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4–1946 외교·국제활동 · 미국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관련 역사 사건
덤바턴오크스 회의 의장, 유엔 구상의 골격 마련
무기대여 행정관 자리에서 물러나 1943~1944년 국무부 차관이 된 스테티니우스는 1944년 국무장관 코델 헐의 병환을 대신해 덤바턴오크스 회의를 주재했다. 정식 명칭은 ‘국제 평화 및 안전 기구에 관한 워싱턴 회담’으로, 1943년 모스크바 선언 제4항이 국제연맹을 이을 전후 국제기구의 필요를 인정한 뒤 취해진 첫 중요한 조치였다. 회의는 미국·영국·소련·중국의 사대국이 주도했고, 1944년 8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 워싱턴 덤바턴오크스 저택에서 열렸다. 소련이 중국과의 직접 회담을 꺼려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차관이던 스테티니우스는 미국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서 자기 대표단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회의 자체를 주재했다. 다른 대표단은 영국 외무차관 알렉산더 캐도건, 주미 소련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 주미 중국 대사 웰링턴 구가 이끌었다. 회의 준비는 1943년 12월 국무부 내 ‘비공식 의제 그룹’에서 시작되었고, 1944년 6월 ‘국제기구 그룹’이 대통령과 헐, 정치인 및 법률·군사 전문가들과 협의해 초안을 다듬어 7월 18일자 ‘국제기구 일반을 위한 잠정 제안’을 다른 3대국에 전달했다. 10월 7일 대표단은 ‘국제기구 일반 설립 제안’이라 불린 잠정 합의안에 도달했다. 논의 대상에는 회원국 자격,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구성,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문제가 포함되었다. 이 회의는 안전보장이사회 표결 절차와 소련의 16개 공화국 총회 가입 요구라는 두 쟁점을 남긴 채 유엔 조직의 뼈대를 세웠고, 그 미해결 쟁점은 이듬해 얄타 회담에서 다뤄졌다. 기업 경영에서 출발한 인물이 국무부 차관으로서 전후 국제기구의 골격을 설계하는 자리에 섰다는 점에서, 이 회의 주재는 그의 경력에서 전환의 정점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