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주만을 설계한 제독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날뛰겠지만, 2년째와 3년째에는 전혀 자신이 없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자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일찍 파악한 전략가였다.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우위를 직접 관찰해 장기전의 승산을 낮게 보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일본의 우세를 단기간에 확보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진주만 공격을 밀어붙여 남방 자원 공세의 시간을 벌려 했고, 그 선택은 전술적 성공과 미국의 전면 참전을 함께 낳았다. 1942년 미드웨이 패배 뒤에도 전쟁을 지휘하다 1943년 미군의 요격으로 전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삼국 동맹 반대와 암살 위협, 1936~1941

야마모토는 해군 내부에서 육군의 대륙 팽창 노선과 자주 충돌했다. 그는 함대를 침략 부대 수송 수단이 아니라 무력 시위로 힘을 투사하는 수단으로 보았고, 그런 입장에서 중국 침략과 미국과의 전쟁 모두에 반대했다. 하버드 유학(1919~1921)과 워싱턴 주재 무관 근무를 거치며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문제를 직접 관찰한 경험이 이 판단의 바탕이었다. 1936년 해군 차관에 임명된 그는 1940년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에도 반대했다.

이 노선은 그를 국내 정치에서 위험한 인물로 만들었다. 1938년 무렵 젊은 육해군 장교들이 삼국 동맹에 반대하는 야마모토와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그는 일본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협박 편지와 살해 위협을 계속 받았다. 육군은 그를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헌병을 붙여 감시했고, 1939년 8월 30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은 그를 해상 근무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옮겼다. 요나이는 그가 육상에 남아 있으면 그해 안에 암살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인사는 그를 보호하는 동시에 진주만으로 이어지는 자리로 밀어 넣었다. 1941년 10월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었을 때 많은 관측자는 야마모토의 경력이 끝났다고 보았으나, 함대 내에서의 압도적 인기와 황실과의 가까운 관계 덕분에 그는 사령장관 자리를 지켰다. 결국 삼국 동맹과 대미 개전을 둘러싼 갈등에서 그는 패배했고, 자신이 승산이 낮다고 본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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