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나우모비치 보이틴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Войтинский
소련 러시아 1893–1953 ○ 자연사

중국 공산당 창당을 산파한 코민테른 첫 중국 특사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와 당 건설 문제를 논의하며 "중국의 신사조 운동은 분분하지만 아니키즘, 생디칼리즘, 사회민주주의, 길드 사회주의가 난립해 주류가 없고, 글 쓰고 공론만 할 뿐 실천이 전혀 없다. 이래서는 중국 혁명을 추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민테른의 첫 중국 대표로 1920년 리다자오·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했다. 소환 후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중국학의 창시자로 활동했다.

경력 연표

중국 공산당 창당의 산파

1920년, 시베리아에 코민테른 극동국이 설치된 직후 보이틴스키는 27세의 나이에 첫 중국 대표로 파견되었다. 기자 신분(중국명 우팅캉)으로 베이징에 도착해 리다자오와 접촉했고, 리다자오의 소개로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났다. 그는 러시아어 신문 『상하이 크로니클』의 편집실에 동아시아 사무국을 설치하고 이를 혁명 활동의 은폐지로 삼았다. 상하이에서 보이틴스키는 1920년 8월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을 지원했고, 『공산당 선언』 중역본 출판 자금을 댔으며, 11월에는 천두슈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월간지 『공산당』을 창간했다. 보이틴스키는 1921년 1월 중국을 떠났고, 그해 7월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공산당이 공식 출범했다. 그의 역할을 둘러싸고는 소비에트 혁명 수출의 산물인지 중국 혁명가들의 자생적 결실인지를 놓고 역사학계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이 문제가 '사소해 보이지만 중국 공산당 창당의 본질을 가르는 핵심 쟁점'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에트 중국학의 창시자

1927년 코민테른에서 소환된 후 보이틴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중국학이라는 독자적 학문 분야의 기초를 닦았다. 1929년부터 동양학 연구 기관들에서 활동하며 중국 정치·경제에 관한 실증적 분석을 마르크스-레닌주의 틀 안에서 체계화했다. 1934년 모스크바국립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35년에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정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특별 대표로 참석했으며, 태평양 문제 학술지 『티히 오케안』에 일본의 대중국 공세와 제국주의 진영 내부 모순을 분석한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시안 사변을 계기로 중국의 반일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분석한 글을 발표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중국 공산당의 민주주의 투쟁과 중소 관계에 관한 저술을 이어갔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 현대사 강의(1919–1924)』, 『일본과 중국, 1931–1937』, 『중국에서 민족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중국 공산당』(1950) 등이 있다. 보이틴스키는 현장에서 쌓은 중국 혁명 경험을 소비에트 학계의 제도화된 중국 연구로 전환시킨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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