자폭탄 계획 투입
  • 1947–1986RIAN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 창설 및 실장
  • 1949–1984렌소베트 기술원 핵물리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48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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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이사예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Иса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8–1971 ○ 자연사

소련 우주선의 심장을 만든 엔진 설계자: 폐쇄식 사이클의 발명가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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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금속공장 기술자
  • 1934–44볼호비티노프 설계국: 항공기 착륙장치, BI-1 로켓전투기 엔진
  • 1944–47OKB-2 수석설계자, 독일 로켓기술 조사단 참가(1945)
  • 1948–52니리-88 제9부: 진동방지 격벽, 평판 분사기, 폐쇄식 사이클(1949) 발명
  • 1951–55R-11(스커드) 엔진 S2.253;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8–61OKB-2 확대; 보스토크 TDU 제동엔진(104회 비행 성공)
  • 1962–71KTDU 계열: 소유스·살류트·미르·행성탐사선 엔진; N1-L3 달착륙선용 LOX/LH2 엔진
  • 1967–71KB KhimMash(舊 OKB-2) 수석설계자로 사망 시까지 재임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필류긴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Пилюг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8–1982 ○ 자연사

스푸트니크에서 부란까지: 소련 우주시대의 두뇌를 설계한 유도·항법 수석설계자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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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공대 졸업, 자이로 계측기 '지로그라프'로 졸업논문
  • 1935–43ЦАГИ·비행시험연구소에서 정밀기계공, 항공기 자이로 계측 설계
  • 1943기술과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4–46NII-1 로켓기술부; 독일에서 V-2 잔해 및 유도장치 연구
  • 1946–82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 수석설계자회의 정식 구성원
  • 1948–57R-1·R-2·R-5·R-7 유도제어계 — 스푸트니크1호·보스토크1호 발사
  • 1960s–70s프로톤, 달·금성·화성 탐사선, 부란 왕복선 유도제어계 총괄
  • 1954–82NII-885(후일 NPTs AP) 소장, 196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9–82모스크바 무선기술·전자·자동화대학(MIREA) 학과장
  • 1975사하로프 노벨평화상 비난 아카데미 성명 서명 — 72인 중 1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카마닌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Каман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08–1982 ○ 자연사

첼류스킨호 구조에서 가가린 선발까지, 우주비행사를 만든 공군장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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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보리소글렙스크 군사 조종사 학교 졸업, 극동 레닌 항공연대 배속
  • 1934첼류스킨호 구조: 혼성 항공분견대 지휘, 34명 구조, 소련영웅 №2
  • 1939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제19경폭격여단장
  • 1942–1943제292돌격항공사단장 (칼리닌 전선: 벨리키예루키·데먄스크)
  • 1943–1945제8혼성·제5돌격항공군단장, 쿠르스크·키예프·리비우·부다페스트·비엔나
  • 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73항공군 사령관 (중앙아시아)
  • 1960–1971공군 우주비행훈련 책임자, 유인궤도비행 군사총괄, 공군총사령관 우주보좌관

아르히프 미하일로비치 률카

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4 ○ 폐암

독일 엔진을 베끼지 않고 소련 제트추진 시대를 연 설계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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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 1957–81OKB-165 총설계자; AL-7, AL-21, AL-31F 엔진 시리즈
  • 1968–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가스터빈 위원회 의장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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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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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74–89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 소련 유인우주계획 총괄
  • 1988RD-170 엔진 탑재 에네르기야-부란 발사 성공

보리스 바실리예비치 페트롭스키

Борис Васильевич Петр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 1908–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아래 15년간 소련 보건을 이끈 심장혈관외과의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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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모스크바주 포돌스크 구역병원 외과의
  • 1932–1937모스크바 종양학연구소 연구원 (P.A. 게르첸 지도)
  • 1939–1945핀란드 전선 및 대조국전쟁 야전병원 선임 외과의
  • 1948–1956제2모스크바의대 일반외과학 교수; 크렘린병원 수석외과의 (1953–1965)
  • 1956–1965제1모스크바의대(세체노프) 병원외과학 주임
  • 1963–1988전연방외과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65–1980소련 보건장관
  • 1966–1981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코텔니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тельник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8–2005 ○ 자연사 (97세)

표본화 정리를 발견하고 금성 레이더 탐사를 이끈 과학자-국가원수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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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1MPEI 졸업, 통신연구소 엔지니어, MPEI 강사·연구실장
  • 1933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 발표
  • 1939–1942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 '소볼-P' 개발 주도
  • 1941–1944통신산업 개발자로 대전 지원
  • 1944–1980MPEI 정교수, 무선공학부 학장(1947–1953), OKB MPEI 소장(1948–1953)
  • 1954–1988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 연구소(IRE) 소장
  • 1970–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제1부총재)
  • 1973–1980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 (공화국 국가원수)
  • 1981–1992인테르코스모스 위원회 의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랴잔스키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Рязан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87 ○ 자연사

소련 우주로켓의 '라디오맨': 모든 로켓과 위성의 무선 시스템을 책임진 수석설계자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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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소련 최초 단파교신: 쇄빙선 크라신과 통신 성공
  • 1929–31니즈니노브고로드 무선연구소, 군용 무선국 개발
  • 1935–41오스테흐비우로: 무선조종 전차·항공기·어뢰정 개발
  • 1941–45페그마티트(P-2) 레이더 주임설계자 — 모스크바 방공, 스탈린상
  • 1946–54NII-885 수석설계자: R-1부터 R-7까지 탄도미사일 무선유도체계
  • 1957–65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달·금성·화성 탐사선 무선시스템, 레닌상
  • 1965–86NIIP(후일 RNII KP) 수석설계자 겸 과학지도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골류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Боголюб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92 ○ 자연사

동구권 최대 국제연구소를 이끈 이론물리학의 제도적 거인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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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키예프 대학 수리물리학 교수
  • 1947–1992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 이론물리부장
  • 1953–199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6–1965JINR 이론물리연구실장
  • 1966–1973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이론물리연구소장
  • 1966–1988JINR 소장
  • 1983–1988스테클로프 수학연구소장
  • 1966–1992모스크바 대학 양자통계 및 장이론 학과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바르민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Барм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카튜샤에서 부란까지: 모든 소련 로켓의 발사대를 설계한 엔지니어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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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모스크바공대 졸업, 냉동·압축기 전공
  • 1935–36미국 방문, 오르조니키제 후원으로 냉장 기술 시찰
  • 1940–45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 BM-13 카튜샤 발사대 개발
  • 1946–57GSKB 스페츠마시 수석설계자: R-1, R-2, R-5M, R-7 발사대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 발사 — R-7 발사대가 우주개발의 관문이 되다
  • 1960s–1970sR-12·R-14·R-9A·UR-100 사일로, 프로톤 발사대, 달·금성 토양채취기
  • 1970s–1988에네르기야-부란 발사대 및 달 기지 즈베즈다(바르민그라드) 프로젝트
  • 1959–1993바우만 공대 '발사 로켓 복합체' 학과 창설·주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쿠라쇼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раш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0–1965 ○ 자연사

