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미소
재진입 돌입, 캡슐 밖은 3천 도의 플라스마에 휩싸이고 10G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가가린은 그 안에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 쇼스타코비치의 「조국은 듣는다, 조국은 안다」. 후일 회고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내내 그 노래를 불렀다.」
집단농장 목수의 아들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파예할리!(갑시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두 진영이 함께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우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훈련하다 1968년 미그기 추락으로 죽었다. 서른네 살이었다.
경력 연표
- 1955–57공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12보스토크 1호: 인류 첫 우주비행 108분
- 1961–67세계 순방, 우주비행사 훈련 부책임자
- 1968.3미그-15 훈련비행 중 추락
관련 역사 사건
1961년 4월 12일, 「포예할리!」
유리 가가린은 1934년 스몰렌스크주의 농촌 마을 클루시노에서 콜호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1년 가을 마을은 나치군에 점령됐고, 가족은 집에서 쫓겨나 뒤뜰의 토굴에서 겨울을 났으며, 형과 누나는 강제노동에 끌려갔다. 해방 뒤 소년은 소비에트 교육 체계가 놓아 준 사다리를 하나씩 밟았다. 류베르치의 직업학교에서 주물공 자격을 땄고, 사라토프의 공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며 지역 항공클럽에서 처음 조종간을 잡았다. 이어 오렌부르크 군사비행학교를 거쳐 북극권의 해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1960년 그는 최초의 우주비행사 선발대에 뽑혔다. 그리고 1961년 4월 12일 아침, 바이코누르 발사대의 보스토크 1호 안에서 로켓이 점화되는 순간, 그는 무전에 특유의 활달한 한마디를 남겼다. 「포예할리!(갑시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은 108분간 지구를 한 바퀴 돌았고, 가가린은 계획대로 캡슐에서 사출되어 사라토프 근교 스멜롭카 마을의 밭에 낙하산으로 내려섰다. 처음 그를 맞은 것은 감자밭의 한 여성과 아이였다.
주물공 출신의 스물일곱 살 청년이 인류의 첫 우주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점령지의 토굴에서 자란 농민의 아들에게 기술학교와 항공클럽, 군사학교의 문을 차례로 열어 준 것은 소비에트 체제의 교육과 상승의 경로였고, 소련은 가가린을 바로 그 가능성의 증거로 세계에 내보였다.
1961년 7월, 맨체스터의 빗속에서
비행 직후 가가린은 「평화의 사절」로 세계를 돌았다. 순방은 냉전의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1961년 7월 그는 영국 주물노동자합동노조(AUFW)의 초청으로 맨체스터를 찾았다. 주물공 출신 우주인을 동료로 맞겠다는 노조의 초청이었다. 그날 맨체스터에는 비가 쏟아졌지만 가가린은 오픈카의 지붕을 닫지 않았다. 나를 보러 빗속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젖는데 나만 마를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조는 그에게 명예 조합원 메달을 걸어 주었고, 그는 트래퍼드 파크의 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자신도 용해로 앞에서 일을 배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해 여름 아바나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그를 껴안고 신생 혁명 쿠바의 훈장을 수여했다. 맨체스터의 산업노동자와 아바나의 혁명 군중이 같은 사람을 같은 마음으로 환영한 것이다. 체제 경쟁의 한복판에서 가가린의 미소는 이념의 경계를 넘는 드문 통화였고, 소련으로서는 사회주의가 길러 낸 인간형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대사였다. 그는 수십 개 나라를 돌며 왕과 대통령, 부두 노동자와 학생 들을 똑같은 태도로 만났다.
이후 그는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의 지도부에서 일했고, 1967년 소유스 1호의 예비 조종사로서 동료 코마로프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1968년 3월 27일, 비행 자격 회복을 위한 훈련 비행 중 그가 탄 미그-15UTI가 블라디미르주 노보숄로보 인근에 추락해 교관 블라디미르 세료긴과 함께 사망했다. 나이 서른넷이었다. 소련 전역이 애도했고,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됐다. 고향 마을 클루시노가 속한 도시는 이제 가가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