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9–1949 ○ 자연사

만주 침략을 설계한 이론가

“기름이 필요하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있는가.”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예비역 이후: 전시 반대와 전후의 전향

1941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된 뒤 이시와라 간지는 교육과 집필, 강연 활동으로 방향을 돌렸다. 같은 해 4월에는 새로 설치된 리쓰메이칸대학의 국방학 강좌 강사로 초빙되어 국방학 연구소 소장을 겸했고, 국방론과 전쟁사, 국방경제론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이 강좌의 취지는 국방이 군인만의 것이라는 낡은 관념을 청산하고 일반 국민이 국방 지식을 갖추도록 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 측의 감시가 헌병을 통해 이루어져 강의 내용은 물론 자택 방문객까지 헌병대 본부에 보고되었고, 헌병과 특고경찰의 압력이 거세지자 사직하고 후임에게 강의를 넘긴 뒤 귀향했다. 강의를 정리한 책은 1942년에 나왔다.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기름을 얻으려고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가 있느냐는 취지로 반대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다르카날 전투 무렵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요청에 응해 섬에서 철수하고 솔로몬·비스마르크·뉴기니를 포기하며 사이판·티니안·괌을 요새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중국인에 대한 전면적 사죄와 중화민국으로부터의 즉시 철병을 주장하며 동아연맹협회의 미우빈을 통해 강화의 길을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이 무렵 동아연맹 사상에 이끌린 청년 장교들이 도조 암살을 모의했고, 이시와라는 그 계획에 찬성했다가 함정에 빠졌다.

전후 그는 정치와 군사의 일선에 나서지 않고 야마가타현 쇼나이의 니시야마 농장에서 동지들과 공동생활을 했다. 농장에서는 도시 해체, 농공 일체, 간소한 생활이라는 세 가지 원칙이 내걸렸고, 1947년에는 공동체 운영 규칙인 이른바 마을 만들기 헌법이 제정되었다. 전전에 주장했던 대미 최종 결전론은 수정되어, 일본이 헌법 제9조를 무기 삼아 미국과 소련 사이의 다툼을 막고 최종전쟁 없이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모두 높이 평가하며 어느 쪽이 중국을 지배하든 이들과 제휴해야 한다는 대아시아주의적 입장은 유지했다.

1946년에는 전범 최종 명단에서 빠졌으나, 그 제외가 책임 문제를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47년 5월 사카타로 특설된 극동국제군사재판 출장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만주사변은 중국군의 폭거에 대한 관동군 사령관 명령에 따른 자위 행동이라는 주장을 폈다. 1948년 1월에는 군국주의자로 지목되어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1949년 봄부터 폐렴과 방광암 등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5일 니시야마 농장에서 6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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