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파블로비치 바르딘

Иван Павлович Бардин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3–1960 ○ 심장마비

쿠즈네츠크를 세운 소련 제철의 아버지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산소 취련과 연속주조: 전후 제철 기술의 재편

바르딘은 쿠즈네츠크 건설을 진두지휘한 뒤 제철 기술 정책의 중심으로 옮겨 간다. 1936년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있으면서 압연 연구실을 찾아, 처음으로 무주괴(슬래브 없는 직접 압연) 방식으로 뽑아낸 띠강 표본을 보고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38년 철강공업총국 수석 엔지니어로서 연구실을 철강 부문으로 옮기는 정부 건의를 뒷받침했고, 1939년 철강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수정된 기술설계를 승인했다. 이렇게 키운 조직이 1944년 4월 27일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창설된 중앙철강금속연구소(TSNIIchermet)이며, 바르딘은 1944년부터 1960년까지 이 연구소를 이끌었고 연구소는 1960년 그의 이름을 얻었다.

전후에는 산소를 제철 공정에 끌어들이는 문제를 밀어붙였다. 1946년 「용광로 생산에서 산소 이용의 전망」, 1955년 「산소와 무주괴 압연을 제철에 도입하는 데 대하여」를 발표했고, 산소에 의한 평로 공정 강화 기술을 개발해 산업에 적용한 공로로 1949년 스탈린상 1급을, 산업용 연속주조 설비를 처음 세운 공로로 1958년 레닌상을 받았다. 연구소장으로서의 조직 사업과 함께 1943년부터 스탈린 이름의 모스크바 철강연구소(MIS)에서 강의했고 1960년까지 야금생산 경제·조직 교수직을 맡았으며, 1940~1946년에는 체레포베츠 제철소 건설 설계를 맡은 과학자 집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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