WHO 총회 의장을 지낸 흐루쇼프기 보건장관

1962년 5월 24일, 제네바 프레니 구릉. 쿠라쇼프는 WHO 신청사 기공식에서 흙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세워질 건물은 모든 인류가 언젠가 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자 초점이 될 것입니다」

철도 전철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 31세에 카잔 의학원 원장을 맡았고, 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을 거쳐 1959년 소련 보건장관에 올랐다. 흐루쇼프 집권기 소비에트 보건의료 체계를 확장하고 의학교육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기 과학잡지 《즈도로비예》(건강)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62년 제네바에서 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WHO 본부 신축 기공식에서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재임기 소련은 WHO 두창 박멸 계획을 적극 후원했으며, 1959–1960년 모스크바 두창 유입 사태 당시 KGB와 협력한 신속한 봉쇄·접종 작전으로 질병 확산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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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카잔 의대 졸업, 정신과 전공
  • 1935–1941카잔 정신병원 주임의사, 타타르공화국 지역정신과장
  • 1941–1942카잔 의학원 원장
  • 1942–1953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
  • 1953–1955소련 보건차관
  • 1955–1959러시아공화국 보건장관
  • 1959–1965소련 보건장관
  • 1962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Фурс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10–1998 ○ 자연사

원자로 이론과 교육을 잇댄 핵 프로젝트 물리학자

“빠르게, 빈틈없이, 서두르지 않으면서 서둘렀다.”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는 이론물리학과 원자로 연구를 오가며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계산과 조직을 맡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두보프스키, 포브즈네르와 함께 F-1에서 플루토늄이 축적되는 양을 계산했고, 흑연과 우라늄의 선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A-1의 발진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과학적으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를 장기간 운영해 원자력 국가의 연구 인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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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조교·부교수
  • 1938–194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이론물리학과장 대행
  • 1941–1944붉은군대 정치장교·포병 배터리 commissar
  • 1944–1947제2연구소 이론 부문 선임연구원·부문장
  • 1947–1951콤비나트 817 A-1 원자로 과학 책임자
  • 1951–1954쿠르차토프의 우라늄·흑연 원자로 부책임자
  • 1954–198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 학장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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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미하일 쿠지미치 얀겔

Михаил Кузьмич Янгель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1–1971 ○ 자연사

저장성 추진제 로켓으로 전략로켓군의 척추를 만든 설계자

1960년 10월 24일, R-16 시험발사대에서 126명이 폭사한 네델린 참사 당시, 얀겔은 잠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목숨을 건졌다. 훗날 그는 '운명이 나를 살렸다'고 짧게 말했다.

이르쿠츠크 변경 유형수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대학 졸업 후 전투기 설계를 거쳐 1954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OKB-586(유즈노예)의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저장성 고비등 추진제를 채택한 R-12·R-14·R-16·R-3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차례로 완성해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구축했으며, 코스모스·치클론 발사체로 우주계획의 실용적 기반도 닦았다. 1960년 네델린 참사 당시 흡연실로 자리를 옮겨 생존했고, 1971년 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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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폴리카르포프 설계국 입사
  • 1937–44전투기 I-153, I-180, I-185 개발; 미코얀·먀시셰프 설계국 근무
  • 1946–48항공공업부에서 항공기 개발 조정
  • 1950–54NII-88에서 코롤료프 부하; R-5·R-7·R-11·R-12 초기 연구
  • 1954–71OKB-586(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저장성 추진제 로켓 개발
  • 1959/61R-12·R-14·R-16 배치,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 1960네델린 참사(R-16 폭발)에서 흡연실로 피해 생존
  • 197160세 생일 축하연 무대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

므스티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켈디시

Мсти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 Келдыш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라트비아 1911–1978 ○ 자연사

우주과학을 조정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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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75과학아카데미 총재 · 우주과학 조정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초프 (엔진 설계자)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1–1995 ○ 자연사

NK-12부터 NK-33까지: 소련 하늘과 우주를 움직인 엔진 총설계자

N-1 달로켓 계획이 취소된 뒤 쿠즈네초프는 NK-33 엔진 수십 기를 폐기 명령을 어기고 사마라 창고에 보관했다. 30년 후 미국 엔지니어들이 시험해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로켓 엔진'이라 평했다.

소련의 항공기·로켓 엔진 총설계자로, OKB-276을 이끌며 세계 항공사에 남을 터보프롭·터보팬·액체로켓 엔진을 개발했다. 그의 NK-12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강 터보프롭으로 Tu-95 전략폭격기와 An-22 수송기에 동력을 공급하며, NK-32는 Tu-160 초음속 전략폭격기의 심장이 되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소련 달로켓 N-1의 1단용 NK-33 엔진을 개발했으며, 폐쇄회로 방식을 채택한 이 고효율 엔진은 계획 취소 후 보존되었다가 1990년대 미국 안타레스 로켓에 사용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올랐고, 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1963–1990)으로 과학·산업 정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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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3모스크바 항공기술학교 야간부·제24공장 기계공
  • 1933–193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8–1942주콥스키 아카데미 교편·연구; 1941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42제6공군 제239전투기사단 선임기사 (전선 근무)
  • 1943–1949우파 제26항공공장 → 부수석설계자 → 수석설계자
  • 1949–1994OKB-276 (후일 쿠즈네초프 명명 SNTK) 수석설계자·총설계자, 쿠이비셰프/사마라
  • 1963–199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원
  • 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오니트 비탈리예비치 칸토로비치

Леонид Витальевич Канторович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2–1986 ○ 자연사

중앙계획을 수학으로 최적화하려 한 노벨상 수상자

1941년 12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속에서 칸토로비치는 라도가 호수 얼음 위를 직접 걸으며 얼음 두께와 기온에 따른 차량 간 최적 거리를 계산했다. '생명의 길'이었다.

소련 유일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75). 1939년 합판 공장의 배분 문제를 풀며 선형계획법의 기초를 정립했고, 최적해에서 도출되는 '해소 승수'가 계획경제 내 객관적 가격 신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22세에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1935년 무방어로 물리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그림자 가격 이론은 중앙계획 아래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나, 마르크스 노동가치론과 충돌하여 소련 경제관료에게 오래 배척당했다. 1960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수리경제연구소를 창설하며 계획경제의 수학적 합리화를 평생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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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레닌그라드 산업건설기술자 연구소 교수
  • 1934–1960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22세에 임용)
  • 1939–1948군사공학기술대학 수학 주임
  • 1948–1960레닌그라드 대학 수학·역학 연구소 부서장
  • 1960–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수리경제 부문 창설·지도
  • 1971–1976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국민경제운영연구소
  • 1976–1986전연방 시스템연구소 (ВНИИСИ)

보리스 옙세예비치 체르토크

Борис Евсеевич Черто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폴란드 1912–2011 ○ 자연사

