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전 정보로 처칠을 움직인 GRU 국장, 베를린까지 진군한 전차군 중장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 1927–31제5기병여단 정치부장 겸 군정위원 → 레닌그라드 군관구 군검찰 보좌관
- 1931–37군사기술아카데미 입학 → 기계화·차량화 군사아카데미 지휘학부 졸업
- 1937–40기갑시험장 군정위원 → 기갑총국 부국장 → 제2기계화여단장(하산 호) → 정보총국(GRU) 부국장
- 1941–42GRU 정보총국장 대행(7~9월) → 정식 국장(10월~) 겸 참모본부 부총장 겸 안데르스군 편성 전권위원
- 1942–43제3전차군 부사령관(코젤스크) → 제5전차군 부사령관(보로실로브그라드)
- 1943–44기갑·기계화군 총국 제2부국장 → 제6근위전차군단장(키예프·지토미르)
- 1944–45제3근위전차군단장 — 동포메라니아·베를린 공세, 그디니아-단치히 독일 제2군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5–51제3근위전차사단장 → 기갑군사아카데미 공병전술학부장 → 외국군 장교 교육학부장
- 1952–53북부군관구 기갑·기계화군 사령관
- 1954–59참모본부 아카데미 고위과정 졸업 → 동 아카데미 교관·전술학부 부장, 1959년 11월 예편
관련 역사 사건
정보총국(GRU) 국장 시절, 1940–1942
판필로프는 1940년 6월 제5관리국(정보) 부국장으로 발탁되며 기갑 장교에서 정보 인물로 전환했다. 제5관리국은 같은 해 7월 참모본부 정보총국으로 개편되었고, 독소전쟁 발발 뒤 그는 국장 대행을 거쳐 1941년 10월 정식 국장으로 승인되었다. 전쟁 초기 최대 위기 속에서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한 그는 동시에 안데르스 장군의 폴란드군 편성 전권위원을 겸했다.
그가 다룬 가장 유명한 첩보망은 리하르트 조르게의 동경 조직이었다. 1941년 조르게가 보낸 두 통의 결정적 암호전문, 곧 독일이 일본을 대소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보고와 적군이 서방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도쿄는 대소전을 유보하고 남진을 택한다는 7월 10일 보고는 판필로프의 손을 거쳐 소련의 극동 판단을 좌우했다. 그는 조르게의 전문에 「정보원의 큰 가능성과 이전 보고 대다수의 신뢰성을 고려할 때 이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결재를 남겼다.
국장 시절 그의 대표 업적은 화학전 경보였다. 1942년 초 그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고, 이는 스탈린과 처칠의 논의로 이어져 처칠의 라디오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이후 1942년 8월 안데르스군이 적군과의 공동 전선을 거부하고 소련을 떠나자, 그 편성 전권위원이던 판필로프는 정보총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