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지 페렌츠

Nagy Ferenc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망명기 정치: 「소련 식민주의」와 1955년 반둥

망명 뒤 너지 페렌츠는 강연과 저술, 망명 단체 활동으로 반공 선전에 나섰다. 그는 유럽 피압박 민족 회의와 이민족 위원회 등 반공 망명 기구에서 활동했고, 컬럼비아 대학 기록물로 남은 문서철에는 미국 정부와 접촉하며 아시아를 순회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가장 야심적인 작업은 1955년 반둥 회의를 겨냥한 활동이었다. 그는 동유럽을 탈식민화의 틀 안에 끌어들이려 했고, 「소련 식민주의」라는 개념을 내걸고 회의 참가국 대표들을 상대했다. 1954년 일본과 인도 순회를 거쳐 1955년에는 필리핀·일본·인도·파키스탄·홍콩·타이·버마·실론을 도는 3개월 일정을 짰고, 파키스탄 카라치에 오래 머물며 서쪽에서 반둥으로 향하는 대표단을 만났다.

그는 반둥 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보다 회의장 밖에서 여론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실론 총리 존 코텔라왈라에게 보낸 편지와 전보에서 그는 서방이 아시아에서 6억 명을 해방시키는 동안 소련이 유럽에서 1억 명을 억압했다는 논리를 폈고, 국제 감독 아래 자유선거로 「소련 식민지」의 자유를 회복하자고 제안했다. 회의 최종 선언은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를 규탄했고, 미국과 소련은 회의에 초대되지 않았다.

이 활동은 냉전 외교의 도구였던 동시에 개인적 귀환이라는 목적도 띠었다.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귀국을 시도했으나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이유로 국경 통과를 막았다. 1962년 유럽 피압박 민족 회의의 세계 캠페인 아래 다시 아시아를 순회했고, 미국에서 4백 회 가까운 강연을 했다. 다만 그의 선전 활동이 동유럽 문제를 국제 의제로 끌어올린 성과와, 그것이 미국 냉전 선전에 이용된 측면은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