스푸트니크의 두뇌를 설계하고 소련 우주사를 기록한 코롤료프의 대리인

1945년 5월 2일, 붉은군대 소령 보리스 체르토크는 베를린 함락 직후 독일의회 의사당 벽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평생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성취'라 불렀다. 석 달 뒤 그는 독일의 V-2 로켓 잔해 속에서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최측근 대리인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부터 스푸트니크·보스토크·소유스·미르까지 소련 우주 로켓의 유도제어 시스템을 50년간 설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61)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은퇴 후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4권을 펴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속내를 생생히 기록했으며 99세까지 집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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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38제22항공공장 전기기사, 항공기 특수장비·무장 설계
  • 1940–45볼호비티노프 설계국(OKB)에서 군용기 전기·무선 장비 담당
  • 1945–47독일 파견: V-2 유도제어 연구, 라베 연구소·노르트하우젠 연구소 근무
  • 1946–56NII-88 제어시스템 부서장 → 부수석 엔지니어,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6–74OKB-1 부수석 설계자: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제어계 설계
  • 1974–92NPO 에네르기야 부총설계자: 미르 정거장, 에네르기야 로켓 제어계
  • 1994–994권의 회고록 『로켓과 사람들』 출간, NASA 영역본 발행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플료로프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Флё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3–1990 ○ 자연사

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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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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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키릴린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ирилл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3–1999 ○ 자연사

과학기술혁명기 소련 민간 R&D의 총괄 설계자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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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54모스크바동력학원(MPEI) — 기술자, 대학원, 교수, 부원장
  • 1954–1955소련 고등교육부 차관
  • 1955–1962CPSU 중앙위원회 과학·고등교육·학교부장
  • 1963–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5–1980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80–1988과학아카데미 물리기술학·에너지학부 아카데미크-서기, 이후 상임간부회 고문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바바킨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Баба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4–1971 ○ 심장발작으로 급서

루나 9호·루노호트의 수석설계자, 달과 금성에 최초로 닿은 자동탐사선을 만든 사람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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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시 전화국 라디오 서비스 기술자
  • 1937전연방 통신기술학교 연구원
  • 1943자동화연구소(VSNITO) 레이더·유도체계 연구실장, 수석기술자
  • 1949NII-88 체르톡 부서 지대공미사일·유도체계 연구
  • 1952OKB-301(라보치킨) 순항미사일 부랴·V-300 대공미사일 개발
  • 1965OKB-301 / NPO 라보치킨 수석설계자 — 무인 달·행성 탐사선 총괄
  • 1966루나 9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 루나 10호 최초 달 인공위성
  • 1970루나 16호 로봇 표본 귀환, 루노호트 1호 월면 로버, 베네라 7호 금성 착륙
  • 1971마르스 2·3호 발사 — 8월 3일 심장발작으로 급서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

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авид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14–1983 ○ 자연사

열핵무기 2단계 구상의 선구자

1955년 젤도비치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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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산업대학, 학생
  • 1937–194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43–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제2연구소, 연구원
  • 1948–1952KB-11, 연구원·부서장
  • 1952–1963KB-11, 부문장·과학 부책임자
  • 1963–198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및 합동핵연구소, 연구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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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s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고르바초프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Pioneer 728기 폐기를 결정했을 때 나디라제는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Topol은 소련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러시아 핵전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루지야 고리 출신의 로켓 공학자. 모스크바 열기술연구소(MITT)에서 세계 최초의 고체연료 이동식 ICBM 전력을 창시해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했다. 그의 Topol은 INF 조약으로 Pioneer가 폐기된 뒤에도 살아남아 오늘날 러시아 핵억지력의 근간이며 Topol-M, RS-24 Yars로 계보가 이어진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1982)과 레닌상(1966)을 수훈했고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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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76MITT 소장 겸 수석설계자: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Pioneer-UTTH,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Яков Борисович Зельдович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벨라루스 1914–1987 ○ 자연사

스스로 배운 물리학자에서 소련 핵무기 이론가·우주론의 거인이 된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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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4화학물리연구소 실험조수, 레닌그라드 대학 청강
  • 1936이학준박사 취득 — 흡착이론
  • 1939이학박사 취득 — 질소산화열역학(Zeldovich mechanism)
  • 1939–1941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동역학 계산
  • 1943–1946쿠르차토프 원자폭탄 팀 합류, 모스크바 비밀연구소
  • 1946–1963아르자마스-16(KB-11) 이론부장 — 핵·열핵무기 계산 주도
  • 1958–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1987천체물리학·우주론 전념 — 모스크바대 교수, 슈테른베르크 천문연구소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튤린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юл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14–1990 ○ 자연사

테레시코바, 레오노프, 루노호트의 발사에 'Go'를 내린 사람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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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 1945–1946독일서 V-2 로켓 기술 회수팀 지휘 ('튤린 경영')
  • 1948–1955NII-4 탄도연구소장 → 과학담당 부소장 → 제1부소장
  • 1959–1961NII-88 (후일 TsNIIMash) 소장
  • 1961–1965국방기술국가위원회(GKOT) 부의장 → 제1부의장
  • 1965–1976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S. A. 아파나시예프 장관 아래)
  • 1974–1975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EPAS) 소련 측 조정위원회 의장
  • 1977–1990모스크바국립대학교 기계수학부 파동역학연구실 조직·지도

헬무트 그뢰트루프

Helmut Gröttrup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독일 독일 1916–1981 ○ 자연사

페네뮌데에서 고로도믈랴까지, R-7의 개념적 선조를 설계한 독일인 로켓 기술자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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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V-2 유도 제어 부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
  • 1945–1946뷰로 그뢰트루프 소장, 블라이헤로데 (소련 점령지구)
  • 1946노르트하우젠 연구소 독일 측 책임자, 이후 중앙공장 총책임자
  • 1946–1950NII-88 분소 1호 소장, 고로도믈랴 섬
  • 1954–1958연구원, SEL (슈투트가르트)
  • 1970–1980GAO 전무이사, 기제케 앤 데브리언트

이고리 세묘노비치 파나슈크

Игорь Семёнович Панасю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17–1972 ○ 병사

쿠르차토프의 가장 가까운 조수로 F-1을 관리했으나, 스승을 고발하고 밀려난 물리학자

"이 그래파이트 샘플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새끼 양을 대하듯 중성자를 잡아먹습니다": 첫 흑연 품질 측정 결과를 쿠르차토프에게 보고하며

이고리 파나슈크는 쿠르차토프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로,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 건설을 총괄 관리하고 1946년 12월 25일 임계 실험에서 제어반을 보조한 실험물리학자다. 1943년 제2연구소에 합류해 반응로 부문 부책임자로서 흑연과 우라늄 품질 검증부터 노심 조립까지 실무를 지휘했고, 1948년 첫 산업용 원자로 'A'의 기동에도 쿠르차토프 곁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 1954년 돌연 스승과 결별하고 주변부 연구직으로 밀려났는데, 쿠르차토프를 당에 고발한 것이 원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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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레닌그라드 공업대학 물리공학부 졸업, 쿠르차토프 지도 아래 디플로마
  • 1939–1943붉은군대 복무, 소련-핀란드 전쟁 및 대조국전쟁에서 야전병원 엑스선 기술자
  • 1943–1947제2연구소 제1섹터(반응로) 부책임자, F-1 건설 및 기동
  • 1947–1950제2연구소 제1섹터장, 산업용 원자로 'A' 과학책임자
  • 1950–1954F-1 원자로 시설 책임자, 삼중수소 생산로 AI-1 건설 참여
  • 1954–1972원자력연구소(IAE) 선임연구원, 주변부 연구직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바바힌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бабах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7–1984 ○ 자연사

