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셰르바코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Щербаков
소련 러시아 1901–1945 ○ 심장마비

스탈린의 전시 선전 책임자이자 모스크바 당 보스, 죽음은 「의사들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정보국과 전시 선전 체계

1941년 6월 24일, 독소전쟁 발발 사흘째 되는 날, 셰르바코프는 소비에트정보국(Совинформбюро)의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구는 전쟁 기간 내내 국내외 보도, 라디오 방송, 군사 공보를 일원화하는 중추로 기능했다. 모스크바의 스튜디오와 쿠이비셰프(사마라)의 후방 본부, 스베르들롭스크(예카테린부르크)의 방송 시설을 연결한 분산 체계 아래, Sovinformburo의 매일의 최전선 공보는 1,171개 신문과 523개 잡지에 게재되고 23개국 18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송출되었다. 유리 레비탄의 익숙한 "소비에트정보국에서 알려드립니다"라는 첫 마디는 전쟁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셰르바코프는 소비에트 문학계의 최고 역량을 동원했다. 그는 일리야 에렌부르크, 알렉세이 톨스토이, 콘스탄틴 시모노프, 발렌틴 카타예프, 레오니드 레오노프, 알렉산드르 파데예프, 코르네이 추콥스키를 소비에트정보국의 필진으로 충원했다. 에렌부르크 한 사람만으로도 300편이 넘는 기사를 썼으며,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통신사 단독으로도 1,500개 이상의 신문에 그의 글을 배포했다. 셰르바코프는 군사 공보와 문학적 홍보물, 외국어 방송을 하나의 서사로 통합하여 국내 사기와 연합국 여론을 동시에 겨냥하는 종합 체계를 구축했다.

1942년부터는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GlavPUR)을 겸임하면서 전선 신문과 정치 장교, 그리고 전 부대의 정치 교육을 소비에트정보국의 대외 메시지와 연계시켰다. 또한 1943년 중앙위원회 국제정보부장이 되면서 해외 공산당과의 연락까지 조율했다. 스탈린의 신임을 받아 셰르바코프가 서명한 자료는 대개 그대로 승인되었으며,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셰르바코프와 합의된 문서라면 스탈린이 지체 없이 서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國歌) 제정 위원회도 주재했으며, 수십 명의 작곡가와 시인이 제출한 안을 직접 심사했다. 전쟁이 끝난 지 하루 만인 1945년 5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셰르바코프는 국가의 모든 공식 발언을 하나로 엮어내며, 동시대 미국 관측자가 표현했듯, "소비에트 전시 선전 체계의 실질적인 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