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원자력 해군을 창시하고 체르노빌로 생을 마감한 물리학자
체르노빌 사고 후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동시에 이끄는 것은 너무나 힘겨웠고, 결국 비참하게 끝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때부터 내 삶도, 창조적 활동도 끝나기 시작했다."
쿠르차토프의 후계자로서 소련 원자력 연구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 중 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체계를 개발했고, 1960년 쿠르차토프 사후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을 이어받아 28년간 이끌었다. 그의 주도로 원자력 쇄빙선과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이 건조되었으며, RBMK와 VVER 양대 원자로 설계의 과학 책임자였다. 1975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냈으나, 1986년 체르노빌 참사로 자신이 추진해온 RBMK 노형이 붕괴하며 과학 인생의 종언을 맞았다. 세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수상했다.
경력 연표
- 1930–1941LFTI 선임연구원, 고분자 물리학 및 통계적 강도 이론 연구 (물리수학 박사, 1941)
- 1941–1943쿠르차토프와 함께 함선 자기기뢰 방어 'LFTI 체계' 개발, 흑해·발트·북방 함대에 배치
- 1943–1946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
- 1946–1955물리문제연구소 소장 (카피차 후임)
- 1955–1960원자력연구소(IAE) 부소장
- 1960–1988IAE/쿠르차토프 연구소 소장, 원자력 쇄빙선·핵잠수함·RBMK·VVER 원자로 총괄
- 1975–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6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체르노빌 참사와 RBMK
알렉산드로프는 RBMK 원자로의 '과학 책임자(научный руководитель)'였으며, RBMK 설계에 대한 비밀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출원했다. RBMK는 흑연 감속·경수 냉각 방식의 고출력 관형 원자로로, VVER보다 제작이 쉽고 출력이 커 소련의 '국민 원자로'로 불렸다. 그러나 이 노형은 양의 보이드 계수와 제어봉의 '양의 스크램 효과'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 내부에서도 1965년부터 제르제룬, 볼코프, 이바노프 등이 RBMK의 핵적 위험성을 반복 경고했으나, 알렉산드로프는 이들의 보고서를 묵살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가했다. 1975년 레닌그라드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당시 이미 양의 보이드 계수로 인한 제어 불안정이 실증되었고, 1975년과 1982년에는 부분 노심 용해 사고까지 발생했으나 국가 기밀로 은폐되었다. 알렉산드로프와 수석 설계자 돌레잘은 문제를 깊이 조사하지 않았으며, RBMK 운전 매뉴얼에는 보이드 계수 분석조차 수록되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4호기가 폭발하자, 알렉산드로프는 처음에 운영진의 실수로 책임을 돌렸다. 그는 "차를 몰다 핸들을 잘못 꺾으면 사고가 나는 것이지, 모터나 설계자 탓이냐"라는 비유로 자신을 방어했으며, 책임을 돌레잘에게 전가하려 했다. 그러나 돌레잘은 만년에 "이 정도로 큰 양의 반응도 효과를 가진 원자로는 제어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소련 국가원자력안전위원회의 사후 조사는 RBMK가 "정상적인 보호 체계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프는 사고 직후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는 것은 재앙"이라며 RBMK 노형의 개량과 운용 지속을 주장했다. 실제로 사고 이후 남은 RBMK 원자로들은 보이드 계수 보정, 제어봉 개량, 운전 절차 개정 등을 거쳐 30년 이상 추가 가동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에게 체르노빌은 돌이킬 수 없는 종언이었다. 그는 1992년 회고에서 "체르노빌은 내 인생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 순간부터 내 삶도, 창조적 삶도 끝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1986년 10월 그는 11년간 맡아온 과학아카데미 총재직에서 물러났고, 1988년에는 쿠르차토프 연구소장직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