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74–1988 정치·당 지도 · 소련
경력 연표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14년과 1988년의 해임
데미르찬은 1974년 11월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되어 사실상 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2년 뒤에는 아르메니아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겸했다. 1988년 5월 해임될 때까지 14년간 재임했으며, 이 기간 아르메니아는 소련 기준으로는 번영한 공화국이었다.
재임 중 가동에 들어간 대표적 시설로는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 예레반 지하철, 스포츠·콘서트 단지 등이 있다. 아르메니아어 자료는 여기에 예레반의 즈바르트노츠 공항과 규므리의 시라크 공항, 국경 지역 공항들, 아르파-세반 수도로, 흐라즈단마시·포지스토르·임풀스·마르스 등 공장들, 마시스-누르누스 및 아그스타파-이제반-흐라즈단-세반-마르투니 철도 노선을 더한다. 1980년에는 바쿠-나히체반을 잇는 이른바 '우정' 고속도로의 아르메니아 구간인 메그리-뉴바디 건설을 저지하고 대신 메그리-카자란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고리스-스테파나케르트 텔레비전 중계소도 세웠다.
이 시기 지도부의 결정으로 평가되는 두 가지가 있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아르메니아 최고 지도부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규탄했고, 1978년 새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규정한 조항을 다시 확인시켰다. 집단학살 규탄을 '최초'로 기록하는 서술은 각 언어판의 표현 차이를 반영하므로, 최고위급 차원의 첫 공식 규탄이라는 한정된 의미로 읽어야 한다.
해임의 경위는 소련 후기 민족문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1988년 아르메니아에서 카라바흐 운동이 시작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데미르찬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직무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영어판은 그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귀속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를 진압하지 못했고 오히려 시위대의 편에 섰으며, 그 결과 모스크바 지도부의 지지를 잃고 1988년 5월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고 서술한다. 공식 명분과 실제 갈등 원인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셈이며, 이 점이 이 해임을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라 공화국 지도부와 연방 중앙 사이의 정치적 충돌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