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관련 역사 사건
프랑스와 벨기에의 은신 시기
은신 시기는 1927년 파리에서 시작된다. 1926년 10월 아스카소, 호베르와 함께 재판을 받아 위조 여권과 무기 소지, 반란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고, 프랑스 정부가 아르헨티나의 인도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자 세 사람은 변호인들의 항고와 함께 1927년 2월 13일부터 인도 반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루이 르쿠앵이 하원에서 다수를 확보하고 레몽 푸앵카레 내각을 흔들자 7월 8일 세 사람은 석방되었고, 두루티는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답했다. 프랑스 당국은 곧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고, 출국 비자를 내줄 나라를 찾는 동안 그는 멘イル몽타의 아나키스트 서점에서 프랑스 아나키스트 에밀리엔 모랭을 만나 관계를 맺었으며, 우크라이나의 마흐노주의 지도자 네스토르 마흐노를 만나 스페인 혁명의 가능성을 논했다.
1927년 7월 프랑스 경찰은 그와 아스카소를 벨기에로 넘겼으나 한 달 뒤 다시 프랑스로 밀어냈고, 스페인으로의 추방을 앞두고 요니의 평화주의자 에밀 부셰의 집에서 피신했다. 이후 비밀문서를 이용해 리옹에 정착했고, 거기서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의 결성을 알게 되었다. 1928년 4월부터 10월에는 프랑스 감옥에 갇혔으며, 석방 뒤 소련 대사관이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비자를 얻지 못했다. 대신 베를린으로 가 국제노동자협회 회의에 참석했고, 사회민주당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중앙당의 반대로 추방되었다. 1929년 초 벨기에로 간 두 사람은 브뤼셀에 머물며 두루티는 금속노동자로 일했고, 마르셀 디외와 함께 신문 《자유의 소리》(La Voz de Libertaria)를 창간하고 FAI를 위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30년 1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가 무너지고 아나키스트 유배자들이 귀국하기 시작했지만, 탄압 기구가 남아 있어 그는 귀국을 미뤘다. 1931년 4월 14일 제2공화국이 선포되자 그는 아스카소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최초의 망명 아나키스트 중 하나였고, 의회 정치를 거부하며 사회혁명을 주장한 탓에 동료들에게 '아나르코-볼셰비키', 맑스주의자들에게 '유치한 혁명가'라는 비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