소련 제2핵무기설계국의 과학지도자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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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5KB-11(아르자마스-16) 이론물리학자
  • 1955–1960NII-1011 부과학지도자·이론부문장
  • 1960–1984VNIITF(첼랴빈스크-70) 과학지도자
  • 1968–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바실리 파블로비치 미신

Василий Павлович Миш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러시아 러시아 1917–2001 ○ 자연사

코롤료프를 이어 소유즈·살류트·N-1을 책임진 실천적 우주설계자

1966년 1월 14일, 코롤료프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 크렘린은 미신에게 전화를 걸었고, 해질녘에는 그가 소련 우주계획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근교 이탄촌에서 태어나 ЦАГИ 견습공으로 출발했다. 1945년 독일에서 V-2를 조사하며 코롤료프를 만난 후 오랜 제1부수석설계자로 일했고, 1966년 코롤료프 사후 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소유즈 우주선, 살류트 우주정거장, 달로켓 N-1이 개발되었다. N-1은 네 차례 발사 모두 실패했고, 1974년 동료들의 서한으로 해임되면서 소련 달탐사 계획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항공대학에서 30년간 교수로 후학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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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35ЦАГИ 공장 견습공, 야간반 거쳐 МАИ 입학
  • 1941–45볼호비티노프 항공설계국: 첫 로켓전투기 БИ-1 무장 설계
  • 1945–46독일 파견, V-2 조사단에서 코롤료프와 평생의 동료가 됨
  • 1946–66OKB-1 제1부수석설계자: Р-1부터 Р-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까지
  • 1956Р-5 개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66–74OKB-1/ЦКБЭМ 수석설계자: 소유즈, 살류트, N-1 달로켓
  • 1974N-1 실패와 내부 서한으로 해임, 달탐사 계획 폐기
  • 1974–2001МАИ 교수·학과장, 교과서 《장거리유도탄탄도학》 등 저술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Керим Алиевич Керим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7–2003 ○ 자연사

오랫동안 이름이 숨겨진 유인우주비행 관리자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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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91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니콜라이 프로코피예비치 페도렌코

Николай Прокофьевич Федорен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7–2006 ○ 자연사

수학으로 계획경제를 재설계한 CEMI의 창립자이자 SOFE의 설계자

1960년대 말, CEMI는 소련 경제의 성장 둔화를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스플란 의장은 폴리트뷰로 송부를 거부했고, '이데올로기적 이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연구소는 네스쿠치니 정원에서 보고서를 모닥불에 태웠다.

소련 계획경제에 수학적 최적화 방법론을 제도화한 경제학자. 1963년 넴치노프의 추천으로 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22년간 이끌며,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경제의 최적 기능 체계(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1971–1986)로서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과학의 공식 의제로 격상시켰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프로그램-목표·부문별·지역 계획을 통합하는 방법론을 추진했다. 2차대전에 화학부대 장교로 참전해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았고, 1970년 화학공업 경제학 연구로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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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6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화학공업 경제학 강사·부교수·교수·학과장
  • 1953–1958모스크바 정밀화학기술대학(MITKhT) 부총장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3–1985중앙경제수학연구소(CEMI) 창립·초대 소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믹)
  • 1965–1988학술지 《경제학과 수리방법》 초대 편집장
  • 1967–1983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1971–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아카데믹-서기
  • 1987–2006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고문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키순코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исунько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8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작전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계한 소련 군사과학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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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 1953SKB-30 / KB-1 — 특수설계국장, 대미사일 방어 주제 착수
  • 1956시스템 A 수석설계자 — 세계 최초의 실험적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
  • 1958A-35 미사일 방어 체계 총설계자
  • 1961OKB-30 (후일 OKB 빔펠) — 초대 소장 겸 총설계자
  • 1970중앙과학생산연합 빔펠 — 과학담당 부총국장
  • 1975중앙무선전자시스템연구소 — 과학담당 제1부소장 (ABM 작업에서 배제됨)
  • 1979–1987국방부 제45중앙연구소 — 과학 고문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이론문제부 — 연구실장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크류코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рюк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8–2005 ○ 자연사

R-7의 패킷 구조를 설계한 코롤료프의 핵심 동료

1957년 8월 21일, 크류코프가 설계에 참여한 R-7이 마침내 예정 궤적을 완주했다.

세르게이 크류코프는 소련의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R-7의 전체 형상과 중앙 블록 주위에 네 개의 측면 블록을 배치하는 패킷 구조를 구체화한 인물이다. 코롤료프가 총괄 설계자였다면 크류코프는 프로젝트 부문과 설계 조직을 이끌며 구상을 실제 구조와 도면으로 묶었다. 그는 이후 라보치킨 설계국과 에네르기아에서도 자동 행성간 정거장과 우주 운반체 개발을 지휘했다. 이 경력은 우주개발이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전문화된 집단 설계와 생산 체계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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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40바흐치사라이 출생, 스탈린그라드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수학
  • 1940–1945바리카디 공장과 526번 공장에서 포병 생산을 감독
  • 1946–1947NIИ-88에서 근무, 독일 로켓 자료 조사와 귀환 수송을 담당
  • 1947–1956OKB-1 프로젝트 부문에서 선임 엔지니어와 부문 책임자로 승진
  • 1956–1961제3설계부장, R-7 주임 설계자, 사회주의노력영웅
  • 1961–1970OKB-1 부수석설계자, 이후 중앙설계국 부문장
  • 1970–1977라보치킨 설계국 수석설계자, 자동 행성간 정거장 개발 지휘
  • 1977–1996에네르기아 제1부총설계자와 과학 고문

보리스 예브게니예비치 파톤

Борис Евгеньевич Пато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8–2020 ○ 자연사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전기용접의 아버지

“과학은 내 삶의 본질이며, 아카데미는 내 직장이 아니라 나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보리스 파톤은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금속공학자로, 1962년부터 2020년까지 58년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전기용접의 선구자로서 1950년대 초 전기슬래그 용접을 개발해 무제한 두께의 금속 접합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소련 중공업과 조선업을 혁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리키의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에서 탱크 생산 증대에 기여했다. 우주 용접 기술을 주도해 우주비행사들이 궤도에서 용접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으며, 전기용접을 의학에 접목해 생체 조직 용접법을 개척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영웅, CPSU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체르노빌 원전의 키예프 인근 건설을 반대하며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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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 전기기사, 고리키
  • 1942–1953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연구원 → 부소장
  • 1953–2020파톤 전기용접연구소 소장
  • 1962–202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62–1989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연방회의 부의장 1966–1989)
  • 1966–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보리스 그리고리예비치 두봅스키

Борис Григорьевич Дуб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9–2008 ○ 자연사

F-1 첫 임계의 방사선 계측을 책임지고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를 세운 물리학자

1944년, 전선에서 세 번째 중상을 입고 제대한 두봅스키가 목발을 짚고 쿠르차토프를 찾아가자 쿠르차토프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하겠나?"라고 물었다. 한 달 뒤 그는 목발 없이 지팡이만 짚고 다시 나타나 제2연구소에 채용되었다.

