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옐레스 트룰스트라

Pieter Jelles Troelstra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창당 지도자, 1918년 「트룰스트라의 착오」로 불린 혁명 호소의 주인공

네덜란드의 변호사·언론인·정치가이자 프리슬란트어 시인. 1894년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운 열두 사람 가운데 하나로, 1897년부터 원내 대표로서 당을 이끌며 보통선거권 투쟁에 앞장섰다. 1909년 트리뷔너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당에서 내보냈고, 1918년 11월 독일 혁명에 맞춰 네덜란드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호소했으나 실패해 「트룰스트라의 착오」로 기억된다. 1925년 정계를 떠났다.

다른 이름: 피테르 옐레스 트룰스트라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사회민주노동자당 창당에서 「트룰스트라의 착오」까지

트룰스트라는 흐로닝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레이우아르던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프리슬란트 민족운동을 거쳐 노동운동에 들어섰다. 1890년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엔하위스가 이끄는 사회민주동맹(SDB)에 들어갔으나, 1893년 동맹이 의회 활동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자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활동을 주장하며 갈라섰다. 이듬해 그는 다른 열한 사람과 함께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세웠고, 1897년 하원에 들어가 원내 대표가 되었다. 같은 해부터 그는 가난한 농민 형제들이 부실한 증거로 중형을 받은 「호헤르하위스 사건」을 맡아 계급 사법을 고발했고, 이 사건은 네덜란드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다. 1900년 창간된 당 일간지 《인민》의 편집장도 맡았다.

원내 대표로서 그는 엄격한 당론을 고집하지 않는 포용적 지도자였지만, 1903년 철도 파업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1907년 《트리뷔너》를 낸 다비트 베인코프 등이 지도부를 공격하자 그는 1909년 이들을 당에서 내보냈고, 이들이 세운 사회민주당(SDP)은 뒤의 네덜란드 공산당이 되었다. 그의 가장 큰 과제는 보통선거권이었다. 1913년 총선 승리 뒤 당에 연립정부 참여 제안이 왔지만, 그는 참여에 반대했고 당은 정부 밖에 남았다.

1918년 11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트룰스트라는 네덜란드도 혁명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 의회에서 정부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물러나지 않았고, 다수 주민의 지지를 받아 혁명의 확산을 막았다. 이 실패는 「트룰스트라의 착오」로 불리게 되었고, 당 안에서도 불만이 커져 그는 1919년 당대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는 1925년 의원직에서 물러나 회고록을 썼고, 1930년 헤이그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