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과학의 권위를 함께 세운 독재정권의 2인자
“함께 싸웠으니, 함께 죽는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73–1989 정치·당 지도 · 루마니아
경력 연표
- 1939–1947루마니아 공산당 활동가·섬유공장 노동자
- 1957–1967화학 연구자, 화학공학 학위와 박사학위 취득
- 1972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3–1974정치집행위원회 위원, 상임국 위원
- 1975–1989대국민의회 의원, 당·국가 지도부 인사
- 1980–1989루마니아 각료회의 제1부총리
- 1989.12혁명으로 체포되어 남편과 함께 처형
관련 역사 사건
과학 경력과 학위·논문 진위 논란
차우셰스쿠는 1957년 국가 화학연구소(ICECHIM)의 연구원으로 채용되면서 연구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는 부쿠레슈티 중앙화학연구소 당위원회 서기로 알려졌고, 남편이 1965년 3월 당 지도부를 장악한 뒤에는 그 연구소의 소장으로 등재됐다. 같은 해 12월 새로 만들어진 국가과학연구평의회 위원이 됐고, 1966년 9월에는 1급 과학공로훈장을 받았다. 1974년 3월에는 루마니아 학술원 화학분과 회원이 됐으며, 남편의 통치 기간에 고분자 화학 분야의 명예 상과 학위를 다수 받았다. 해외에서도 1978년 영국 국립화학연구소(Royal Institute of Chemistry) 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부쿠레슈티 폴리테크닉 야간과정을 거쳐 1957년 화학공학 학위와 1967년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이 경력의 근거는 1989년 이후 강하게 문제 제기됐다. 여러 과학자는 차우셰스쿠가 자기 이름으로 논문을 쓰도록 강요했고 대학이 정치적 지위 때문에 박사학위를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4년 자유유럽방송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부쿠레슈티 화학부 학장 코스틴 네니체스쿠의 반대로 그곳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고 이아시 대학에서 논문을 제출했으며, 논문 「이소프렌의 입체특이적 중합」은 상당한 과학적 가치가 있어 지금도 인용된다. 실험실 조수와 방직공으로 일했고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는 이력 때문에 1967년 논문의 실제 작성자는 익명으로 남았고, 오지아스 솔로몬이 이끄는 화학자 집단을 가리키는 정황 증거가 제기됐다. 그녀는 다수 특허의 공동 발명자로 등재됐지만 많은 과학자가 특허의 공로를 나누도록 강요당했다고 주장했고, 1990년에는 루마니아 과학자들이 그녀의 과학 이력을 규탄하며 학위 취소를 추진했다. 영국 국립화학연구소 회원 자격은 1989년 혁명기에 취소됐지만, 그녀 이름의 특허는 유럽특허청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