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처하다 쿠데타 미수로 처형된 급진파
1977년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나는 곧 혁명의 화신이다”라며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앙골라 해방운동 MPLA의 초대 내무장관이자 급진 ‘니티스타’ 파벌 지도자였다. 식민지 전쟁기 뎀보스 지역 게릴라 지휘관으로 떠올라, 독립 뒤 내무부를 장악해 추종자들을 국가 기구 곳곳에 심었다. 1976년 3월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 스스로를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파’로 내세워 소련의 지지를 구했으며, 이것이 네투 지도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식 채택을 재촉했다. 1977년 5월 쿠데타 미수 끝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다른 이름: 베르나르두 알베스 바프티스타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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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75
앙골라 해방인민운동혁명교습소 지휘관·뎀보스 지역 사령관대표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967혁명교습소 지휘관
- 1971뎀보스 지역 최고 지휘관
- 1974루안다 귀환, ‘인민권력’ 대중조직 구축
- 1975.11내무장관 취임
- 1976.03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 대표단 인솔
- 1976.10내무장관 해임, 내무부 폐지
- 1977.05MPLA 제명, 27일 쿠데타 미수
- 1977.07체포(7일), 총살형 집행(14일)
관련 역사 사건
민중권력과 인민 바이루 위원회
1974년 4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으로 신국가 체제가 무너진 뒤, 뎀보스의 게릴라 지휘관이던 알베스는 루안다로 돌아와 다른 반식민 인사들과 연결하고 포르투갈 공산당 인사들에게서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루안다에서 착수한 사업은 ‘민중권력’(포데르 포퓰라르) 원칙에 따른 대중조직망의 구축이었다.
이 조직들은 관청이 만들어 내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뮤세케 주민들이 백인우월주의 세력과 FNLA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려 자생적으로 조직한 것이었고, 알베스는 그 자생적 이웃 조직의 발전을 장려했다. 이 흐름은 1975년 7월 민중권력 세력이 FNLA를 루안다에서 몰아내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 조직화의 성과가 그를 1975년 11월 11일 수립된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내무장관 자리로 밀어 올렸다.
그는 CPB를 권력의 뿌리로 보았다. 인민 바이루 위원회(CPB)는 MPLA와 함께 가는 이웃 위원회로, 해방투쟁기 민중권력 계열의 여러 조직과 함께 생겨났으며, 이른바 ‘부분권력’을 넘어설 수 있는 기층 조직으로 여겨졌다. 그가 강조한 것은 ‘꼬리 없는’ 급진적인 논의였다. 여기서 알베스는 청년위원회 운동과 연결된다. 1974년 4월 혁명이 연 자유의 공간에서 루안다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자율 정치 소그룹이 생겨났고, 이들은 대개 해방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이끌었다. 이들은 대체로 17세에서 27세였고, 그에게서 자기 세대의 대표자를 보았다. 그들은 1976년 당시 앙골라 민간조직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시타 발레스, 군 정치위원 호세 반 두넴 등과 함께 ‘니티스타’로 불리는 한 축을 이루었다.
1976년 이후 MPLA는 민중권력을 법제화해 당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인민권력법은 CPB를 민중권력의 최소 단위로 규정했고, 같은 해 45/76호 시행령은 CPB 선거 절차를 정식화하면서 입후보를 MPLA 충성도에 묶었다. 그래도 CPB는 루안다 주민에게 국가가 닿는 가장 가까운 통로였다. 주민들은 분쟁 해결과 지원을 위해 CPB를 찾았고, 정치 교육과 동원도 CPB의 몫이었다. 주거 문제에서도 CPB는 버려진 집을 직접 등록하고 분배했으며, CPB의 허가(이주 허가증) 없이는 이사도 못 하고, CPB의 동의 없이는 수도와 전기 회사도 공급을 끊을 수 없었다.
알베스는 내무장관으로서 민중권력의 동원과 루안다 무세케 지역 CPB 운영에 중심적으로 관여했다. 처음에는 MPLA에 반대하는 이념 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지만, 이후 CPB가 자율적 사고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상황을 활용해 인종과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장려했다. 이 논의는 도시 빈민의 불만, 즉 독립 뒤에도 식민지기의 인종과 계급 위계가 그대로라는 인식과 맞물렸다. 1977년 5월 27일 봉기 직후 MPLA 정부가 루안다 CPB를 해산한 것은, 바로 이 위원회들이 알베스의 봉기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