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북방 구상과 남방 팽창 사이에서 제국을 전쟁으로 이끈 군인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철군 요구를 ‘심장’이라 부르며 양보를 항복으로 규정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육군 참모 요직과 통제파의 국방국가론 (1934~1941)

1934년 소장으로 승진해 육군성 인사국장이 된 도조는 그해 3월 육군성이 펴낸 《비상시국민전집》에 글을 실어 전 국민을 전쟁에 동원할 '국방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현대적 국방전은 정치·사회·경제의 모든 영역을 일원적으로 통제하는 국가를 요구하며, 일본은 1919년 이래 영국·프랑스·미국이 일본에 '이념전'을 벌여 왔다는 논리였다. 1935년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 관동군 참모장을 지내며 만주국 실질 통치와 화북 침투를 담당했고, 루거우차오 사건 뒤에는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해 중일전쟁 확대를 유도했다. 국방국가 구상은 1920년대 독일군의 전시 국가론을 일본 육군이 받아들인 것으로, 1936년 2·26 사건 진압 후 황도파가 축출되면서 통제파가 육군을 통일했다.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삼국 동맹을 밀어붙이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을 관철했으며, 1941년 10월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한 미국과의 교섭이 막히자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리고 총리에 올랐다.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12월 초를 교섭 시한으로 정한 뒤, 11월 27일 각의에서 미국의 헐 노트를 시한 없는 잠정안이었는데도 '최후통첩'으로 보고했고, 12월 1일 어전회의가 미국·영국·네덜란드와의 개전을 결정했다. 도조 자신은 훗날 '사실상 독재자'였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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