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푸자노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узанов
소련 러시아 1906–1998 ○ 자연사

크림 이관을 반대했고 조용히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한 러시아 수상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아프가니스탄 대사와 소련의 군사개입

1972년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로 부임한 푸자노프는 7년간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가장 격변적인 시기를 목격했다.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78년 4월혁명으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이 집권했다. 푸자노프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정권의 '4인조'(아슬람 와탄자르, 사이드 무함마드 굴랍조이, 셰르잔 마즈도랴르, 아사둘라 사르와리)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고, 이들은 하피줄라 아민을 견제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1979년 여름, 타라키와 아민의 권력투쟁은 결정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타라키의 '4인조'는 아민 암살을 모의했으나, 사르와리의 조카 아지즈 아크바리가 이 비밀 임무를 소련 대사관에 누설했다. 대사관은 아민에게 경고해 그의 목숨을 구했다. 9월 14일, 아민은 타라키와 푸자노프, 그리고 소련 국방차관 파블롭스키가 기다리는 대통령궁(아르크)으로 향했다. 푸자노프가 직접 아민을 설득해 궁으로 가도록 한 것이다. 궁 안에서 경호원들이 총격을 가했고, 경찰총감 타룬은 사망했으나 아민은 부상만 입고 탈출했다. 아민은 군대를 동원해 타라키를 체포했고, '4인조'는 소련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소련은 타라키의 구명을 시도했으나 아민은 거부했고, 모스크바는 아민의 타라키 제거를 사실상 용인하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푸자노프가 아민의 손에 타라키의 운명을 맡긴 브레즈네프의 입장을 전달한 후, 10월 9일 타라키는 베개로 질식사당했다. 푸자노프는 아민에 대해 "영리하고 정력적이며 대단히 일벌레였다"고 평가하면서도, 모스크바에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보고를 올려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79년 11월, 그로미코 서명의 전보로 "본인의 반복된 해임 요청을 감안하여" 타지 발령을 통보받았다. 푸자노프는 평생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소련군이 카불에 진입하기 직전인 11월 21일 소환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도착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준비였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