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고리키를 무기고로 만든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5–1946 정치·당 지도 · 소련
경력 연표
- 1946–1949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6–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1–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41–1943고리키 시방위위원회 의장 · 국방위원회 전권위원 (군수 생산)
- 1940–1946고리키 주당위 및 시당위 제1서기
- 1939–1940고리키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39고리키 주당위 제3서기
관련 역사 사건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와 전시 군수 총괄, 1940~1946
당료의 성장과 고리키 주당위
니즈니노브고로드 지방 라투니노 출신으로, 1927년 리스코보 폴리테크닉을 마치고 콤소몰과 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1930~1931년 보르 교육기술학교 교장, 이후 보르구 당위 선전 담당과 서기 대리를 거쳐 1935년부터 이바노보구 당위 제1서기를 지냈다. 1938년 고리키 주 인민교육국장과 주당위 제3서기를 거쳐 이듬해 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1940년 1월 고리키 주당위 및 시당위 제1서기가 되었다.
도시방위위원회 의장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자 고리키는 붉은군대 후방의 최대 군수 중심지가 되었다. 1941년 가을 모스크바 방면 전선이 다가오자 10월 20일부터 약 35만 명이 주와 시의 방어선 공사에 동원되었고, 10월 31일부터는 길이 1,134킬로미터에 이르는 오카 방어선이 14개 야전 공사 구역으로 나뉘어 축조되었다. 방위위원회 체제 아래에서 이 방어 공사는 군수 생산과 함께 진행되었다.
병기창의 지휘자
그의 재임 기간에 고리키는 전선에 38,318대(37퍼센트)의 전차·자주포·장갑차, 101,700문의 각종 포, 16,324기(26퍼센트)의 항공기, 43,688문(35.4퍼센트)의 박격포, 85,722대(60퍼센트)의 무전기, 27척(43.1퍼센트)의 잠수함을 공급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치른 대가 위에 세워졌다. 독일 공군은 1941년 가을부터 1943년 여름까지 43차례(야간 26차례) 고리키를 폭격해 1,631발의 폭탄과 33,934발의 소이탄을 투하했고, 이는 전쟁 중 소련 후방에 대한 최대 규모의 공습이었다. 1943년 6월 폭격으로 자동차공장은 50개 동과 9천여 개의 컨베이어, 5,900여 대의 설비를 잃고 사실상 파괴되었으며, 35,000명의 수리공과 건설 노동자가 하루 18~19시간을 일해 100일 만에 가동을 되살렸다. 그가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이 도시의 전쟁 기록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