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 계획경제의 설계자, MPLA 이론가
1975년 11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고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로서 앙골라 경제계획의 설계를 맡았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다 호샤 올리베이라 디롤루아(1939년 12월 2일 숨베 출생, 1996년 11월 16일 루안다 사망)는 앙골라의 경제학자이자 반식민주의 활동가, 대학 교수였다. 1950년대 루안다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61년 비리아투 다 크루스의 영향으로 MPLA에 들어가 디롤루아 전시명을 썼다. 돌리지에서 제1혁명훈련센터를 세우고 교수했으며 1963년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1974년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이 되어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에 참여했고, 1975년 11월 경제장관, 1976년부터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를 지냈다. 1977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정부·당 요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 루안다에서 사망했다.
다른 이름: 호샤 디롤루아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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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앙골라 국가기관계획부 장관·제2부총리대표
경제·재정·계획
경력 연표
- 1961MPLA 가입, 전시명 디롤루아 채택
- 1963동베를린 파견, 경제·금융 전공
- 1974MPLA 중앙위원회·정치국 위원, 루안다 26인 대표단 참여
- 1975–1978경제장관(1975), 계획부 장관 겸 제2부총리(1976~1978)
- 1978–1996루안다 대학 경제학부 교수, 정치·경제 연구 저술
관련 역사 사건
인민권력 건설과 정치국의 좌파: 1974~1978
1974년 8월 루사카 대회와 9월 룬도즈 회의를 거쳐 MPLA 지도부가 재편된 뒤, 디롤루아는 1974년 정치국·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어 당의 이데올로기 부문과 동유럽 접촉을 맡았다. 11월 8일 루안다에 들어간 26인 대표단도 같은 흐름의 사업이었다. 대표단 이후 당은 그를 루안다에 붙박이로 두고 인민권력 기구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주었고, 니투 알베르스, 주제 반두넹, 시타 발레스와 함께 수도권 사회주의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설계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1975년 1월 보험산업 조정위원회에 배치되어 기술연구국에서 일한 것도 루안다 잔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고, 이 작업은 1978년 앙골라국영보험재보험공사(ENSA)로 결실을 맺었다. 1977년 12월 제1차 MPLA 정기대회는 당을 노동계급의 전위당으로 규정했고, 1978년 2월 개정 헌법은 MPLA-PT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당으로 명문화했다. 이 시기 당내 좌파는 경제정책에서 동구권과의 협력 강화와 반혁명적 경제관행과의 전면 투쟁, 정치운영에서 민족·지역별 인구 비중이 아니라 혁명적 기준에 따른 간부 선발, 외교에서 쿠바 군대 철수 요구에 대한 양보 거부를 주장했다. 프라고주 비달에 따르면 이 좌파 노선을 이끈 인물이 계획·경제 담당 제2부총리 디롤루아였다. 다만 디롤루아가 좌파의 대표 주자였다는 점은 1994년 루안다에서 이루어진 그 자신과 다른 당간부들에 대한 인터뷰에 근거한 서술이며, 당시 지도부의 노선 대립이 후대의 좌우 구도로 정리된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