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코놀리

James Connolly
영국 아일랜드 1868–1916 ✕ 처형

노동자의 깃발과 공화국의 깃발을 한 깃대에 올린 사회주의자

총상으로 설 수 없어 의자에 묶인 채 총살당했다 — 킬마이넘 감옥(1916.5.12)

마르크스주의와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하나의 투쟁으로 통합한 사회주의 혁명가. 아일랜드시민군을 창설하고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사령관으로 싸웠으며, 봉기 진압 후 영국군에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마르크스주의와 반식민 민족해방의 통합

코놀리는 유럽 사회주의자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과 반식민 민족해방을 단일한 투쟁으로 통합한 혁명가였다. 『아일랜드 역사 속의 노동』(1910)에서 그는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계급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토지의 공동소유에 기초한 게일 사회의 전통을 사회주의적 미래의 역사적 토대로 제시했다.

그의 사상적 핵심은 민족해방 없는 계급해방도, 계급해방 없는 민족독립도 불완전하다는 인식이었다. 1897년 『에린의 희망』에서 이미 "녹색 깃발 아래 자본가와 지주가 지배한다면, 그것은 단지 지배자의 국적만 바꿀 뿐"이라고 경고했다.

코놀리의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1915년 『아일랜드의 재정복』에서 노동자 공화국이란 "작업장·공장·부두·철도가 국가 소유이되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산업공동체라고 규정했다. 노동조합의 민주적 통제 없는 국유화는 "국가자본주의일 뿐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미국에서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조직가로 활동하며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대중의 자기활동과 직접행동을 중시했고, 노동계급이 자본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 속에서 스스로 조직화되고 의식화된다고 보았다.

그의 반식민주의는 아일랜드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도의 반영 투쟁, 보어인의 저항, 이집트의 민족운동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피식민지 민중의 자기해방 권리를 마르크스주의 원칙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는 오늘날까지 탈식민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평가된다.

의자에 묶여 총살당한 부활절 봉기 사령관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월요일. 더블린 중앙우체국(GPO)에 아일랜드공화국 선언문이 게시되었다. 7명의 서명자 중 한 명이 제임스 코놀리였고, 그의 직함은 '아일랜드공화국 임시정부 부통령'이었다.

코놀리는 아일랜드시민군(ICA)을 지휘하며 더블린 여단 사령관으로서 봉기의 군사적 핵심을 책임졌다. "노동계급의 대의는 아일랜드의 대의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평생 신념이었다.

6일간의 전투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다. 코놀리는 발목에 중상을 입어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영국군은 그를 킬마이넘 감옥으로 이송했다.

1916년 5월 12일 새벽, 총살 집행대 앞에서 코놀리는 서 있지 못했다. 그를 의자에 묶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사제의 기도를 받은 후, "저는 이제 떠납니다, 기쁜 마음으로"라는 말을 남겼다는 전언과 함께 총살되었다.

그의 처형 방식은 아일랜드 여론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았다. 의자에 묶여 총살당한 사령관의 이미지는 부활절 봉기를 '무모한 반란'에서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바꾸어놓았고, 1919년 독립전쟁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확신시켰다.

코놀리는 유럽 사회주의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반식민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을 동일한 투쟁으로 통합한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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