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둡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8–1989 정치·당 지도 · 체코슬로바키아
경력 연표
- 193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5–56즐린(고트발도프) 지역당 서기
- 1960–62KSČ 중앙위 계획부장
- 1962–63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63–68체코슬로바키아 교통장관
- 1968.8'초청 편지' 서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내정
- 1968–71KSČ 중앙위 서기
- 1971–89KSČ 정치국원, 연방의회 의장
관련 역사 사건
1968년 8월: '노동자·농민 정부' 수립 시도와 '인드라 정부'
1968년 8월 3일 인드라는 드라고미르 콜데르, 올드르지흐 슈베스타, 안토닌 카페크, 바실 비략과 함께 '초청 편지'로 불리게 되는 문서에 서명했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편지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수단"으로 도움을 달라며, 오직 소련의 도움으로만 체코슬로바키아를 '다가오는 반혁명의 위험'에서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모스크바에 개입의 구실을 제공했다. 두 출처는 이 편지가 8월 3일 브라티슬라바에서 브레즈네프에게 전달되었다고 전한다.
바르샤바조약군 진격 직후 인드라는 합법 정부를 대체할 협력자 내각 구성을 시도했다. 소련은 1968년 프라하의 봄 자유화에 반대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내 보수파 인사들을 동원했고, 이 내각은 침공 직후 권력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8월 21일 오후 콜데르·비략·요제프 레나르트와 함께 프라하 성으로 가서 루드비크 스보보다 대통령에게 정부와 당 정치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권력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대통령은 올드르지흐 체르니크의 합법 정부를 계속 신뢰한다고 답했다.
8월 22일 이들은 호텔 프라하에서 회동한 뒤 소련 대사관에서 체르보넨코 대사와 만났고, 23시에 다시 프라하 성으로 갔다. 스보보다가 '노동자·농민 정부' 구성을 제안받고 이를 거부하자 내각은 끝내 임명되지 못했으며, 이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내 보수적·친소 인사들이 주도한 협력자 내각, 곧 '인드라 정부'로 기록되었다. 회담 내용은 러시아 기록보관소에 잠겨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좌절은 즉각적인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8월 22일 프라하 비소차니에서 비밀리에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비상대회는 개입을 규탄하고 개혁파가 주도하는 새 중앙위원회를 선출했으며, 인드라를 비롯한 협력자들을 당 최고 기구에서 배제했다. 인드라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 서기직에서도 물러났다. 모스크바 의정서가 체결된 뒤 그는 심장 발작을 겪고 몇 주 만에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으며, 비략과 함께 당시 가장 보수적이고 인기 없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다만 이 대회의 결론은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무효화되었고, 1971년 그는 연방의회 의장이 되어 1989년까지 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