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裕仁
일본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일본 일본 1901–1989 ○ 자연사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범 면책과 전쟁 책임 논쟁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히로히토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은 그의 이름으로 수행되었지만,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협조적인 천황이 점령 통치를 원활하게 하고 미국의 전후 목표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황실을 기소할 수 있는 증거는 재판에서 배제되었고, 일본 궁정과 정부 고관들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함께 전범 명단을 작성하면서 피고인들이 히로히토를 언급하지 않도록 증언을 조율했다. 진주만 공격의 최종 책임을 도조 히데키에게 돌리는 작업은 재판이 열리기 몇 달 전부터 진행되었다.

면책은 일본 안팎의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 여론의 다수는 히로히토를 A급 전범으로 기소하기를 원했다. 1945년 9월 미국 상원에는 그를 전쟁범죄자로 기소하라는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에 반한 죄 혐의까지 담은 명단에 그를 올렸다. 일본 안에서도 황족들이 퇴위를 권했으며, 1946년 2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는 추밀원에서 간접적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 히로히토는 퇴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47년 10월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는 천황과 재벌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고 공식 천명했다.

1946년 1월 히로히토는 인간선언을 발표해 자신이 현인신이 아님을 선언했고, 1947년 시행된 새 헌법은 그를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해 정치적 실권을 없앴다. 그러나 면책의 방식은 오래가는 결과를 남겼다. 허버트 빅스는 맥아더의 조치가 일본인들의 패전 이해를 왜곡했다고 평가했고, 1975년 히로시마 원폭에 대해 히로히토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불러 1976년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그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거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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