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몬한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 장군
사단이 궤멸하던 1939년 8월 22일, 고마쓰바라는 일기에 "사이다병으로 지근거리 공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고, 장병들은 절망 속에 남겨졌다"고 남겼다.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9–1910러시아 주재 무관보
- 1919–1929육군참모본부 대소 정보 담당 및 모스크바 무관
- 1932–1934만주국 하얼빈 특별기관장
- 1934–1937제8보병여단 및 근위 제1여단 지휘관
- 1937–1939관동군 제23사단장, 육군중장
- 1939–1940할힌골 패전 뒤 관동군 참모, 예편
관련 역사 사건
1939년 5월: 아즈마 부대의 궤멸
고마쓰바라는 1938년 7월 제23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하이라르에 주둔했다. 관동군은 국경분쟁이 격화하자 아르군강을 경계로 하는 소련·만주국 국경을 기점으로 몽골·만주국 국경선 전역에 이르는 광대한 만주 북부(북서부) 국경의 방어를 이 신설 사단에 맡겼는데, 이 사단은 상비 사단에 비해 예비역 소집병과 연장병 위주로 편성되고 장비도 구식이었다. 참모장 오우치 쓰토무 대좌는 고마쓰바라와 마찬가지로 소련 통이었는데, 이런 사단장 아래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1939년 5월 11일경 몽골 기병대가 할하강 동쪽으로 들어오자 양측의 소규모 충돌이 시작되었다. 고마쓰바라는 5월 13일 "외몽고군 약 700명이 불법 월경해 만주군과 교전 중"이라며 사단 일부와 하이라르 만주군으로 적을 섬멸하겠다고 관동군에 전보했고, 관동군은 항공부대와 자동차부대를 파견했다. 관동군은 당시 일본·만주국이 주장하는 국경선 유지에 그치는 불확대 방침이었고, 참모장 오우치도 출동 자제를 지시했다. 그러나 고마쓰바라는 참모장 부재 중에 부대 출격을 강행했고, 관동군과 오우치의 전보를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일기에 남겼다. 그는 포로 심문을 통해 소련군 병력을 병력 500명, 전차 5대, 대전차포 12문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5월 28일 아즈마 요조 중좌의 사단 수색대가 미리 강 건너로 침투했으나 소련군에 발각되었고, 소련군과 몽골군은 이 부대를 포위한 뒤 화염방사 장갑차와 중포로 압박했다. 포위된 수색대는 지원을 요청했지만 야마가타 다케미쓰 대좌가 지휘하는 주력은 3킬로미터 거리에서 응원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5월 29일 아즈마는 남은 병력 20명을 이끌고 돌격하다 전사했고, 수색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이 참패는 이후 전역의 양상을 예고했다. 고마쓰바라는 소련군 전력을 계속 과소평가했고, 사단은 소련의 기갑·포병 우위에 맞설 수단이 없었다. 같은 해 8월 소련군의 포위 공세로 제23사단이 괴멸하는 과정은 이 5월의 패배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