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5년 뒤 같은 궁정에서 공산 쿠데타에 살해된 아프가니스탄 초대 대통령
1977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운영할지 지시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바락자이 왕조 출신의 아프간 왕족으로, 1953년 사촌 자히르 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0년간 소련 편향의 근대화를 추진하며 '붉은 왕자'로 불렸고, 파슈투니스탄 문제로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벌였다. 1973년 좌파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일당제를 도입했으며 대외정책을 이란·사우디·서방으로 급선회했다. 1978년 4월 혁명 당시 대통령궁에서 PDPA 칼크파 장교들에게 가족 18명과 함께 사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간 전쟁의 직접적 전사가 되었다.
경력 연표
- 1934–1939동부주·칸다하르 주지사, 중부군단 사령관
- 1946–1951국방장관, 내무장관, 주프랑스 대사
- 1953–1963총리: 소련 편향 근대화, 헬만드 계곡 개발, 파슈투니스탄 분쟁
- 1973.07무혈 쿠데타로 왕정 전복, 공화국 선포, 대통령·총리·국방장관 겸임
- 1974–1977은행 국유화, 토지개혁법, 친서방 외교 전환, 좌파 숙청
- 1977일당제 헌법 제정, 민족혁명당 창당
- 1978.04.284월 혁명으로 대통령궁에서 사살됨
관련 역사 사건
유도경제와 근대화 (1953–1963)
1953년 9월 총리로 임명된 무함마드 다우드 칸은 이른바 '유도경제'(guided economy)를 선언하며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는 전임 샤 마흐무드 칸의 소극적 경제정책과 결별하는 것이자, 냉전기 초강대국들의 경쟁을 아프가니스탄 발전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전략이었다. 다우드는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위해 기획부를 신설하고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첫 5개년 계획(1956–1961)은 소련의 1억 달러 차관과 미국이 1940년대부터 지원해온 헬만드 계곡 개발 사업을 양대 축으로 삼았다. 이 시기 아스팔트·콘크리트 공장, 카불 제빵공장, 잘랄라바드 설탕공장, 두 개의 시멘트 공장, 굴바하르 직물공장이 건설되었고, 사로비 수력발전소와 카불·칸다하르 국제공항이 개통되었다. 카르카르·이시푸슈트 탄광의 생산량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55년 불가닌·흐루쇼프의 카불 방문 이후 소련은 군사 원조까지 확대하여 MiG-15 전투기, T-34·T-54 전차, Il-28 폭격기 등을 공여했다.
다우드의 경제정책은 '지도되는' 근대화이자 동시에 파슈툰 민족주의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그는 경제개발의 혜택이 파슈툰 중심으로 배분되도록 했고, 칸다하르 등 남부 파슈툰 지역의 공용어를 파슈토어로 단일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여성 교육 기회 확대와 1959년 독립기념일 공개행사에서의 차도르 미착용 허용 같은 사회개혁도 추진했으나, 이는 보수 성직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다우드는 코란에 차도르 착용을 명시한 구절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반대파 성직자들을 일주일간 구금하기도 했다.
1961년 파키스탄과의 국경 봉쇄로 아프가니스탄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관세 수입은 급감했고 외환보유고는 고갈되었으며, 소련이 아프간 수출 농산물을 대신 매입해 항공 수송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63년 3월, 국왕 자히르 샤는 경제 파탄을 이유로 다우드에게 사임을 요구했고, 다우드는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10년간 추진한 국가 주도 산업화와 '양 진영으로부터의 원조 획득' 전략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발전 모델의 원형이 되었으며, 1970년대 대통령 시절 그가 발표한 7개년 계획(1976–1983)의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