하리코프 대학 출신의 소련 핵물리학자. 1944년 부상 제대 후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해 F-1 원자로 조립 중 방사선량 계측과 감마선 차폐 실험을 수행했으며, 중성자 계수기를 직접 제작하고 플루토늄 축적 계산을 맡았다. 1946년 12월 25일 임계 당시 통제실에 남은 소수 인원 중 하나였고, 이후 소련 원자로 방사선 안전 체계의 기초를 세웠으며 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1954)와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로들의 물리 기동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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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하리코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하리코프 물리기술연구소 근무
  • 1941–1943전선 복무, 보병대대장, 3회 부상으로 전역
  • 1944–1946제2연구소 F-1 원자로: 선량계측·감마선 차폐·중성자 계수기·플루토늄 축적 계산
  • 1947–1952방사선안전 그룹 책임자, 마야크(콤비나트 817호) 플루토늄 생산로 물리 기동
  • 1954오브닌스크 원자력발전소(세계 최초) 물리 기동, A.K. 크라신과 공동 지휘
  • 1958–1977물리·에너지연구소(오브닌스크) 핵안전연구실장
  • 1977–1986중형기계제조부 근무, 체르노빌 사고 후 설계 결함 공개 비판으로 퇴직
  • 1990년대국가두마 생태위원회 전문가, 방사성폐기물 안전법 초안 참여

드미트리 일리치 코즐로프

Дмитрий Ильич Коз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19–2009 ○ 노환으로 사망

R-7의 설계·양산·계열화를 모두 이끈 코롤료프의 오른팔

1944년 7월 비보르크 북방 전투에서 왼팔을 잃고 제대한 24세의 소위는, 13년 뒤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있었다.

코롤료프의 지명으로 R-7의 주임 설계자가 되어 '세묘르카'의 설계를 이끌었고, 쿠이비셰프(사마라)로 파견되어 항공공장에서 R-7 계열의 양산을 조직했다. 1974년 OKB-1에서 분리된 중앙특수설계국(TsSKB)을 창설해 초대 국장 겸 총설계자가 되었으며, 보스토크·몰니야·소유스 발사체와 정찰·과학 위성군을 개발했다. R-7의 설계·양산·계열화 모두에 걸친 그의 일생은 스푸트니크에서 오늘날의 소유스까지 이어지는 우주 수송의 척추를 세운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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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1NII-88 → OKB-1 설계기사
  • 1951–1958OKB-1 주임 설계자: R-5,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8–1961OKB-1 부수석설계자, 쿠이비셰프 제1공장 R-7 양산 책임
  • 1961–1966OKB-1 부수석설계자 겸 제3지부장·주임설계자
  • 1966–1974TsKBEM 제1부수석설계자, 쿠이비셰프 지부장 · 주임설계자
  • 1974–1983TsSKB 초대 국장 겸 주임설계자
  • 1983–1996TsSKB 국장 겸 총설계자
  • 1996–2003TsSKB-프로그레스 총책임자 겸 총설계자

니콜라이 겐나디예비치 바소프

Николай Геннадиевич Бас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2–2001 ○ 자연사

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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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올레그 겐리호비치 이바놉스키

Олег Генрих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22–2014 ○ 자연사

초기 우주선의 조립과 시험을 이끈 설계자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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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붉은군대 국경·기병부대 복무,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NI-88 기술자·선임기술자, 모스크바 동력공학대학 졸업
  • 1954–1957OKB-1 설계자, 초기 인공위성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 1호·2호 및 달 탐사선 설계 책임, 보스토크 수석설계자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군산문제 국가위원회 우주부문장
  • 1965–1983라보치킨 설계국 달·행성 부문 부총괄·총괄설계자
  • 1983–2014라보치킨 우주기술박물관장 및 과학고문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3–1982 ○ 병사

OGAS라는 전국 실시간 네트워크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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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로스토프 대학 졸업, 우랄 산림공과대학 교편
  • 1951–1955물리수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 힐베르트 제5문제 연구
  • 1956–1962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계산센터 소장 — MESM 실험실 계승
  • 1962–1982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창설 소장 겸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3–1982국가과학기술위 산하 전산기술·경제수학 도입 위원회 의장
  • 1966–1982키예프 대학 이론사이버네틱스 학과장, 사이버네틱스 학부 공동 창설
  • 1967–1982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키예프 분과 창설·지도
  • 1971–198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8~10대)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웃킨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Ут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3–2000 ○ 자연사

'사탄' 미사일의 아버지: 냉전 핵균형의 기술적 초석을 놓은 설계자

1966년 바이코누르. 사일로에서 R-36이 솟아오르자 드골은 '콜로살!'을 연발했다. 웃킨은 훗날 회고했다. '그래도 진짜 전투발사로는 이어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얀겔의 후계자로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KB 유즈노예를 이끈 수석설계자. 얀겔의 저장성 추진제 로켓 노선을 계승하여 역대 가장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R-36M(나토명 SS-18 '사탄')을 완성했고, 철도기동형 RT-23 몰로데츠와 우수한 중형 발사체 제니트를 개발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과 국가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1976~1990)을 지냈다. 냉전 후기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설계하며 미소 간 핵균형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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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 유즈노예 입사, 엔지니어·선임엔지니어
  • 1967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제1대리
  • 1971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겸 소장
  • 1976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CPSU 중앙위원
  • 1979KB 유즈노예 총설계자 겸 소장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NPO 유즈노예 총괄국장 겸 총설계자
  • 1990–2000TsNIIMASh 소장

빅토르 페트로비치 마케예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Маке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4–1985 ○ 자연사

CIA가 '우랄의 용'이라 부른 해양전략로켓의 창시자

1955년, 코롤료프가 우랄 지부 부수석설계자 자리를 제안하자 서른 살 마케예프는 "수석설계자로만 가겠다. 대리는 안 한다"고 답했다. 코롤료프는 그 배짱에 놀랐지만, 결국 그를 SKB-385 수석설계자로 임명했다.

항공기 공장의 제도공으로 시작해 코롤료프의 눈에 띄어 31세에 SKB-385 수석설계자가 된 로켓 기술자. 30년간 단 한 조직을 이끌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3세대를 개발: 수중발사, 공장연료주입, 대륙간사거리, MIRV 탑재를 차례로 실현하며 냉전기 해양핵억지력의 전략적 균형을 완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의 정체를 몰라 '우랄의 용'이라 불렀고, 그가 만든 R-17은 NATO 코드명 '스커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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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4모스크바 및 카잔 항공기 공장에서 제도공·설계사로 Pe-2 생산 참여
  • 1947–55OKB-1/NII-88 주임설계사: R-11 및 최초 해군탄도미사일 R-11FM 개발
  • 1955–85SKB-385 수석·총괄설계자: SLBM 3세대(R-21, R-27, R-29, R-29R, R-39, R-29RM) 개발
  • 1962R-17(스커드) 작전전술미사일 실전 배치
  • 1965기술과학 박사
  • 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
  • 1960–85체랴빈스크공대 및 모스크바물리기술연구소 교수·학과장

미하일 표도로비치 레셰트뇨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ешетн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4–1996 ○ 자연사

시베리아 밀림에서 소련 위성통신·항법 제국을 세운 수석설계자

1987년 바이코누르. 고르바초프가 위성들을 보며 물었다. "이걸 다 시베리아에서 합니까?" 레셰트뇨프가 답했다. "시베리아에서 합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그리고 200개 도시와 함께 일합니다."

