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4–1972 정치·당 지도 · 이탈리아 공산당
경력 연표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PCI 창당 참여
- 1936–1939국제여단 총감독 (스페인 내전), 별명 '갈로'
- 1943–1945가리발디 여단 총사령관, CVL 부사령관
- 1945–1964PCI 부서기
- 1947.09코민포름 창립 회의 PCI 대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 1964–1972PCI 사무총장
- 1972–1980PCI 명예 의장
관련 역사 사건
- 1934–1939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환국제여단 총감독「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을 감독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국제여단 총감독1936~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자아비판을 강요받은 이탈리아 대표슈클라르스카 포렘바 회의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이탈리아 공산당(PCI) 대표로 참석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처럼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다.
- 1968프라하의 봄프라하의 봄을 지지한 PCI 사무총장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두목이 아니라 서기’: 대중 투쟁 노선과 《비에 누오베》
1943년 8월 베네토테 섬에서 풀려난 뒤 론고는 9월 8일 휴전을 계기로 피에트로 세키아, 잔 카를로 파예타, 조르조 아멘돌라 등과 함께 가리발디 여단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이후 자유의용군단 부사령관으로 페루초 파리를 보좌했다. 이 시기 그는 마우로 쇼치마로와 달리 폭넓은 실천적 통일 전선을 주장하면서도, 신용을 잃은 바도글리오 정부를 대체할 인민정부가 민족해방위원회(CLN)의 직접적 산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기관지 《라 노스트라 로타》를 통해 공산당 간부 재편성 작업을 밀어붙였다.
1945년 12월 제5차 당대회에서 그는 '노동계급 단일정당' 전망에 관한 보고를 하고 부서기로 선출되었다. 1945년부터 1964년까지 부서기로 있으면서 그는 톨리아티의 정치·의회 중심 노선과 달리 대중의 투쟁과 동원에 더 무게를 두는 입장을 유지해, 친구 세키아와 가까운 정치적 면모를 보였다. 다만 이탈리아 공산당 연구는 그를 모험주의나 극단주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 언제나 톨리아티 전략의 틀 안에 머물렀던 인물로 평가한다. 그는 대중매체·오락·대중문화와 정치적 심화를 결합하려는 잡지 《비에 누오베》를 기획하고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