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를 말했지만 제국의 전쟁을 넓힌 귀족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전쟁을 자신할 수 없다며 외교를 택할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귀족 정치가이자 제국의 전시 동원을 이끈 총리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적 인종평등론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을 추진했다. 1940년 삼국동맹과 대정익찬회를 주도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확장 노선을 꺾지 못했고, 1941년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될 예정이던 그는 1945년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7–1941 정부·행정 · 일본 국가기관
경력 연표
- 1916귀족원 의원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33–1937귀족원 의장
- 1937–1939제1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제2·3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대정익찬회 총재
- 1945동구궁 내각 국무대신
관련 역사 사건
종전을 향한 만년의 평화 공작
1941년 10월 정권을 넘긴 뒤에도 고노에는 태평양 전쟁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9일 전직 총리들이 참석한 궁중 오찬에서 그는 개전에 반대했고,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듣고는 "싸구려 패전이 다가온다, 두세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1944년 사이판 전투 패배로 도조 내각이 무너지는 데에도 관여했으며, 1945년 2월에는 3년여 만에 천황을 알현하여 종전 교섭 개시를 건의했으나, 여전히 결정적 승리를 바라던 천황은 이를 물리쳤다.
같은 해 2월 14일 그는 "고노에 상주문"을 올려 연합국에 항복하여 일본 내 "공산 혁명"을 막을 것을 주장했다. 소련의 팽창, 정부 내 친소 인사, 일본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를 언급하며 반공 논리로 종전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전시 내각에서 민간인·중신 그룹과 접촉하며 독자적 종전 공작을 벌이던 그는, 소련을 중개자로 한 평화 협상을 구상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뒤 정부는 모스크바 중재를 기대했고, 천황도 7월 7일 특사를 보내라고 말했다. 7월 12일 고노에는 천황의 대소 특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미 2월 얄타 회담에서 대일 참전을 약속한 소련으로부터 사실상 거절당했다. 그의 교섭안은 국체 유지 한 가지를 최소 조건으로 삼고 모든 해외 영토와 류큐·오가사와라·북쿠릴을 포기하며 노동력 제공까지 용인하는 내용이었다. 8월 15일 항복 후에는 동구궁 내각에 국무대신으로 입각했지만 전범 혐의가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