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빅토르 마리 모로

Jean Victor Marie Moreau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763–1813 ✕ 드레스덴에서 치명상, 사망

프랑스 혁명전쟁의 장군, 호엔린덴의 승리자

1800년 12월 3일 라인 방면군을 이끌고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바이에른군을 격파했다. 동맹군의 패주로 휴전이 성립하고 뤼네빌 조약으로 이어져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사실상 끝났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장군으로, 라인·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고 1800년 호엔린덴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무너뜨렸다. 이후 나폴레옹의 정적이 되어 추방되었고, 1813년 대프랑스 동맹군의 고문으로 유럽에 돌아와 드레스덴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미국 망명과 대프랑스 동맹군 복귀 (1805~1813)

1804년 2월 체포되어 그해 6월 재판에서 처음에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재심 끝에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나폴레옹이 그 형을 유배형으로 바꾸었다. 모로는 스페인에 오래 머문 뒤 180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프랑스 사료는 그가 필라델피아에 상륙해 환영을 받았고 당시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전하며, 영문 사료는 1805년 8월 뉴욕에 도착했다고 기록해 상륙 항구에 차이가 있다. 그는 미국이 제안한 모든 군사 직책을 거절하고 1806년 델라웨어강 연안 펜실베이니아 모리스빌에 정착해 로버트 모리스가 소유했던 저택을 사들였으며, 1813년까지 낚시와 사냥, 사교로 시간을 보냈다. 망명지였던 그의 집은 각국 정치 망명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그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을 여러 차례 만났다. 1808년에는 유일한 아들 빅토르 외젠(1802~1808)을 미국에서 잃었다.

열강은 그를 나폴레옹에 맞설 칼로 쓰려 했다. 1806년부터 러시아 정부는 팔렌과 그 후임 다슈코프를 미국에 보내 비밀 교섭을 벌였고, 1812년 9월 30일 알렉산드르 1세는 다슈코프에게 공식 제안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12년 전쟁이 터지자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이 미군 지휘권을 제안했고 모로는 이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1812년 11월 러시아 원정에서 대육군이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813년 6월 25일 그는 상선 «한니발»호를 타고 P. 스비닌과 함께 미국을 떠났고, 7월 27일 스웨덴에 상륙했다. 베르나도트의 소개로 알렉산드르 1세를 만난 그는 평화로운 유럽에 공화정을 세우겠다는 희망을 품고 동맹군에 전쟁 수행을 조언했으며, 동맹 군주들의 대본영에서 고문으로 있었다.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알렉산드르와 대화하던 중 프랑스 포탄에 맞아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9월 2일 보헤미아 라운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