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바쿠 연설에서 중공업 편향을 공개 비판했다가 수슬로프로부터 '수정주의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는 평생 후회할 한 방의 반격이었다.
우크라이나 제당공업 기술관료에서 당 제1서기로 성장해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실질적 주동자가 되었고, 이후 브레즈네프·코시긴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룬 정치가. 국가원수로서 경공업·소비재 우선의 경제 노선을 주장하며 브레즈네프와 각을 세웠다. 1977년 정치국에서 축출되며 브레즈네프 1인 지배의 완성을 알렸다.
경력 연표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관련 역사 사건
우크라이나 테크노크라트에서 흐루쇼프 축출의 열쇠로
포드고르니는 폴타바현 카를로프카에서 주물공의 아들로 태어나, 1917년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고 지역 콤소몰 조직 창립에 앞장섰다. 1921년 불과 18세(실제로는 15세에 가까웠다. 내전 중 전투부대에 들어가려고 나이를 세 살 올렸다)에 카를로프카 지역 콤소몰 서기가 되었고, 이후 키예프 식품공업기술원을 졸업했다. 1930년대 내내 우크라이나 제당 공업 현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기술관료 경력을 쌓았다. 대숙청의 파고를 피한 그는 1939년 우크라이나 식품공업 부인민위원,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전쟁 후 그의 경로는 당 쪽으로 기울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를 시작으로, 1953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1957년에는 제1서기로 올라섰다. 이 시기 그는 흐루쇼프의 신임을 받는 핵심 인물이자 우크라이나 노멘클라투라의 실력자로 자리 잡았다. 1963년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의 흉작을 이유로 그를 질책하며 모스크바로 불러올렸지만 중앙위 서기 자리를 주어 체면을 세웠다.
바로 그가 1964년 10월 흐루쇼프 축출 음모에서 상징적·실질적 열쇠가 되었다. 포드고르니는 흐루쇼프가 자신의 '영지'로 여기던 우크라이나 고위 간부들의 가담을 보장했고, 이는 흐루쇼프에게 치명적인 심리적 타격이었다. 보답으로 그는 브레즈네프로부터 국가원수직을 약속받았다. 자신을 발탁한 후원자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이 반전은 소련 엘리트 정치의 냉혹한 역학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에서 브레즈네프의 경쟁자로
포드고르니는 식품공업 기술관료로 출발해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흐루쇼프 축출 뒤에는 브레즈네프·코시긴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지만, 1965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으로 옮긴 일은 명예로운 승진인 동시에 당 서기국의 인사권에서 멀어지는 이동이었다.
공식 국가원수로서 그는 해외 순방과 조약 비준, 외국 사절 접견을 맡아 소련을 대표했고, 정치국원 자격으로 주요 결정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그를 단순한 의전용 인물로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당 서기장직과 조직 기반을 장악한 브레즈네프가 점차 우위를 굳히면서 그의 독자적 영향력은 줄었다. 1977년 포드고르니는 정치국에서 제외된 뒤 국가원수직에서도 물러났고, 브레즈네프가 그 직책까지 겸임했다. 그의 부상과 퇴장은 1964년 이후의 ‘집단지도’가 어떻게 다시 한 지도자 중심으로 기울었는지를 보여 준다.