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4통제파(도세이하) 활동, 황도파 쿠데타 저지
- 1937–1939관동군 작전참모
- 1939.04「국경 방침서」 작성, 할힌골 사건 유발
- 1941참모본부 작전과, 대미 개전 주창
- 1941–1942말레이 공세 입안, 싱가포르 함락, 숙칭 학살
- 1942바탄 죽음의 행진, 과달카날 공세
- 1952중의원 의원 당선(재선)
관련 역사 사건
전후 은신과 미 정보기관 협력, 라오스 실종
1945년 버마에서 일본군 진지가 붕괴하자 쓰지 마사노부는 탈출해 태국으로, 이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에 있던 시절 맺은 인맥을 다시 활용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재점령에 저항하던 베트남도 들렀다. 중국에서는 중국 정보기관의 포로이자 고용인이라는 이중적 처지에 있었다. 1948년 중국 측 근무에서 사임을 허가받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전쟁 체험을 담은 저서와 글을 쏟아냈고, 은신 시절을 기록한 『잠행삼천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5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재선을 거듭했고, 1959년에는 참의원 의원이 되었다.
냉전기 문서는 그가 전후에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2005~2006년 비밀 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에 따르면 쓰지는 냉전기 첩보원으로 미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했으며, 같은 시기 미 정보기관과 협력한 핫토리 다쿠시로와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으로 취급되었다. 문서는 그를 정보 자산으로서 정치와 정보 조작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면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인물로 묘사했다. 문서에는 핫토리와 쓰지가 1952년 정변을 모의했다는 내용도 담겼는데, 쓰지가 사회당이 진짜 적이라고 설득해 이를 막았다는 것이다. 다만 문서는 사후에야 정보를 입수했고 출처도 신뢰할 수 없는 중국 측 출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와세다대학의 아리마 데쓰오 등 일부 연구자는 이 이야기 자체가 쓰지가 자신의 영향력을 부풀리기 위해 흘린 허위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1961년 4월 쓰지는 라오스로 향한 뒤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라오스 내전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한편, 북베트남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CIA 문서는 그가 하노이에서 비엔티안으로 돌아온 뒤 중국 공산당에 납치되어 윈난에 구금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1962년 8월 24일 반입된 봉투 필적 감정을 근거로 1962년 8월 8일 시점에는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소식은 끊겼고, 1968년 7월 20일 실종 선고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