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반파시즘의 상징이었지만 토지의 질서는 건드리지 않은 마지막 황제
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다른 이름: 라스 타파리 마콘넨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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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74
에티오피아 국가기관황제대표
군주·왕실
경력 연표
- 1916섭정 겸 황태자, 사실상의 실권자
- 1917레울-라스(공작) 서임
- 1928네구스(왕) 즉위
- 1930황제(만민의 왕) 대관
- 1936–1941이탈리아 점령기에 영국으로 망명
- 1941귀환, 제정 복원
- 1963아프리카통일기구(OAU) 창설 주재, 초대 의장
- 19749월 데르그에 폐위
관련 역사 사건
범아프리카 외교와 아프리카통일기구 창설
1960년대 초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독립 국면에서 반식민 외교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1960년 12월 황실 근위대가 그가 브라질 방문 중일 때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정규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사건은 그가 개혁을 서두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서방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비동맹 진영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3년 그는 상반된 두 진영을 아디스아바바로 초청해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창설을 주재했다. 은크루마가 이끄는 카사블랑카 그룹은 아프리카 전체의 연방, 곧 정치적 통합을 요구했고, 상고르가 이끄는 몬로비아 그룹은 경제 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합을 주장했다. 셀라시에는 두 그룹을 중재해 32개 독립국의 헌장 서명을 이끌어냈고, 본부를 아디스아바바에 두고 초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중재는 아프리카 민족 해방의 통일 전선을 세웠다는 평가와 함께, 급진적 통합을 요구하던 반제 세력의 요구를 제도적 협의체로 흡수했다는 평가를 함께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