코롤료프의 부수석 설계자로 출발해 1961년 시베리아 밀폐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26에서 독자 설계국 OKB-10을 창립한 우주공학자. 몰니야, 스트렐라, 라두가, 에크란 등 통신·방송 위성 계열을 차례로 완성했고, 측지·구난·항법 위성으로 영역을 넓혀 1982년에는 GLONASS 전지구 위성항법 시스템을 궤도에 올렸다. 그가 이끈 NPO PM(응용역학 과학생산연합)은 30여 종의 우주 시스템과 1,000기 이상의 위성을 제작해 소련 전체 위성의 3분의 2를 책임졌으며, 오늘날 ISS 레셰트뇨프 사로 이어져 러시아 위성산업의 중추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수상자이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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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2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입학, 전쟁으로 알마아타 피난
  • 1942–46세르푸호프 항공정비사 학교 수료, 제26예비전투항공연대 정비사 복무
  • 1950MAI 우등 졸업, 티호미로프 지도로 로켓 주제 졸업논문
  • 1950–57OKB-1(코롤료프) 기술사 → 선임기술사 → R-11 미사일 수석설계자
  • 1958–59OKB-1 부수석설계자, CPSU 입당(1951)
  • 1959–61OKB-1 동부지부장(크라스노야르스크-26), 얀겔로부터 경량발사체 인수
  • 1961–67OKB-10 수석설계자, 코스모스 발사체·스트렐라 위성 첫 발사(1964)
  • 1967–77KB PM(응용역학 설계국) 총설계자, 몰니야·라두가 위성 계열 개발
  • 1977–96NPO PM 총설계자 겸 총괄국장, GLONASS(1982)·에크란·고리존트·루치 등 완성
  • 1974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 1980레닌상 수상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파벨 이바노비치 벨랴예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еля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5–1970 ○ 복막염 사망

최초의 우주유영을 지휘한 전투조종사

자동유도장치가 죽었다. 벨랴예프는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보조르 항법기를 들여다보며 캡슐의 자세를 손으로 바로잡았다. 레오노프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완전 수동 재진입이었다.

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출신으로, 1960년 최초의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었을 때 서른넷의 최고령이자 최고 계급(소령)으로 단장이 되었다. 1965년 3월 18일 보스호트 2호의 선장으로서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인류 최초 우주유영을 지휘했고, 귀환 시 자동유도장치가 고장나자 누운 자세로 수동 재진입을 수행해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을 사람 손으로 착륙시켰다. 2,000km나 빗나간 착륙 지점은 페름 밀림이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이틀을 영하의 숲속 캡슐에서 버텼다.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후 소유스 계획 훈련을 지휘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 복막염으로 1970년 마흔넷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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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함대 전투조종사, 소일전 참전
  • 1959공군사관학교 졸업, 흑해함대 비행대대장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초대 단장
  • 1965.3.18–19보스호트 2호 선장: 인류 첫 우주유영, 수동 재진입
  • 1966–67소유스·알마즈 계획 훈련 지휘
  • 1969우주비행사훈련센터 제1국장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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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코마로프 (우주비행사)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ома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7–1967 ✕ 소유즈 1호 귀환 중 추락사

보스호트 1호 사령관이자 인류 최초 우주비행 희생자

「나는 태양을 향해 우주선을 지향시킬 수 없다」 — 소유즈 1호의 잇단 고장 속에서도 코마로프는 끝까지 수동 조작을 시도하며 지상에 상황을 보고했다.

소련 공군의 시험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로, 1964년 보스호트 1호 사령관으로서 세계 최초의 다인승 우주비행을 지휘했다.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우주비행사 중 한 명으로,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훈련 평가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1967년 소유즈 1호의 첫 유인 시험비행에서 단독 조종사로 나섰으나, 재진입 후 주낙하산 미전개로 귀환선이 추락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사망자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설계 검증과 안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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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소련 공군 전투기 조종사 (그로즈니·무카체보)
  • 1954–195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항공무장학부 생도
  • 1959–1960공군비행시험연구소(GK NII VVS) 시험비행사 겸 기술장교
  • 1960–1967우주비행사 — 제1차 공군 그룹, 훈련센터(TsPK)
  • 1964.10보스호트 1호 사령관 — 세계 최초 다인승 우주비행
  • 1966–1967TsPK 제3부장 · 선임교관 우주비행사
  • 1967.04소유즈 1호 사령관 — 첫 유인 시험비행 (귀환 중 사망)

레프 페트로비치 페옥티스토프

Лев Петрович Феоктист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계 1928–2002 ○ 자연사

핵무기 설계자에서 핵군축의 비판자로

그는 핵무기 경쟁을 두고 “폭탄 하나에도 쓸모를 찾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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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에서 핵물리학 전공
  • 1951–1955KB-11 이론부, 아르자마스-16 연구원
  • 1955–1978VNIITF, 첼랴빈스크-70 이론물리학자
  • 1966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78–1988쿠르чатов 원자력연구소 연구자, MEPhI 교수
  • 1988–200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레이저 핵융합 부서장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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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게르만 아르세니예비치 곤차로프

Герман Арсеньевич Гонча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28–2009 ○ 사망

사하로프 팀에서 출발해 소련 수소폭탄 역사의 수석 기록자가 된 물리학자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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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11(아르자마스-16) 실험원자로부 선임연구보조원, 이후 엔지니어
  • 1953KB-11 이론부서 정식 연구원(사하로프 휘하)
  • 1955RDS-37 2단계 열핵전하 설계·계산 공동 수행
  • 1961차르 봄바(RDS-220) 물리 설계 참여
  • 1965메가톤급 열핵전하 신설계 방향 제안, 1966년 시험 성공
  • 1967–2004VNIIEF 이론부서장
  • 1990년대–2009『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다권본 책임 편찬자, 핵무기사 연구
  • 2002–2009VNIIEF 이론·수리물리연구소 수석연구원

안드리얀 그리고리예비치 니콜라예프

Андриян Григорьевич Николае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추바시인) 1929–2004 ○ 심장마비

보스토크 3호로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한 소련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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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50산림기술자, 카렐리야
  • 1950–54징집, 전투기 비행훈련 (체르니고프·프룬제)
  • 1955–60모스크바 방공전투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2.8보스토크 3호: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 (64회 선회, 4일)
  • 1963–68소련 우주비행사단 지휘관
  • 1970.6소유즈 9호: 18일 체공 신기록
  • 1974–82가가린 훈련센터 제1부소장, 퇴역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차조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Чаз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29–2021 ○ 자연사

