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힐퍼딩

Rudolf Hilferding
독립 활동 사회민주주의 독일 오스트리아 (유대계) 1877–1941 ✕ 옥사

『금융자본』의 저자, 바이마르 공화국 사회민주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재무장관

오스트리아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정치가. 빈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아과 의사였으나 카우츠키의 권유로 이론 활동에 나섰고, 1906년 베를린으로 옮겨 《전진》 편집을 맡았다. 1910년 『금융자본』을 펴내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갔다가 1922년 사회민주당에 돌아왔고, 1923년과 1928~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다. 망명 중 1941년 게슈타포에게 넘겨져 파리의 감옥에서 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금융자본』과 바이마르 사회민주당

힐퍼딩은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 카를 레너, 오토 바우어, 막스 아들러와 함께 정치경제학을 공부했고, 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02년 카우츠키의 요청으로 《새 시대》에 경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같은 해 뵘바베르크의 마르크스 비판을 반박하는 서평으로 이름을 알렸다. 1906년 베벨의 부름으로 베를린 사회민주당 당학교에서 가르쳤으나, 외국인 교사 고용을 막는 법 때문에 한 학기 만에 물러났고 그 자리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어받았다. 이후 그는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의 편집을 맡았다.

1910년 펴낸 『금융자본』은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이 결합한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분석했고,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 책으로 사회민주당 안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14년 그는 처음부터 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한 소수파였고, 1915년 반대파 편집자들이 해고되기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군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있었다. 1915년 10월 글에서 그는 처음으로 「조직된 자본주의」 개념을 내놓았다.

1918년 독립사회민주당에 들어가 일간지 《자유》를 맡은 그는 사회화 위원회에서 산업 사회화 계획을 내놓았으나 정부는 이를 거의 무시했다. 그는 볼셰비키에 반대해 10월 혁명을 비판했고,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합치는 데 맞서 사회민주당과의 재통합을 이끌었다. 그 뒤 사회민주당의 가장 두드러진 대변인으로서 1923년 인플레이션의 정점에서, 그리고 1928~1929년에 재무장관을 맡았다. 1925년에는 카우츠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