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2–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
관련 역사 사건
1989년 트빌리시 진압 작전과 책임
1989년 4월 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는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가 요청한 내무부·국방부 병력 증원을 승인했다. 다음 날 트빌리시의 공화국 당국자와 치안·군 지휘관들이 회의를 열었고, 모스크바에서 온 국방차관 콘스탄틴 코체토프도 참석했다. BBC가 전한 공식 설명에 따르면, 회의에서 시위대 해산 방침이 정해졌지만 작전 지휘는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이고리 로디오노프에게 맡겨졌다. 결정 과정은 회의록이나 서면 명령으로 남지 않아, 뒤이은 의회 조사에서도 참석자와 결정 경위를 재구성하기 어려웠다.
4월 9일 새벽 군은 정부청사 앞 루스타벨리 대로의 시위대를 해산했다. 의회 조사위원회 보고서의 재구성에 따르면 병력은 새벽 3시 30분까지 레닌 광장에 집결했고, 4시 5분 장갑차 네 대를 앞세워 시위대를 밀어냈다. 퇴로가 막혀 군중이 압박되는 상황에서 고무 곤봉과 독성 물질이 지침을 심각하게 위반해 사용됐고, 소형 보병삽도 동원됐다. 이 보도는 위원회가 작전 책임자를 로디오노프라고 명시한 한편, 코체토프가 해산 결정 회의에 참여한 사실을 전한다. 따라서 코체토프의 역할은 상급 국방 당국자로서 결정 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한정해 서술할 수 있으며, 현장 작전 지휘를 그에게 귀속해서는 안 된다.
제1차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사건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아나톨리 솝차크가 이끈 24명 위원회는 당·군 지휘관, 목격자, 의료진과 군인들을 조사하고 군·국가보안위원회·당 문서를 검토했다. 위원회는 1989년 12월 대회에 제출한 보고에서 무력 사용은 과도했고 정치적 해결 수단이 소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공개 조사는 군의 진압과 결정 절차를 의회 차원의 검토 대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