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경력 연표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관련 역사 사건
쿠레니우카 참사 조사위원장 (1961년)
1961년 3월 13일, 키이우의 바비 야르 계곡에 쌓인 벽돌 공장 폐기물 댐이 폭우로 붕괴하면서 진흙과 슬러리가 쿠레니우카 주거지를 덮쳤다. 공식 발표된 사망자는 145명이었으나, 후대 연구자들은 실제 희생자가 1,500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소련 당국은 재난 소식을 은폐하고 키이우의 시외 통신을 차단했으며, 희생자들을 여러 묘지에 분산 매장하고 사망 일자와 원인을 조작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였던 카자네츠는 이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는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위원회는 공식 보고서에서 댐 설계 오류와 건설 결함을 사고 원인으로 지목했고, 비공개 재판을 통해 모스크바 설계자 2명과 키이우 건설 관리자 4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이후 바비 야르에 새로운 콘크리트 댐을 건설하고 배수 시스템을 전면 재정비했다.
이 임무는 카자네츠가 철강 산업 전문가에서 국가적 재난 대응을 책임지는 고위 당 간부로 기능했던 이력을 보여준다. 한편 이 참사는 바비 야르의 홀로코스트 유해 위에 공업 폐기물을 쌓아 올린 소련 당국의 무책임이 초래한 비극으로, 쿠즈네초프의 소설 《바비 야르》에서 '역사에 대한 보복'으로 형상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