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우 후사크

Gustáv Husák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3–1991 ○ 실각 후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두브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재판과 수감 (1950–1963)

후사크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은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희생양이 된 10년이었다.

1948년 공산 쿠데타 이후 후사크는 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으로서 민주당 해체와 가톨릭 교회 탄압을 주도하며 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적 숙청의 물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휩쓸자, 그 역시 표적이 되었다. 전후 슬로바키아의 연방화와 민족적 이해를 주장했던 그의 행적은 국가보안부(ŠtB)에 의해 '분리주의'이자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재해석되었다. 1950년 4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맹렬한 비판을 받고 모든 당직과 국가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1951년 2월 체포되었다.

기소는 3년간의 조사 끝에 이루어졌다. 후사크와 공동 피고인인 시인 라디슬라프 노보메스키, 다니엘 오칼리, 이반 호르바트, 라디슬라프 홀도시는 루돌프 슬란스키 재판(1952년)의 '후속 재판'으로 1954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되었다. 후사크는 공개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지는 체코슬로바키아 최악의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은 레오폴도프 교도소였다. 그곳에서 후사크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시 슬로바키아 파시스트 정권의 내무장관 알렉산데르 마흐 등 자신이 투쟁했던 파시스트 정권 인사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가 "백발에 치아가 거의 없는" 모습으로 출소했다고 기록한다. 1960년 안토닌 노보트니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완전한 복권은 아니었다. 이후 3년간 사면된 범죄자 신분으로 살았다. 노보트니는 측근들에게 후사크를 복권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권력을 잡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1963년 탈스탈린화의 일환으로 유죄 판결이 공식적으로 뒤집히고 당적이 회복되었다. 후사크는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조용히 복귀했으며, 1950년대 숙청의 순교자이자 슬로바키아 민족 이해의 수호자라는 후광을 쌓기 시작했다. 억압의 피해자가 불과 6년 뒤 당 총서기가 되어 자신이 겪었던 것과 성격은 다르나 규모는 더 큰 또 다른 숙청을 주도하게 된 것은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씁쓸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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