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
관련 역사 사건
두마 군사위원회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1917년 2월 혁명 당시 엥겔하르트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의 군사위원장을 맡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 대한 통제권을 세우려 했다. 2월 27일 타우리다 궁전에서 병사 대표와 소비에트 및 두마 인사들이 혁명군사본부를 구성했고, 이 조직은 반란에 가담한 부대를 조직하는 실무를 맡았다. 동시대 회고를 인용한 2023년 연구에 따르면, 로댠코는 군사위원회가 도시의 질서 회복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하고 엥겔하르트를 페트로그라드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인사 니콜라이 소콜로프는 이 임명이 봉기를 처음부터 이끈 이들을 밀어내고 소비에트를 배제한다고 항의했다. 두마 위원회는 궁전의 반란군사본부와 별도로 움직였고, 소콜로프 등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명령 제1호를 발표해 군부대마다 병사위원회를 선출하고, 정치적 활동에서 병사들이 소비에트와 위원회에 종속된다고 정했다. 명령은 두마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소비에트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따르도록 제한했고, 무기를 중대·대대 위원회 관리 아래 두었다. 따라서 혁명 직후 병사와 장교 사이의 권한 및 규율 문제는 단순한 지휘 체계 복구로 해결되지 않았다. 엥겔하르트가 이끈 두마 위원회가 수비대 통제를 회복하려 한 시도와 병사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제도화한 소비에트의 명령은 타우리다 궁전 안에서 서로 다른 권력의 기반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