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세계 3대 공산당으로 키운 조직가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 1939–1942게린도(인도네시아 인민운동) 청년조직 활동
- 1943인도네시아 공산당 입당
- 1944–1945지하 반파시스트 조직 '자유 인도네시아 운동' 지도부
- 1947–1948PKI 중앙위원 → 정치국원
- 1951–1959PKI 서기장
- 1959–1965PKI 중앙위원회 의장
- 1959–1965최고자문회의 위원, 임시국민협의회 부의장, 무임소장관 겸직
- 1965.11.22중부자바에서 체포되어 즉결처형
PKI의 대중조직 건설과 평화적 의회노선
아잇이 1951년 서기장으로 취임했을 때 PKI는 마디운 사건(1948) 이후 당원 수천 명에 불과한 와해 직전의 조직이었다. 아잇은 수카르노의 유도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당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대중조직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노동조합(SOBSI), 농민조합(BTI), 여성운동(게르와니), 청년조직(페무다 라크야트), 문화단체(레크라) 등 부문별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하고, 토지개혁·문맹퇴치·문화운동을 통해 빈농과 노동자의 실질적 이해를 대변했다. 그 결과 PKI 당원은 1950년 5천 명 미만에서 1954년 16만 5천 명, 1959년 150만 명으로 폭증했고, 1965년에는 350만 당원에 부속 대중조직 2천만 명을 포괄하는 세계 3위의 공산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평화적 의회노선'은 군부 내 적대세력을 과소평가하고 독자적 무장력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1965년 쿠데타 이후 단 며칠 만에 대중조직 전체가 무방비로 학살당하는 비극의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