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강대국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연대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1–1960 정치·당 지도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경력 연표
- 1925–1930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 1930–1940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판사
- 1941–1949검찰총장 겸 외무장관
- 1948–1949유엔 총회 의장
- 1951–1960노동당 대표·야당 지도자
- 1960–1962뉴사우스웨일스 대법원장
관련 역사 사건
1934~1935년 에곤 키슈 사건 판결
고등법원 판사 재직 시기(1930~1940)에 에바트는 1934~1935년 에곤 키슈 추방 시도 사건의 판결로 두 차례 정부 조치를 무효화했다. 프라하 출신 언론인이자 반전 활동가였고 독일 공산당 당적을 부인했던 키슈는 1934년 11월 6일 프리맨틀에 도착했으나, 라이언스 정부가 그를 '입국 부적격자'로 선언하면서 스트래스테어드호가 애들레이드와 멜버른을 거쳐 시드니로 향하는 동안 선장의 감시 아래 억류되었다. 11월 12일 멜버른에서 지지자들이 인신보호 신청을 제기했지만 그곳 법원은 결정을 미뤘고 키슈는 배에 남았다. 배가 11월 16일 시드니에 도착하자 키슈의 지지자들은 그의 사건을 단독으로 심리한 에바트에게 가져갔고, 에바트는 정부가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조언을 추방 명령에 기재하지 않은 하자를 들어 그를 석방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법을 존중하는 조건으로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고 명령했다.
정부는 1905년 개정 이민제한법의 받아쓰기 시험 조항으로 다시 그를 배제하려 했고, 키슈는 스코틀랜드 게일어 시험에 실패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34년 12월 19일 고등법원 전원부는 게일어가 법에서 말하는 '유럽 언어'가 아니라고 판단해 유죄를 파기했다. 1935년 1월 21일 정부가 새 선언으로 다시 유죄를 얻어내자, 에바트는 이미 입국한 사람에 대해서는 장관에게 이민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키슈를 석방하고 3월 전원부 심리를 예고했다. 이 일련의 판결은 백호주의의 주요 배제 수단이던 받아쓰기 시험의 법적 근거를 드러냈고, 정부는 결국 형을 면제하고 소송을 취하한 뒤 450호주파운드의 비용을 지불하고 1935년 3월 11일 출국에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