크렘린 의료를 20년간 총괄한 소련 심장학의 대부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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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키예프 의과대학 졸업, 모스크바에서 레지던트 수련
  • 1963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65–1976소련 의학아카데미 미야스니코프 심장학연구소 소장
  • 1967–1986소련 보건부 제4총국장 (크렘린 의료 총괄)
  • 1968–1986소련 보건부 차관
  • 1976–2014전연방 심장학 연구센터 소장
  • 1987–1990소련 보건부 장관

파벨 로마노비치 포포비치

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우크라이나 1930–2009 ○ 뇌졸중

보스토크 4호로 첫 동시 유인 비행에 나선 4번째 우주인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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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전문학교·비행클럽 졸업
  • 1954군사 항공학교 졸업, 공군 복무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보스토크 1호 교신 담당관 (가가린 비행)
  • 1962.8.12–15보스토크 4호: 첫 동시 유인 비행, 니콜라예프와 6.5 km 접근
  • 1966–68소련 달 착륙 계획 훈련
  • 1974.7.3–19소유스 14호 사령관: 살류트 3호(알마즈) 도킹
  • 1978–89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 부센터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라표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Лавё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6 ○ 자연사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마지막 책임자이자 우라늄 지질학자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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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이겜 RAS 우라늄광상연구실 선임연구원 → 실장
  • 1966–1972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 부국장
  • 1968–1972전연방 지질기금(ВГФ) 국장
  • 1972–1983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1989키르기스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8–2013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1소련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91소련 총리 부의장 겸 과학기술부 장관
  • 1991–2016이겜 RAS 소장 → 과학지도자

조레스 이바노비치 알표로프

Жорес Иванович Алфёр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벨라루스 1930–2019 ○ 자연사

반도체 헤테로구조로 IT 시대를 연 공산주의 물리학자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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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최초의 소련 트랜지스터 개발 참여
  • 1963이중 헤테로구조 반도체 레이저 특허 출원
  • 197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이오페 연구소)
  • 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레닌상 수상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87–2003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 1989–2017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
  • 1995–201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연방명단)
  • 2000노벨 물리학상 수상 (헤르베르트 크뢰머와 공동 수상)

아나톨리 스테파노비치 디야틀로프

Анатолий Степанович Дятл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1–1995 ○ 방사선 후유증, 사망

체르노빌 4호기 안전시험을 지휘한 부수석기사, 사고 후 설계 결함을 주장한 핵공학자

비상시 핵분열을 멈추도록 설계된 원자로 보호계통이 원자폭탄 기폭장치 역할을 했다.

시베리아 빈농가 출신으로 14세에 집을 나와 노릴스크 기술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를 우등 졸업했다. 14년간 아무르의 조선소에서 핵잠수함 원자로를 설치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73년 체르노빌 원전으로 옮겨 3·4호기를 총괄하는 부수석기사가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을 현장 지휘했고, 사고 후 설계 결함이 원인임을 주장했으나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도 RBMK 노형의 구조적 결함을 입증하려 애쓰며 『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집필했고, 1992년 IAEA 자문보고서는 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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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2노릴스크 광업야금 기술학교 전기공학과, 전기기사로 근무
  • 1953–1959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 졸업 (자동화·전자공학, 우등)
  • 1959–1973콤소몰스크나아무레 조선소 23연구소, 핵잠수함 원자로 설치
  • 1973–1986체르노빌 원전 부수석기사(2차 구역 운영), 3·4호기 담당
  • 1987–1990안전규정 위반으로 징역 10년 선고, 건강 악화로 1990년 조기 석방
  • 1990–1995『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 집필, 설계 결함 주장 지속

발렌티나 레오니도브나 포노마료바

Валентина Леонидовна Пономарёва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3–2023 ○ 자연사

가장 뛰어난 여성 우주인 후보였으나 비행하지 못한 시험비행사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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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 1957–62OKB-1 배치 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응용수학부 연구원 (켈디시 산하)
  • 1962.4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공군 입대
  • 1962–63보스토크 6호 훈련, 최종시험 최고점. 테레시코바의 제2후보로 배정
  • 1965–66보스호트 4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88우주비행사훈련센터 선임연구원, 궤도역학·우주비행사 교육
  • 1988–2023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우주비행사학사 그룹장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넬류보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Нелюб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4–1966 ✕ 자살

가가린의 두 번째 예비였으나 한 번도 우주에 닿지 못한 우주비행사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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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예이스크 해군항공학교 졸업, 해군 항공대 복무
  • 1960.03제1차 우주비행사단 선발 (뱅가드 6인)
  • 1961.01국가위원회, 탑승 순위 3위로 확정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
  • 1961.04보스토크 1호 두 번째 예비 (가가린)
  • 1962.06건강 문제로 보스토크 3·4호 훈련에서 제외
  • 1963.04치칼롭스카야 역 사건으로 우주비행사단 제적
  • 1963–66극동 방공부대 전투기 조종사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4–1968 ✕ 추락사

인류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미소

재진입 돌입, 캡슐 밖은 3천 도의 플라스마에 휩싸이고 10G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가가린은 그 안에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 쇼스타코비치의 「조국은 듣는다, 조국은 안다」. 후일 회고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내내 그 노래를 불렀다.」

집단농장 목수의 아들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파예할리!(갑시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두 진영이 함께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우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훈련하다 1968년 미그기 추락으로 죽었다. 서른네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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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7공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12보스토크 1호: 인류 첫 우주비행 108분
  • 1961–67세계 순방, 우주비행사 훈련 부책임자
  • 1968.3미그-15 훈련비행 중 추락

발레리 표도로비치 비콥스키

Валерий Фёдорович Быков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4–2019 ○ 자연사

5일 동안 혼자 궤도를 돌며 아직도 깨지지 않은 단독 비행 기록을 세운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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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 1988–1990베를린 소비에트 과학문화관 관장
  • 1990은퇴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

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4–2019 ○ 자연사

인류 최초로 우주의 문을 열고, 붓으로 우주를 그린 사관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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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추게프 공군비행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59동독 주둔 소련 공군 정찰연대 배속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유리 가가린과 동기)
  • 1965.3.18보스호트 2호: 인류 최초 우주유영 12분 9초
  • 1968소련 유인 달착륙 계획 사령관 후보, 계획 취소
  • 1971소유스 11호 주승무원 사령관, 의료 문제로 교체 — 백업 승무원 전원 사망
  • 1975.7소유스 19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소 최초 도킹
  • 1976–1982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
  • 1991공군 소장으로 퇴역
  • 2002–2019통합러시아당 최고위원회 위원

세르게이 니키티치 흐루쇼프

Сергей Никитич Хрущё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미국 (이중국적) 러시아인 1935–202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의 유도체계 엔지니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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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 1959레닌상 수상
  • 1963–1964OKB-52 수석 설계자 겸 부설계국장
  • 1963사회주의 노동영웅 · 레닌 훈장 수훈
  • 1968–1991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부문장 → 제1부소장
  • 1991–2020미국 이주,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 선임연구원 · 교수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юха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35–2021 ○ 1988년 10년형, 5년 복역 후 석방

