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경력 연표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관련 역사 사건
1942년, 전선에서 쓴 편지
1941년 가을, 플료로프는 레닌그라드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물리학자라는 이유로 곧바로 요시카르올라의 공군기술학교로 보내져 항공기 탑재장비 정비를 배웠고, 1942년 초에는 남서전선 제90독립정찰비행대대에서 복무 중이었다. 보로네시에 주둔하던 그는 대학 도서관에서 피난 가지 못한 외국 물리학 저널들을 뒤졌다. 자신과 페트르자크가 1940년 발견한 우라늄 자발 핵분열에 대한 서방의 반응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저널 어디에도 핵분열 관련 논문은 실려 있지 않았다. 페르미도, 실라르도도, 졸리오퀴리도 침묵하고 있었다. 플료로프는 즉시 알아챘다: 서방이 핵물리학 연구를 완전히 비밀로 분류했다는 것은, 그들이 원자폭탄을 진지하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1941년 12월, 그는 카잔으로 소개된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학자들 앞에서 세미나를 열어 우라늄 연구 재개를 호소했지만 묵살당했다. 이에 1942년 4월, 플료로프는 직접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서방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 경우 "그 결과는 너무나 거대해서, 우리가 여기에서 이 작업을 포기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따질 시간조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편지가 실제로 스탈린의 책상에 올랐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플료로프의 경고와 정보기관의 첩보가 겹치면서 1942년 9월 국방위원회는 제2연구소(훗날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설립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을 공식 재가동했다. 플료로프는 1942년 8월 전역 조치되어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연구팀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