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 이론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부의장
빈의 유대계 직물업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0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07년 『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로 이름을 얻었다. 1차 대전 중 러시아 포로로 지내다 1917년 돌아와 당 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8~1934년 당 부의장, 1918~1919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을 지냈다. 1926년 린츠 강령을 이끌었고, 개량과 혁명 사이 「중간 노선」과 「기다림」의 전술로 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봉기가 패배하자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했고 1938년 파리에서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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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34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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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34
오스트리아 국가기관의회 의원
입법·국가 대표 -
1907–1934
학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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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19
오스트리아 국가기관독일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외교·국제활동 -
1918–1934
정치·당 지도
경력 연표
- 1900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 1907『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를 펴내고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 1914.11.23러시아군 포로가 되었다.
- 1917.09포로 교환으로 빈에 돌아왔다.
- 1918–1934사회민주노동자당 부의장.
- 1918.11–1919.07독일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1926린츠 강령 채택을 이끌었다.
- 1934.022월 봉기 패배 뒤 브르노로 망명했다.
- 1938.07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린츠 강령과 「기다림」의 전술 (1918~1934)
바우어는 학생 시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카를 레너와 함께 노동자 학교 「미래」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싹이 되었다. 러시아 포로 시절 멘셰비키와 접촉한 그는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의 지지자가 되었고, 1918년 빅토르 아들러가 죽은 뒤 37세로 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외무장관으로서 독일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연합국이 이를 금지하자 1919년 7월 물러났다.
1920년 10월 총선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제1당 자리를 기독사회당에 내주자, 바우어는 연립정부에서 나오자고 고집했다. 당은 1945년까지 다시는 연방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1926년 그는 린츠 강령을 이끌었다. 강령은 계급 적대를 되돌릴 수 없다고 보고 민주주의를 노동의 도구로 삼아 대자본과 대토지를 수용하자고 했으며,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면 노동계급이 「독재의 수단」으로 맞서야 한다는 조건부 문구를 담았다. 반대파는 이 문구를 「오스트리아 볼셰비즘」의 증거로 내세웠다. 바우어는 혁명적 수사를 썼지만 실천은 개량적이었고,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어 사회민주당이 절대 과반을 얻을 때까지 「혁명적 휴지기」를 지키자고 했다. 국제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를 잇는 「2½ 인터내셔널」(사회주의 정당 국제 노동연합)을 만들어 두 진영의 재통합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1931년과 1932년 그는 자이펠과 돌푸스의 연립 제안을 거절했다. 1933년 3월 돌푸스가 의회를 정지시켰을 때도 당규가 정한 총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4년 2월 공화국 수호동맹이 정부군과 충돌한 봉기가 패배하자 당은 불법화되었고, 바우어는 브르노로 망명해 지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도왔다. 연립 거부와 때를 기다리는 그의 전술은 오스트리아가 민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