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경력 연표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관련 역사 사건
리트비노비치 실험학교-코뮌 (1918–1919)
1918년 여름, 레페신스키는 계몽인민위원부 학교개혁부장으로서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에 참여한 직후, 자신의 교육 구상을 현실에서 검증하기 위해 벨라루스의 외딴 마을 리트비노비치로 향했다. 그는 동료 교사 세 명과 함께 옛 지주 저택에 첫 소비에트 '실험-시범 학교-코뮌'을 열었다. 입학생은 약 100명, 대부분 극빈층 자녀였으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레페신스키의 구상은 낡은 '반동적 학교'를 철폐하고 노동을 교육의 중심에 놓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자치 위원회를 통해 공동체를 운영했고,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와 가축 사육, 취사, 청소 등 거의 모든 노동을 스스로 수행했다. 교과 수업은 노동 후 남는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교과서 대신 '작업 책'을 사용하고 학년이 아닌 수준별로 편성했다. 이는 교사와 학생 간 위계를 허물고 집단주의와 동지애를 일상 속에서 체득시키려는 급진적 시도였다.
지역 주민들은 '코뮌'이라는 이름과 공산주의적 목표에 적대적이었고, 학교는 '반혁명적 환경에 둘러싸인 섬' 같은处境에 놓였다. 그럼에도 가난한 아이들은 처음 맛보는 따뜻한 보살핌과 공동체에 깊은 애착을 보였다. 1919년 가을, 지역의 적대감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는 모스크바로 이전했고, 이후 모스크바 실험-시범 학교-코뮌으로 재편되었다. 이 실험은 초기 소비에트 노동학교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고, 나중에 안톤 마카렌코의 집단주의 교육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7년에는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영혼의 조바심」(Нетерпение души)이 제작되어 뱌체슬라프 티호노프가 레페신스키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