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
관련 역사 사건
민간 부문과 원로 중재자 (1993–2006)
1992년 대선에서 부시가 클린턴에게 패배한 뒤 베이커는 12년의 정부 경력을 마감하고 변호사 사무소 베이커봇츠의 선임 파트너로 복귀하는 한편, 칼라일 그룹과 엔론 같은 사기업에도 잇달아 합류했다. 백악관을 떠난 지 한 달 안에 엔론의 컨설턴트가 되었고, 1993년 초에는 칼라일 그룹에도 들어갔다. 걸프전 당시의 정부 경력을 사업 기회로 전환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는데, 1993년 시모어 허시의 보도는 쿠웨이트 재건 사업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문제 삼았고, 2004년에는 칼라일의 쿠웨이트 투자 유치와 그가 맡은 이라크 채무 특사 역할이 겹친다는 지적이 나왔다. 베이커 본인은 투자자들에게 직접 자금을 요청한 적이 없고 정부 경험에 관한 강연만 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는 민간 부문에 머무르지 않았다. 1997년 3월 유엔 사무총장의 서사하라 특사로 임명되어 모로코 정부와 폴리사리오 전선 사이의 협상을 중재했고, 2004년 6월 완전한 해결에 이르지 못한 데 대한 좌절 속에서 사임했다. 그가 남긴 이른바 베이커 II 계획은 폴리사리오 측이 협상 기반으로 수용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지지했지만 모로코가 거부했다.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 재검표 분쟁에서는 조지 W. 부시 진영의 법률 대응팀을 이끌었다. 그는 이 분쟁을 영합(零合)적 정치 투쟁으로 다루어, 양자 공동조사를 협상하려던 앨 고어 진영의 워런 크리스토퍼와 충돌했다. 이때 그는 상원의원 시절 베이커를 포함한 원로들을 기용하지 않으려 했던 조지 W. 부시 캠프에서 다시 소환된 인물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06년에는 의회가 구성한 이라크 연구그룹의 공동의장을 맡아 이라크 전쟁의 향방에 대한 권고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