건설을 이끌고 사고의 책임을 진 체르노빌 원전의 첫 소장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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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타슈켄트 공과대학 졸업, 앙그렌 화력발전소 취직
  • 1966슬라뱐스크 화력발전소에서 부수석 엔지니어까지 승진
  • 1970–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 겸 건설 책임자
  • 1986.07사고 책임으로 당 제명·해임, 8월 체포
  • 1988.0710년형 선고, 도네츠크 교정노동시설 복역
  • 1991.09조기 석방, 우크라이나 대외무역부 근무
  • 1995–2015우크르인테르에네르고에서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

예브게니 파블로비치 벨리호프

Евгений Павлович Велих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35–2024 ○ 자연사

핵융합과 핵군축을 과학으로 연결한 소련의 물리학자

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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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대학 물리학부 졸업
  • 1961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입소
  • 1971–1978자기연구소장 · 트로이츠크 분소
  • 1973–1991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 과학책임자
  • 1978–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6체르노빌 사고 고르바초프 과학보좌역
  • 1989–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9–2015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 총재 → 명예총재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

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36–1988 ✕ 자살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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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 1986–1988정부위원회 위원, 체르노빌 사고 수습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Валерий Ильич Ходемчу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인 1951–1986 ✕ 폭발로 즉사, 시신 미수습

폭발 순간 펌프실에 있었고,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체르노빌의 첫 번째 희생자

폭발 직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22번 펌프 하부 급수를 재충전해야 해… 좋아,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키이우주 크라피브냐에서 태어나 1978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해 주순환펌프(GCN) 운전원으로 일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북쪽 GCN 펌프실에 있었고,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은 지금도 석관 내부 잔해 속에 남아 있으며, 3호기와 4호기 사이 격벽에는 그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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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입사, 보일러 기사·선임 기사(열·지하통신 작업장)
  • 19784호기 주순환펌프(GCN) 운전원, 이후 제7그룹 수석 운전원
  • 1984노동영예훈장 3등급 수훈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폭발, 북쪽 GCN 펌프실에서 순직
  • 1986.12명예휘장훈장 추서
  • 2008우크라이나 용기훈장 3등급 추서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Аким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53–1986 ○ 방사선 피폭, 사망

4호기 교대 감독관, AZ-5 비상정지 지시 후 현장에 남아 수습하다 피폭 사망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 중 원자로 출력이 급락하자 출력 회복을 지시했고, 시험 종료와 함께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도록 했으나 제어봉 설계 결함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후 8시간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고 소방 호출, 급수 밸브 수동 개방 등 수습을 지휘하다 15~20Gy의 치명적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5월 11일 33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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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 2008우크라이나 대통령령으로 3급 용기훈장 사후 수여

레오니트 표도로비치 톱투노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Топтун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960–1986 ✕ 방사선 피폭 사망

25세에 체르노빌 4호기 AZ-5 버튼을 누른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

제어봉 문서를 공부하던 톱투노프는 친구 사샤 코롤에게 '특정 조건에서는 제어봉이 반응을 늦추기는커녕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석 달 뒤 그 예감은 그가 직접 누른 AZ-5 버튼에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트 톱투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로, 1986년 4월 26일 참사 당시 야간 교대조 제어반을 맡고 있던 불과 25세의 기술자였다. 독립 근무 석 달째 처음 맞은 정지 작업에서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으나 RBMK 제어봉의 설계 결함이 반응도를 급증시켜 폭발을 촉발했고, 사고 직후 통제실로 돌아와 물 공급 밸브를 수동 개방하다 1,300렘의 치명적 방사선을 흡수해 5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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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우크라이나 수미주 니콜라예프카에서 출생
  • 1983오브닌스크 원자력공학연구소 졸업
  • 1983–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무: 블록 제어 기술자, 이후 4호기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야간 교대조에서 AZ-5 비상정지 작동, 치명적 방사선 피폭
  • 1986.05.14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 미티노 묘지에 안장

발렌티나 블라디미로브나 테레슈코바

Валент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Терешкова

직공 출신 첫 여성 우주인, '차이카'

발사대 앞에서: 「에이, 하늘! 모자 벗어!」 — 마야콥스키의 시구를 외치며, 1963년 6월 16일.

1963년 보스토크 6호로 세계 최초 여성 단독 우주비행. 직물 공장 여공 출신으로 71시간 49바퀴를 홀로 비행하며 프롤레타리아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된 '차이카'. 후에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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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60타이어 공장·직물 공장 노동자, 야간학교·통신기술학교 졸업
  • 1959–61야로슬라블 비행클럽 낙하산 훈련 (90회)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 1963.6.16–19보스토크 6호: 첫 여성 우주비행, 71시간 단독비행
  • 1966–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간부회의 위원 (1974–89)
  • 1968–87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장
  • 196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기술과학 후보·교수
  • 1971–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7–92소비에트 해외우호문화교류협회연합 의장
  • 2011–현재통합러시아당 국가두마 의원
  • 1995/2025소장·중장 진급: 러시아군 최초 여성 장군

보리스 미하일로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

보스호트 2호의 우주유영을 가능케 한 팽창식 에어록 볼가의 수석 설계자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발사 때 접혀 있던 볼가 에어록이 궤도에서 부풀어 오른 뒤 그 문을 열고 우주로 나갔다.

보리스 미하일로프는 모스크바 근교 토밀리노의 제918공장(훗날 NPO 즈베즈다)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하며 1964년 중반, 단 9개월 만에 팽창식 에어록 '볼가'를 설계·제작·시험한 인물이다. 보스호트 우주선에 금속제 에어록을 탑재할 공간이 없었기에,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궤도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유연 구조물 설계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바로 이 에어록을 통해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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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65제918공장(즈베즈다) 수석 설계자, 팽창식 에어록 '볼가' 개발

이리나 바야노브나 솔로비요바

Ирина Баяновна Соловьёва

테레슈코바의 예비 우주비행사, 카마닌이 신체적 최고라 했지만 대중역할엔 내성적이었던 낙하산 국가대표

「우리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비밀경찰로부터 우주비행사단 입단 제의를 받고, 약혼자와 함께 단골 카페에서 문 닫을 때까지 고민한 끝에.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한 기계공학자이자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로, 1962년 소련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단 5인에 선발되었다. 1963년 보스토크 6호 비행에서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로 훈련받았으며, 니콜라이 카마닌은 그녀를 신체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으나 대외 선전에 필요한 외향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포노마료바와 함께 보스호트 계획 최초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계획 취소로 무산되었고, 1969년 여성 비행사단 해체 후 우주비행사훈련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심리학 후보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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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9우랄 공과대학 건설학부 졸업, 기계공학 전공
  • 1955–62국가대표 낙하산 선수, 스포츠 마스터(1959), 약 700회 강하
  • 1959–62우랄에네르고몬타주 설계국 엔지니어
  • 1962.3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우주비행사 훈련 이수
  • 1963.5보스토크 6호 테레슈코바의 주예비 비행사
  • 1964–67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조종사-우주비행사-기사 자격
  • 1966포노마료바와 보스호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91우주비행사훈련센터 연구원·선임연구원, 심리학 후보학위(1980), 대령 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